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화재에 온국민이 트라우마, 국내 화상전문병원 5곳뿐

2018년 2월, 박 모(57) 씨는 서울로 가족 여행을 온 장흥의 세 모녀를 포함해 6명이 사망한 서울 종로구 여관 화재에서 그 건물 1층 뒷방에 있다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얼굴에 입은 2도 화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기도를 타고 흘러 들어간 열기와 유독가스, '흡입 화상'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다. 박 씨는 사고 당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화상전문병원 화상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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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포천시에 사는 최 모(20) 씨는 집에서 밤참을 만들려고 가스레인지를 켰다가 폭염에 휩싸였다. 가스 폭발로 생긴 화염이 그를 덮쳤고 얼굴과 손발에 화상을 입었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를 한 달여 앞둔 시점, 현역 육군 장교인 최 씨 아버지는 2017년 8월 K9 자주포 사고 때 화상을 입은 장병 일부가 가족 요청에 따라 민간 화상전문병원에서 치료받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응급조치를 마친 아들을 구급차에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울산시에 있는 현대중공업 조선소 현장에서 용접 작업을 하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김 모(57) 씨도 울산대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헬기에 실려 서울로 이송됐다. 전신 75% 화상진단을 받은 김 씨는 화상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이틀 뒤에 숨졌다.


사고 장소는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았다. 대형 화재 사고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화마의 습격을 받은 이들이 모이는 곳,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화상전문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이다. 제천과 밀양의 화재로 불과 화상 치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이 전문 병원을 찾았다.


전국 화상 환자 모이는 최후의 보루


이 병원 화상 치료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화와 노동 인권을 외치며 분신했던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았다. 1997년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사고 때 한국으로 후송된 화상 환자를 집중 치료하면서 화상 전문 치료 기관으로 기틀을 잡았고, 1999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실험실 폭발사고 등 굵직한 화재 사고 환자를 치료하며 2002년에는 국내 유일 화상 전문 치료팀을 구성했다.


한강성심병원은 보건복지부 지정 화상전문병원이다. 1층에 화상클리닉, 2~3층 화상중환자실과 치료실, 4층 성형외과·미용성형센터와 재활의학과, 5층 중앙수술실·회복실, 6~10층엔 입원실이 있다. 건물 하나를 화상 진료 특화 시설로 꾸렸다. 연결된 별관은 장기 입원으로 결석할 수밖에 없는 소아·청소년 화상 환자를 위한 병원학교, 피부재생치료실, 화상연구소 등 부속기관도 갖추고 있다. 전국에 화상전문병원은 서울 두 곳, 부산 두 곳, 대구 한 곳으로 모두 다섯 곳뿐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화상 환자는 한 해 60만 명이 넘는다. 2012년 약 55만 명에서 꾸준히 늘어 2016년에는 60만 2,149명이 화상 치료를 받았다. 화상외과장 김도헌 교수는 "최근 제천·밀양 화재로 많은 분이 희생되면서 화재·화상에 경각심이 커졌지만 10여 년 전 빈번하게 일어나던 안전사고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라며 "통계에 잡히는 환자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다친 크지 않은 화상이고 중환자실까지 오는 중증 화상 환자는 그중 5% 내외일 것"이라고 말했다.


화상중환자실이라도 치료 기본은 드레싱(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거즈나 붕대로 감싸는 처치)이다. 김 교수는 "중증 화상 환자는 의료진 5명이 30분은 달라붙어야 드레싱이 끝난다"며 "일반 병원 대부분은 화상 전문 의료진이 부족하기 때문에 몇몇 화상전문병원으로 환자가 모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순간 덮친 火魔, 치료는 마라톤 싸움


포천에서 온 최 씨처럼 열흘 정도 입원하고 퇴원하면 운이 좋은 편. 중증 화상 환자 대부분은 중환자실 치료만 한 달 가까이 받고 그 뒤 재활과 통원 치료까지 생각하면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라톤 같은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지하 1층 물리치료실을 찾았다.


자동문이 열리자 환자 여럿이 헬스장에서 보일 법한 기구를 이용해 재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평온한 곳'이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안쪽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물리치료사가 온몸에 화상 흉터가 크게 남아 있는 환자의 팔을 꽉 붙잡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프다"는 신음이 이어졌지만, 물리치료사는 묵묵히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옆에서는 흔히 '거꾸리'로 부르는 경사침대에 누워 발을 고정하고 몸을 조금씩 세우는 재활 운동이 한창이었다. 화상 상처가 심한 경우 회복 과정에서 피부와 근육이 오그라들며 형태가 변하는 구축(拘縮)이 생긴다. 관절 주변 피부가 크게 구축되면 거동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어긋난 방향으로 몸이 굳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도 있었다. 손 부위 상처가 큰 화상 환자들이 주로 치료를 받는 작업치료실. 자동차 레이싱 게임이 한창이었다. 핸들을 잡은 환자는 상처가 커 보였다.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그는 지난해 1월 추위를 피하기 위해 피워놓은 불에 땔감과 기름을 넣다가 불에 휩싸였다. 신체 62%에 고통의 흔적이 남을 정도로 크게 다쳤다. 화상중환자실에 머문 시간만 6개월. 2017년 10월부터 재활의학과 치료를 받고 있다. 운전을 하던 그가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자 옆 테이블에서 젓가락질 연습을 하던 다른 환자가 "역주행하면 어떡해" 하며 웃었다. 한쪽 구석은 가정집 부엌처럼 꾸며놓았다. 가스레인지 같은 불을 사용하는 도구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일상생활을 연습하는 곳이다.


재활의학과 주소영 교수는 "80여 명 환자가 재활의학과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운동'을 하며 사회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며 "지난해 도입한 가상현실 운동은 환자 스스로 재미도 느끼고 통증도 줄어들어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화상은 마음으로도 번져, 심리치료 절실


2008년 문을 연 한림화상재단의 직원 서정은(26) 씨는 화상 환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서 씨는 초등학교 때 사고로 큰 화상을 입어 이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았다. 계속된 병원 치료 때문에 초등학교를 그만뒀다. 친구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니 교복이 부러웠다. 검정고시를 보고 학교로 돌아갔고 2016년 이 병원에서 운영하는 화상 환자 복지재단에 취직했다. 현재 병원에서 운영하는 공부방 운영과 멘토링 사업을 맡고 있다. 서 씨는 "화상 환자는 흉터가 마음으로도 번져 사회 복귀를 두려워하게 된다"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학교·직장으로 복귀한 다른 경험자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한림화상재단은 최근 '화상과 나'라는 발표회를 열었다. 네 명의 화상 경험자가 각자 자신의 삶과 상처를 사진으로 담아 털어놓는 시간이었다. 병동에서 화마의 응어리와 싸우고 있는 다른 환자들이 이들의 발표를 경청했다. 자녀가 화상을 경험한 부모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는 '소아 화상 부모 죄책감 완화 프로그램'도 인기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모임을 만들어 서로 아픔을 나누고 돕는다고 한다.


화상 환자들에게는 '병원비'도 큰 부담이다. 화상 치료는 압박 옷, 피부보습제, 실리콘 시트 등 건강보험 비급여 대상이 많다. 한 스프레이형 화상 치료제는 10여 년째 비급여에 묶여 있다. 2도 이상 중증 화상 욕창 치료에 쓰이는 이 약제 가격은 1회 분무에 5,000원, 500㎍(㎍·100만 분의 1g)에 30만 원인 병원도 있다. 이날 병원에서 만난 의료진은 "화상 환자 중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 딱한 사정이 많다"며 "외부 후원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경제적 부담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기 어려운 환자도 많다"고 했다.


김도헌 교수는 "현재 화상은 질병 분류에서 중증질환군에 포함되지 않아 화상 진료는 정부 지원금이 없는 상황"이라며 "보험 혜택도 조건이 엄격해 좋고 비싼 치료제는 의료진이 쉽게 권할 수 없고 환자들도 부담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18년 1월 31일 국회 업무 보고를 통해 "화상 치료를 포함한 140개 비급여 진료에 대해 급여 전환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참고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02/20180202014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