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증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 일본에서 우울증의 탄생 

정신병이나 마음의 병을 기피해 온 사회에서 우울증이 폭발하게 된 과정과 이유는 무엇일까?


2021년 발표된 OECD 보고서에 의하면, 2020년 기준 한국의 우울감 확산 지수는 36.8%로 OECD 주요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가 ‘우울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코로나19, 경기 불황, 과로 등으로 우울증이 증가하고 그로 인한 극단적 선택도 늘어가고 있다. 이렇듯 우울증이 일상이 되고, 자살 기사에 무디어져 가는 현재 상황은 비단 우리에게만 닥친 비극일까?


이 책은 의료인류학자 기타나카 준코가 일본에서 우울증이 폭발적으로 급증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심층 분석한 책이다. 서구가 아닌 비서구의 사례를 추적하여 우울증의 사회성을 여실히 보여준 이 책은 의료인류학의 명저로 꼽히며 미국인류학회의 ‘프랜시스 수’ 도서상을 수상했고, 2011년 영어 출간 후 일본어, 프랑스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다.


저자는 ‘이전에는 흔치 않았던 병이 어떻게 국민병으로 바뀌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울증의 역사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임상 현장으로 들어가 의사와 환자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울증 서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인류학자의 시각으로 관찰한다. 나아가 시선을 병원 밖으로 옮겨 과로 우울증을 중심으로 국가 정책과 관련된 제도 변화까지 설명해낸다. 이 책은 우울증이 단지 개인적인 질환이 아니라 제약회사, 행정 관료, 변호사, 노동조합 등 다양한 행위자에 의해 그 의미가 지속적으로 협상되는 사회적인 질환임을 보여준다. 이로써 저자는 신체적 기질, 과로사, 자살, 젠더 문제까지 우울증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룬다.


우울증은 어떻게 ‘국민병’이 되었는가 - 일본을 통해 읽는 한국의 우울증


2023년 서울연구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통계’를 분석한 내용을 보면, 서울시 개인병원 가운데 2017년 대비 가장 많이 늘어난 진료과목은 정신건강의학과로, 2017년 302개에서 2022년 534개로 76.8% 증가했다.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해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마음 건강 진료비 지원’ 광고를 출근길 버스 안에서 보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정신장애는 소수의 사람이 겪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 되고 있으며, 특히 우울증은 유전병이라는 오랜 낙인을 벗고 급격하게 의료 서비스와 사회 정책 속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우울증이 폭발적으로 의료화되고 있는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책은 21세기로 넘어가는 일본에서 우울증이 갑자기 ‘국민병’이 되고 정신의학이 고통에 빠진 사회질서를 교정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심층 분석한 책이다. 1990년대 말부터 경기 침체로 인해 약 10여 년간 매년 무섭게 최고 자살률을 경신해갔던 일본 역시 현재 우리와 유사한 고민을 했었고, 또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일본 사회는 만연하는 우울증과 치솟는 자살률의 문제를 무엇으로 읽어냈을까?


당시 일본에서 우울증이 국민병이 된 거대한 변화는 무엇보다 정신의학이 일상생활에 개입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거부해왔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었다. 이미 1880년대에 독일로부터 정신의학이 도입되고 제도적으로 구축되었지만, 이는 심각한 중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것일 뿐이었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일본에서 우울증이 특히 드문 증상으로 여겨졌던 것은 일본인들이 우울한 기분을 ‘미화’하기 때문이라고 추론했다. 게다가 몇몇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제약회사 일라이 릴리가 시장성 없는 일본에 프로작의 홍보와 판매를 진행하지 않도록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상황이 1990년대 후반 급격히 뒤집힌 것이다.


우울증이라는 ‘언어’의 역할 - 생물학과 사회학의 교차 위에 정신의학의 혁신이 일어나다


저자는 여기서 정신과 의사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경기 침체로 지친 사람들에게 그들의 피로감과 무기력을 우울증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게 하는 효과적 역할을 했으며, 놀랄 정도로 높은 자살 수치를 보이던 일본인에게 자살과 우울증의 연관성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일본의 정신의학이 우울증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새로운 ‘우울증 언어’를 발명함으로써 일본인의 오랜 저항을 극복했다고 설명한다. 정신과 의사들이 그전까지 생물학적이고 개별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던 정신의학 언어를 사회적 문제까지 포괄할 수 있도록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과로 우울증에 관한 법의학적 논쟁을 통해 정신과 의사들은 깊은 경제침체와 무너진 평생고용제도 속에서 회사에 대한 환자들의 자기희생적 헌신이 더 이상 보상받지 못했기에 우울증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새로운 설명을 통해 그들은 우울증을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겪을 수 있는 집단적 고통의 상징으로 격상시켰다. 그로 인해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의 경계에 대한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국가 정책 및 제도가 바뀌면서 우울증은 회사에서 병가를 받는 가장 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고, 매우 희귀한 질병에서 최근 일본 역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하는 질병으로 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우울증 언어를 통해 우울증은 사회적 고통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담는 ‘고통의 관용어’가 된 것이다.


이렇듯 우울증은 단순히 유전적인 뇌 질환에 의한 병일뿐 아니라 사회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병이기도 하다. 이 책은 과거의 문헌, 임상 실천의 관행, 제도적 변화까지 모두 고려하여 이와 같은 우울증의 복잡한 연대기를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의 폭발적 의료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