[리얼 스카이캐슬①] 가짜학회로 간 ‘명문고’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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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예서네 부모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 부를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려는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엘리트 고등학생 맏딸 예서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닌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에 진학해 3대째 의사 가문을 만든다’는 지상과제를 어릴 적부터 의심 없이 체화했다. 부모는 물적, 인적 자본을 모두 쏟는다. 딸은 거리낌 없이 그 자본을 소비한다. 마침내 윤리의 경계까지 넘어버린 대가는 의대 합격증이 아닌 퇴학으로 돌아온다. 부모는 쌓아 올린 명예와 스카이캐슬을 일단 포기하기로 했으며, 모든 게 ‘리셋’인 듯 보인다. 그러나 가진 게 더 많았기에 실제로는 많은 걸 잃지 않았다. 스카이캐슬을 떠날 때도 2억 원이 넘는 최고급 차량은 함께였던 것처럼 말이다.


현실에서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7개월에 걸쳐 가짜학회를 집중 취재하며 드라마 속 욕망을 능가하고, 학문 윤리까지 저버린 제2, 제3의 예서 부모와 예서를 줄줄이 찾아냈다. 이들은 드라마 속 예서 엄마, 아빠와 스카이캐슬 이웃들처럼 아이를 지원할 사회적 지위와 부를 넉넉히 지녔다. 다른 점이라면 실존하는 그들은 잃은 게 없다는 것. 뉴스타파는 가짜학회로 본 현실판 스카이캐슬을 두 편으로 나눠 준비했다. 1편에서는 수년간 특목고, 자사고 등 이른바 명문고 학생들이 와셋과 오믹스 등 해외 가짜학회에 게재한 논문 분석 결과를, 2편에서는 10대들을 가짜학회로 이끈 가장 가까운 조력자가 누구였는지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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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학회’ 고등학생 저자 22명, 국제학교·자사고·특목고 집중


뉴스타파의 가짜학회 연속 보도를 통해 드러난 해외 가짜학술단체 논문 투고자들은 대부분 대학교수 또는 정부출연연구기관 소속 연구자들이었다. 정부와 대학이 실태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성인 연구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취재팀이 와셋(WASET), 오믹스(OMICS), 월드리서치라이브러리(이하 WRL·World Research Library) 등 대표적 가짜학술단체 3곳의 발표 논문 데이터를 전수 분석한 결과, 한국인 10대 고등학생이 논문을 투고한 사례가 여럿 확인됐다.


뉴스타파가 수집한 와셋·오믹스·WRL의 논문 발표·게재 전수 데이터에 따르면 2011~2017년까지 이들 사이비 학술단체 3곳에 논문을 낸 한국인 고등학생은 연인원으로 25명(와셋 3명, 오믹스 19명, WRL 3명), 개별인원을 집계하면 22명이다. 게재 논문은 모두 11건이다. 즉, 2회 이상 논문을 투고한 고등학생이 있다는 뜻이며, 당시 고교 동문, 혈연관계인 학생들이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사례도 확인됐다. 취재팀은 이들 가운데 와셋·오믹스·WRL 3곳 외에도 가짜학회의 기준을 충족하는 엉터리 학술단체에 복수로 논문을 게재한 학생 2명(총 4건)도 확인했지만 이번 집계에서는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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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셋·오믹스·WRL 최다 투고 기록은 정부 당국의 실태 조사 대상 가짜학회인 오믹스에 총 3회 논문을 게재한 한 국제학교 여학생이 차지했다. 한 번에 저자 이름을 가장 많이 올린 사례는 국제학교 학생 10명이 공저한 오믹스 게재 논문이다. 또 다른 오믹스 논문에는 소속 고교가 다르지만 성이 같고 이름이 비슷한 학생 2명이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는데,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자매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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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셋·오믹스·WRL 투고 고교생, 국내외 명문대로 진학


고등학생 저자 22명을 출신 고교로 분류한 결과는 가짜학회의 주 고객층이 누구였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논문 게재 당시 소속 고교 유형별 인원수는 국제학교 10명(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자율형 사립고 7명(민족사관고, 용인한국외대 부설고, 상산고), 특수목적고 3명(대전과학고, 전남과학고, 대원외고), 영재형 온라인학교 1명(스탠포드 온라인 하이스쿨), 비평준화 사립고 1명(경화여고)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 학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연간 학비로 많게는 수천만 원씩 지불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춘 가정의 아이들이 가짜학회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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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저자의 대학 진학 결과를 보면 엉터리 학회 참가 실적까지 만들어 ‘스펙’을 쌓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고등학생 저자 22명 가운데 현재도 고등학생인 2명을 제외한 졸업생 20명의 대학 진학 결과를 추적한 결과 13명(65%)의 학적을 확인했다. 20명 중 절반인 10명이 미국과 영국의 명문 사립·주립대에 입학했으며, 3명은 이른바 국내 ‘스카이(SKY)’ 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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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팀은 이들에게 전화, 문자메시지, SNS 메시지 등을 통해 접촉했지만, 국내 대학에 진학한 특목고 출신 학생 A 씨만이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첫 통화에서 응답을 거절했던 A 씨는 이후 뉴스타파 보도를 보고 가짜학회를 알게 됐고, 경험한 사실을 가능한 대로 말하고 싶다고 취재팀에 밝혔다. 그는 뉴스타파와 두 번째 통화에서 ‘(고교 재학)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도 해외논문 실적을 쌓기 위한 정보가 공공연하게 돌았으며, 대학 진학을 준비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은 대학교수인 어머니에게 논문 작성 형식 정도만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원하는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서 알아보던 중에 ‘고등학생도 (논문이) 이렇게 많이 등재되는 데가 있더라’ 해서 막 알아봤던 기억이 나거든요. 저 말고도 학생이 꽤 있을 거예요. 어떤 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면 좋을까. 뭔가 논문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애들끼리 이런 얘기, 정보 공유를 굉장히 많이 하니까.”
-특목고 출신 가짜학회 투고 경험자 A 씨


가짜학회 발표, 논문 게재 실적이 이들의 명문대 진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들은 이미 중고교 시절 성적이 최상위권이었고, 각종 국제경시대회 입상 등의 실적도 쌓았다. 언론매체에 영재로 소개된 학생도 있었다.


다만 그 목적이 무엇이든, 10대 인재들이 학문과 탐구의 세계에 일찍이 발들여 ‘결과물’을 남기려 했다면 학계의 연구윤리는 지켜야 했다. 그러나 뉴스타파는 이들이 발표한 논문 대부분에서 연구윤리가 허용하지 않을 각종 편법과 꼼수, 때로는 장난을 확인했다.



부모까지 거든 ‘저자 정보’ 거짓 작성, 연구윤리 위반 수두룩


대표적인 꼼수는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 허위 기재’다.


오믹스에서는 교신저자 연락처를 학생 본인이 아닌 부모 것으로 기재한 고등학생들의 논문이 2건 확인된다. 2016년 국제학교 학생 10명은 학생 우울증을 주제로 오믹스에 논문을 발표한다. 교신저자 C 양은 이메일 주소와 함께 휴대전화 번호를 기입했다. 이 휴대전화 번호로 연락한 결과,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개인병원 원장인 C 양의 아버지였다.


2017년 여고생 2명은 의학 분야 논문을 오믹스에 게재한다. 자궁경부암 진단에 대한 산부인과 분야 연구 결과였다. 교신저자 D 양의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는 본인 것이 아니었다. 취재팀이 전화를 걸자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응답했다. 그는 D 양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더욱이 고등학생 저자의 학위와 경력 자체가 엉터리로 기록된 사례도 포착됐다. 오믹스에 2회 이상 의학 관련 논문을 투고한 한 국제학교 학생의 신분은 오믹스 홈페이지 프로필에 ‘의사’(Dr.○○○)로 나온다. 오믹스는 지금도 이 학생을 “심리학과 수면제에 정통한 연구자이자 여러 저명 학술지의 심사위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취재팀은 현재 대학생인 해당 학생과 전화통화, 문자메시지로 연락을 취했지만, 당사자는 해명을 거절했다.


취재팀은 가짜학회 실적을 만든 고등학생들이 당시 미성년이었으며, 지금도 일부는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가능한 한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고민했다. 다만 문제의 논문과 경력은 누구나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찾을 수 있는 기록들이다. 가짜학술단체의 모태가 ‘무료 열람 학술지(Open Access Journal)’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더욱 접근이 쉽다. 이들의 논문 실적은 결국 뉴스타파와 해외 파트너 언론매체들이 가짜로 지목한 학술단체·학술지들이 얼마나 엉터리로 운영되고 있는지 다시 확인해주는 증거가 됐다.


그런 사실을 알기도 전에 이른바 명문고 학생 일부는 해당 분야 전문가 수준의 해외 논문 투고 실적을 손쉽게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게 됐고, 실행했다. 이들을 도왔던 누군가는 연구자의 이름을 걸고, 공개한 논문 내용에 책임을 져야 하는 무게감을 느끼는 게 논문 작성의 가장 기본이 돼야 한다고 지도해야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뉴스타파는 취재 과정에서 미성년 인재들을 가짜학술시장의 세계로 끌어들인 장본인이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어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든 걸 주고 싶었던 부모, 명문고의 교사, 대학교수, 그리고 심지어 해외에서 날아든 정체불명의 외국인 입시 컨설턴트가 바로 그들이다. 어른들의 욕망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짜학회로 이끌게 됐는지 ‘리얼 스카이캐슬’ 2편에서 낱낱이 밝힌다.



출처: 뉴스타파 / [리얼 스카이캐슬①] 가짜학회로 간 '명문고' 학생들 / 홍우람 기자 / 2019-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