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지혁
[미국 통합의료연구소]

한국 한의학의 보건의료적 가치를 동시대적, 세계적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혁신하고, 이와 관련하여 한의사들이 미래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의사 박지혁 프로필

미국 통합의학과 통합의료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프린스턴, 펜실베니아, 코넬, 브라운, 다트머스 대학 등 미국 북동부지역의 대표적인 8개 명문 사립대학을 아이비리그라고 부릅니다. 저도 그동안 미국에서 지내면서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둘러볼 기회가 꽤 자주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 뉴욕에 와서 맨해튼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교를 구경하려고 했을 때는 그저 캠퍼스 내 건물들의 겉모습만 보러 가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방문해 보니, 캠퍼스의 학구적인 분위기가 기대보다 훨씬 인상 깊어서 다른 대학들도 하나씩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탐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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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인류의 위대한 연구업적을 주도해 왔습니다. 또한 우수한 교육환경을 갖추어 미국 엘리트 교육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둘러보고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학과나 전공에 있어서 기초학문 중심의 가치를 대단히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문학과 기초과학에 관련된 역사적인 업적이 캠퍼스 곳곳에 강조되어 있고, 각 단과대학 역시 관련 기초학문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기초학문을 통한 비판적 사고와 학술연구의 방법론을 배워 졸업하면, 그 생각하는 힘이 기반이 되어 새로운 분야에도 융합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느껴집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실용적인 기술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고,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 따라 직업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거나 새로 생기는 등 격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류에게 변화에 대처할 생각하는 힘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인문학과 기초과학 분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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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료시스템의 콘텐츠가 되는 통합의학에 기초학문이 되는 것은 합리적인 과학 지식입니다. 통합의학은 보완대체의학(CAM)과 달리 각종 치료법들을 비판적인 견지에서 수용함을 강조합니다. 미국 국립보건원 NIH에 따르면, 통합의학은 보완대체의학적 치료법들 중에서 안전성(safety)과 효과(effectiveness)의 근거를 추구하여 특수한 비법이 아닌 보편적인 과학적 지지를 받는 치료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합니다. 그리고 그 수용의 자세는 여러 의학적 가능성을 염두에 둔 상당히 열린 과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치료기술 중에서는 부작용이 강한 화학약물과 침습적인 수술을 가급적 피하는, 보존적이고 예방적인 치료전략을 우선합니다. 가능하면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덜 침습적인 치료방법을 통하여 환자를 더 낫게 하고자 하는 것이 통합의학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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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의 한의과대학 6년제 교육과정 중에서도 기초학문 교육으로서 생의학(Biomedicine)의 과학지식 비중이 매우 큽니다.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중의대를 포함한 세계 전통의학 관련 대학들 중 한국의 한의대에서 가르치는 생의학 관련 과목의 수업시간이 가장 많은 수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예들 들어, 생명과학, 생화학, 해부학, 조직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등 한의대에서 배우는 기초학문들이 생의학 과목에 속합니다. 또한 한의대 본과의 교육 중 내과, 소아과, 부인과, 신경정신과, 침구의학과, 재활의학과, 안이비인후피부과 등 모든 임상과목 교과서에서는, 전통적인 한의진료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진단, 검사, 약물치료 등에 대해 생의학에 해당하는 서양의학의 내용도 항상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한의대 교과목 중 70% 정도가 일반적인 의대 교과목과 유사하여 영상진단의학, 임상병리학, 응급의학 등의 과목들도 따로 배웁니다. 한의대의 교육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한의진료의 현대적 활용과 더불어 세계 보편지식인 생의학의 과학적 기초 역시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에서는 사실상의 통합의학적 교육이 한의과대학에서 이미 이루어져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의대 병원실습과 한방병원 수련 과정도 현재 미국 의대 종합병원 내 통합의학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통합의학 임상교육과정과 비교하면 더욱 풍부한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전통의학에서 비롯된 한의학은 기초와 임상 분야에서 현재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합리적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끊임없이 발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현재를 말할 때 먼저 중요하게 살펴볼 것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한의과대학의 교육 내용일 것입니다. 한의대 교육은 현대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발전되고 포용적인 범주의 한의학을 지속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졸업과 면허 취득 후 한국 의료계의 physician으로서 한의사들의 의식과 활동의 범위를 좌우한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지금의 한의사들은 보편적인 생의학의 기초과학적 지식으로 통합의학에서 인정하는 과학적 접근을 납득할 수 있고, 역으로 세계 통합의학계의 다양한 의료인들에게 한의사 및 한의 연구자들이 생의학적 분석과 논리를 통하여 현대의 한의학을 알리는 소통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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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리그 대학에서 기초학문을 중시하는 경향성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용적인 수많은 응용학문이나 최신 융합학문들도 수학이나 과학, 인문학 등 기초학문에서 비롯된 사고체계의 조합을 통하여 서로 소통하기 마련입니다. 한의학은 21세기인 현재 시점에서 당연하게도 과학의 사고체계와 지식성과를 한의과대학 교육과 병원 수련 체계 전반에서 수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통합의학의 프레임을 통하여 한의학 콘텐츠가 현대적, 과학적으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통합의료시스템에서 매우 강조되는 보건의료적 가치는 한마디로 의료전달시스템의 개선으로 요약됩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만성질환 위주의 일차의료에서 통합의학의 예방, 건강증진, 개인맞춤의학적 측면입니다. 이는 한의학의 전인적, 환자중심적, 자연친화적, 예방적 특징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즉 통합의료와 한의진료는 의료의 보편성이라는 면에서도 역시 상통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보편적 가치를 통하여 타 문화권의 세계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교류할 수 있는 맥락으로 한의학의 세계화가 진행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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