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지혁
[미국 통합의료연구소]

한국 한의학의 보건의료적 가치를 동시대적, 세계적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혁신하고, 이와 관련하여 한의사들이 미래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의사 박지혁 프로필

Space, 공간의 의미

 

2014년 가을, 저는 통합종양학회 (SIO)의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휴스턴으로 향했습니다. 2014년의 컨퍼런스는 항상 말로만 들어 왔던 엠디엔더슨 암센터 주관의 국제학술대회였기 때문에 특히 기대가 컸습니다. 휴스턴에 도착하여 머무르는 동안 둘러볼 만한 다른 곳들을 찾던 중, NASA에도 한번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우주과학에 대단한 관심은 없었기에 큰 기대 없이 찾아간 NASA였지만, 그곳에서 저는 몇 가지 흥미롭고 의미 있는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SVMF (Space Vehicle Mockup Facility)에서 받은 영감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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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우주인들이 우주에서 실제로 활동하기 전, 현재 우주에 있거나 우주로 보낼 구조물과 똑같은 공간에서 모의로 훈련을 하는 시설입니다. 이 거대한 시설을 보며 ‘정말 크다’는 단순한 생각과 함께, 훈련과 관계된 모든 것이 하나의 공간 안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드높은 천장 아래 구획 없이 열려 있는 하나의 공간에서, 미국뿐 아니라 우주개발과 관련되는 많은 나라의 우주인들이 함께 훈련을 받는 곳이라고 합니다. 현실을 최대한 반영하여 여러 상황에 따른 훈련을 하는 거대한 시설. 인간의 인식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 ‘공간의 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상과 다른 거대한 스케일의 시설에서, 세계 각국의 우주인들을 위한, 현실 상황을 반영하는 많은 구조물들을 보며, ‘의료에 관련된 의학교육이나 연구소에 이런 시설이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시애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시애틀 역시 큰 기대 없이 친구 가족의 초대로 가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듣고 볼 것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시애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매우 유명한 회사들에는 아마존,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등이 있습니다. 보잉이 시애틀 지역에 자리 잡음으로써 파생된 비행기 관련 산업의 흔적을 시애틀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일례로 예전에 시애틀 연고로 있었던 NBA 농구팀 이름도 시애틀의 비행 산업에 착안하여 ‘슈퍼소닉스’였다고 합니다. 보잉사 공장 투어를 신청하면, 보잉 747, 767, 777, 787 등 모델에 따라 실제로 비행기들을 생산하고 있는 거대한 공장시설을 안내자의 인솔 하에 돌아가면서 견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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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장들의 사이즈는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비행기 모델이 한 단계씩 조립되어 완성될 때까지 차례대로 줄지어 있는 모습은 엄청난 스케일의 인공미가 느껴지는 장관이었습니다. 이 공간에서는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한 모델의 커다란 비행기체를 몇 개월에 걸쳐 완성한다는 동일한 목표 아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집중하는 확고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한 모델당 한 공장으로 드넓은 공간이 아낌없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듯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자연경관뿐 아니라 산업시설 등의 인공구조물들 역시 엄청난 사이즈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게 단순히 이용 가능한 땅의 크기가 넓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공간에서도 물리적 의미와는 다른 사이즈의 극대화를 읽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미국의 연구소와 대학들에 있는 몇몇 친구들 덕분으로 가끔 미국의 교육, 연구시설들을 둘러보기도 합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뉴욕시의 맨하탄은 허드슨 강 하구에 위치하여 대서양에 접하는 기다란 섬인데, 특히 맨하탄 섬의 동쪽으로 의학관련 연구시설과 종합병원 등이 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 코넬 의대 소속의 한 연구동 건물을 둘러보다가 틈새 공간마다 간간이 보이는 작은 장소를 발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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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막힌 답답한 공간이 아닌, 연구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벽에 그 옆으로는 흰색 패널과 마커펜이 설치된 간단한 휴식 장소입니다. 연구원인 지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 커피 한잔 들고 가끔 쉬면서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른 연구원들과 공유하기도 하고, 생각나는 대로 패널에 마커로 쓰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합니다. 위대한 연구결과들이 우연한 만남과 대화와 성찰에서 착안된 경우가 많았다는 사례들을 떠올려 보면, 소통과 협력을 통하여 생각의 사이즈를 무한히 넓혀 창의적인 연구를 이끌어 낼 수도 있는 공간인 이 휴식장소가 어떤 연구자에게는 연구동 건물에서 제일 중요한 공간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보와 사상의 교류, 계몽과 사교의 장이 되었던 프랑스의 살롱이라는 공간이나 영국의 티 문화가 동시에 연상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가정집마다 있는 여분의 공간인 차고 또한 애플처럼 위대한 기업의 시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NASA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제가 미국에서 진료하면서 이곳의 의료시스템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을 ‘마치 우주정거장 ISS에 나와서 과학실험을 하고 있는 우주인 같다’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주정거장은 여러 국가들의 우주시설이 도킹 되어 지구 위 궤도를 돌고 있으며 우주 공간에서만 다룰 수 있는 여러 가지 과학실험들을 수행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사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와 닿지 않았는데, NASA에서 직접 여러 전시물을 접하니 인류의 노력이 실감이 납니다. 대한민국의 의료체계는 한반도라는 공간의 사회 문화적 산물이고, 이는 시대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직결되어 있으며, 특히 한의학은 한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관계가 깊습니다. 지구 안에 있으면 지구가 푸른 구슬과 같은지 알 수 없으며, 언제나 당연하게 여겨 왔던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보지 않으면 무중력상태에서의 또 다른 현상과 이치를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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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의대에서 한의학을 전공하고 한국의 의료체계에서 활동한 한 명의 한의사로서 저의 관심사는 ‘한의학의 장점과 특징을 활용하여, 최적의 의료전달체계에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한의진료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미래와 세계의 보건의료 발전에 기여할 방향은 무엇인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전문가적 호기심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의미 있게 인생을 살 것인지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고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탐구를 위하여 한국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통합적 의료시스템을 직접 경험하고 미국 의학계에서 현재 시점에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동시대적 가치를 배운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지구라는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정거장으로 나와 이런저런 실험을 수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미국이라는 다른 나라의 공간에 살면서 비로소 공간의 양식은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물 안’이라는 비유도 마찬가지 의미일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에 누구와 있는지를 통하여 스스로의 좌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 먼 지 가까운 지, 빠른 지 느린 지, 비슷비슷한 무리의 공간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한국 한의학은 많은 면에서 현대적인 혁신을 요구받고 있고 그 변화의 방향에는 다각도의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길게 잡아도 20년 정도지만, 미국 의료인들이 실천해 온 미국 통합의학의 전인의학적 개념과 성과는 그 방향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느낍니다. 통합의료 시스템에서 타 의료직종간의 협력은 physician 교육을 받은 한국 한의사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잘할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예방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섭생 그리고 천연물을 활용한 의약 개념은 세계보건의료의 발전 방향에 부합합니다. 이렇게 한국이 아닌 공간에서 미래 한의학의 모습을 예상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한의사 박지혁의 미국 통합의료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