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아지풀에서 코뿔소 뿔까지 - 고려 의서 ‘향약구급방’으로 당대 문화 읽기

근대주의·중화주의·민족주의 담론을 넘어 들여다보는  몸·물질·세계에 대한 중세 동아시아인의 관념과 사유


고려 시대 사람들은 어떤 병을 앓았고,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들은 몸과 병을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현존 유일의 고려 의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은 의료 자원이 부족한 향촌에 사는 사람들이 긴급한 상황이나 일상적인 병증에 대처할 수 있도록,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약물과 치료법을 편람식으로 담은 의료 지침서다. 등장하는 상황과 병증은 대체로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병을 인식하고 치료하는 법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매우 낯설다. 하지만 이를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당대 사람들이 그 병을 어떻게 이해했고 왜 그렇게 치료하려고 했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강아지풀에서 코뿔소 뿔까지>는 한국 과학사와 한의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향약구급방>을 쉽게 이해하고 술술 읽어나갈 수 있도록 풀어낸 해설서다. 각 처방의 의도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향약구급방>의 각 구절에 대한 문헌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적절한 풀이를 얻기 위해 열띤 논쟁을 벌인 결과물이다. 이를 통해 고려 사람들과 중세 동아시아인의 사유 양식, 즉 세계와 몸은 무엇으로 구성되었으며 상호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근대의 담장을 넘어 열린 지평에서 읽어내고자 했다.


모더니즘과 이분법을 넘어 열린 지평으로


기존의 전통적 역사 서술은 대체로 과학 대 문화, 근대 대 전통, 이론 대 실천, 중심 대 주변이라는 이른바 이분법의 분석 틀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 근대주의적 관점에서는 <향약구급방>이 전근대기 미신적 요소가 많은 방서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과학’의 대척으로서 ‘문화’를 강조하거나, 특정 약물의 경우 이른바 과학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려인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다고 논급하거나, 혹은 이 텍스트를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의학으로 이행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중세의 과도기적 문헌으로 규정했다. 한편 과학의 중심으로서 단일한 중국을 상정하고 지식과 문화가 그 주변인 고려/조선으로 일방향적으로 흘러왔다는 역사 인식인 중화주의적 관점은, <향약구급방>이 중국 의서와 유사한 내용이 많다는 점에서 결국 계보학상 중화 세계 주변부의 의서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혹은 반대로 당약과 대비되는 향약 담론에 주목하면서 동국 고유의학에 대한 자의식을 표출한 선구적 텍스트라고 이해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향약구급방>을 비롯한 여말선초 향약 의서를 두고 당시 학자들이 최신 중국 의학 지식의 유입에 대처한 전략적 산물이라거나, 혹은 금·원대 선진의학을 내면화하는 과정 및 향약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는 문헌으로 기술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설명은 유럽 혹은 중국 중심주의, 선형적인 발전사관 그리고 현재주의를 반영한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이러한 인식 틀에서 벗어나, 내외의 환경 변화 속에서 역사의 행위 주체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느꼈고 이를 어떻게 풀어나갔는지에 주안점을 두고자 했다. 근대는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근대 (modernities)’가 존재하고 그 근대로의 이행 과정 역시 다양한 역사적 궤적을 밟아왔음을 인식해야 하고, 인간·사물·도구·지식·관념·텍스트 등이 국경을 포함한 지역 간 경계를 넘나들어 이동했던 세계의 ‘연결성’에 주목해야 한다. 국민국가 (nation state)라는 관념 역시 근대적인 산물이다. 사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를테면 단일한 중심국가(中國) 하나가 존재했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여러 개의 문화, 지역 국가, 네트워크, 상호교환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배타적이고 번역 불가능한 고유성이 유럽이나 중국 문명에 존재했으며 이것이 주변으로 전파되었을 뿐이라는 일면적이고 상투적인 서사는 동아시아 및 한국 과학사의 역동적 지형을 차폐시켜왔다. 이제는 근대주의·중화주의·민족주의 담론을 넘어 당시 행위자들의 문제의식 및 해결 방안, 나아가 이와 관련된 개념적 범주·용어·질문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문화적·사상적 조류에 대해 좀 더 논구해야 한다.


요컨대 <강아지풀에서 코뿔소 뿔까지>는 중세 동아시아인의 사유 양식, 즉 세계와 몸은 무엇으로 구성되었으며 상호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근대의 담장을 넘어 열린 지평에서 읽어보려는 시도다.


천 년 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각고의 노력


지은이들은 2016년부터 5년 남짓 <향약구급방>을 함께 읽었다. 풀이가 쉽지 않아 한 번 모임에 몇 구절 이상을 풀어내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축자적으로 읽으면서 낯선 신체·의약 문화를 더듬고, 병증이나 약물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일일이 캐물었다. 왜 약으로 똥을 사용했는지, 그 똥이 쇠똥인지 말똥인지 닭똥인지 지렁이 똥인지 일일이 따졌다. 유사 구절이 담긴 한의학 전체 내용을 폭넓게 찾아 검토하여 문헌적 근거를 확보하고자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 샤머니즘, 도교적 세계관에 널리 퍼져 있는 유감적 사고를 연상하거나, 병증과 처방에 내재한 한의학적 인식을 따져봤다. 부득이 현대 의학 지식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꽤 있었지만, 현대의 사고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마저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한국 중세의 일상 문화를 심층적으로 읽어내려고 했다. <향약구급방>에 담긴 상당 부분의 지식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공유한 것이었으므로 동아시아적인 성격을 띤다. 게다가 <향약구급방>은 전문적인 영역을 배제했으므로 한의학적 이론 체계와 구별될뿐더러 서구의 병·신체 문화와도 판이하고, 근대적 세계관 이전의 다른 중세적 세계관을 함축한다. 세계 의학사 연구 전체를 통틀어 이런 세계관을 드러내는 본격적인 연구 성과는 아직 나온 바 없다.


지은이들은 경험방서를 통해 중세 동아시아의 문화적 양상을 엿보고자 시도하면서 현대인의 편향된 시선으로 과거를 타자화하는 위험을 경계하고자 했고, 당대인 행위에 담긴 사고를 존중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향약구급방>에는 황룡탕이라 이름 붙인 똥을 활용한 처방이 자주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천한 것으로 여기며 중세인의 사고를 비웃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배설물 사용에 ‘막힘과 소통의 순환’이라는 그들의 생태적 관념이 깔려 있음을 이해하고자 했다. 심지어 그들은 고위 관리 집안에서 귀중하게 간직한 물건인, 코뿔소 뿔로 만든 진귀한 허리띠까지 약으로 썼다. 코뿔소 뿔의 경우 가장 강력한 동물의 뿔이라는 유감적 사고와 함께, 병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에 고려와 중국 남부 또는 동남아시아에서 실크로드로 연결되는 폭넓은 공간이 있었음을 깨닫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각고의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했지만, 저자들은 일반 독자도 술술 읽어나갈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또한 현대 독자들을 위해 원전에 없는 열다섯 개의 대분류를 시도해 재구성했고, 부제를 달았다. 이 책은 한국 중세인이 겪은 각종 질병과 치료법에 대한 에세이로서도 부담 없이 읽을 만하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