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지혁
[미국 통합의료연구소]

한국 한의학의 보건의료적 가치를 동시대적, 세계적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혁신하고, 이와 관련하여 한의사들이 미래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의사 박지혁 프로필

뉴욕과 뉴저지의 공간에서

 

제가 처음 미국에서 정착하여 일하게 된 곳은 뉴저지 주 (State of New Jersey)입니다. 뉴저지 주의 북부는 뉴욕 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뉴저지에서 바로 허드슨 강만 건너면 뉴욕 주 (State of New York)의 뉴욕 시 (New York City)에 도착합니다. 허드슨 강을 건너다닐 때면, 마치 한국의 서울에서 강남과 강북이 한강으로 나뉘어 서로 오가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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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뉴욕 주와 뉴저지 주는 서로 다른 법이 적용되기에, 차라리 두 개의 나라와 비슷하게 인식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미국의 정식 국가 명칭은, 미국이 주별로 다른 사정과 상황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국 전체에 적용되는 연방법이 있지만, 각 주에 따라 다른 주법이 실제 생활에서 매우 다양하게 적용되므로 운전할 때도, 사업할 때도, 진료할 때도 그 다른 부분들을 반드시 숙지하고 임해야만 합니다. 즉 ‘State’라는 공간적 배경에 따라 다른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을 자세히 이해하고 파악하려면 일단 각 주에 따라 다른 접근을 해야 함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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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의 의료환경은 그 주에 속해 있는 의료인들 상호 간의 관계, 환자와 의료인 간의 직간접적 관계, 지역 의료기관 및 의료인의 구성과 주 내 분포, 의료인에 대한 의학관련 교육환경과 면허발급요건 등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의료환경은 컨텍스트이며 이를 담아 내는 컨테이너로서 각 주의 의료제도가 존재합니다. 어떤 비슷한 사안에도 뉴저지 주와 뉴욕 주의 제도가 각 주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저지 주법에서 규정된 acupuncturist 면허를 신청하고 취득하는 과정은 뉴욕 주법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편이며, 신청인은 뉴저지 주의 의료법규 시험을 따로 치러야 합니다. 클리닉을 개원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는 과정은 뉴욕 주가 뉴저지 주보다 좀 더 시간과 비용이 들고 일이 많은 편입니다. 또한 교통사고 발생 직후 가해자와 피해자 판별이 없어도 모두 바로 치료를 받게 하는 뉴저지 주의 자동차보험 관련 법규에 의하여, 뉴저지 주에서 교통사고 환자의 진료는 다른 주에 비해 상당히 활발한 편입니다. 이에 따라 뉴저지 주 내의 로컬 의료기관에서는 교통사고와 관련되는 의료인들 간 고용관계나 협력관계가 흔히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뉴저지에서 2년 반 동안 통합의학센터 모델을 운영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뉴저지 지역 상황에 맞는 의료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것과 센터 내 공간을 이에 맞게 잘 구성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다양한 직역의 전체 스탭들이 유기적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공간적 배경의 맥락에 맞춘 고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 내 여러 통합의학센터의 임상 및 수익 모델을 둘러본 뒤, 저의 이러한 생각들은 로컬 의료기관 단위에 맞는 고민이라기보다는 종합병원급 시설을 갖춘 공간 내에 존재하는 통합의학센터에 걸맞는 것이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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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공간’의 개념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의 개념을 넘어서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사이버 공간’처럼 물질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그런 개념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무형의 공간 개념은 연결된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연결을 통한 상호작용의 장이며, 이곳에서 구성원들은 공간의 일부로 작용함으로써 존재감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연결은 확산의 통로가 되므로, 관계에 기반한 공간의 크기는 물리적 한계에 구애됨 없이 다양한 모양으로 거대하게 팽창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저는 뉴욕 시 맨하탄에서 제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이러한 관계적 공간 개념을 통해 통합의료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는 의료에 개입하는 사람들의 관계 자체가 공간의 정의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활용한 것입니다. 관계적인 공간이란, 여러 의료인들이 하나의 건물에 일정한 진료시간 동안 상주하고 있는 그런 상식적인 병원 공간의 풍경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통합의료 시스템은 대형 종합병원이나 암센터에 속한 통합의학센터에서 주로 추구되어 왔으나, 로컬 의료기관들에 적합한 통합의료 모델은 그 공간적 맥락에 맞게 새로이 개발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환자를 중심으로 하여, 통합적인 관점에서 환자의 건강상태를 개선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플랜에 따라 적절한 의료인력이 배치되고, 환자의 보험플랜 등 상황에 따라 의료비까지 고려하는 최적화 과정이 제가 생각하는 통합의료 시스템의 관건입니다. 지역사회 의료에서 이것을 하나의 건물 내 병원시설 공간에서 모두 이루어지게끔 하는 것이 언제나 편리하고 완벽한 것은 아니며, 만약 단일한 장소에서 비효율적인 인력구조와 불합리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통합의학센터라면 환자의 다양한 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처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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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에서 저는, 자신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의료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조합이 어떻게 구성되는 지와 이를 위한 협력 및 소통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의 의료제도는 한국 고유의 의료환경을 반영하여 ‘한의사’ 면허제도를 의사 면허 종류의 하나로 공식 인정하고 운용해 왔습니다. 한의사들은 한의학을 통하여 전인적 관점의 진료로 환자중심적으로 천연물 의약과 식이를 활용하고 예방 섭생을 강조하는 가치를 의료의 현장에서 실천해 왔습니다. 한의학과 한의진료의 콘텐츠는 단순히 환자진료를 통해 전달되거나 일방적으로 홍보되어 알려지는 것뿐 아니라, 다른 의료인들을 매개로 연결되어서도 그 고유의 가치를 더욱 증진시키고 확산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유용하고 유효한 것이 철저하게 가려질 것이며 진정한 한의학의 보건의료적 가치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콘텐츠들이 타 의료인들과의 협력을 통해 더욱 강조되는 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제가 뉴욕 주와 뉴저지 주에서 임상활동을 하며 느끼고 배우는 것처럼, 미국 내에서는 각기 다른 의료적 배경을 가진 여러 주에서 한의사들의 다양한 활동 양상을 통해 어떻게 한의학의 콘텐츠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볼 수 있습니다. 의사 (MD)의 수가 비교적 적은 주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의료인들의 권한이 강한 편이며, 그중 네바다, 뉴멕시코, 하와이, 플로리다 등 몇 개 주에서 한의사들은 동양의학의사 (DOM, Doctor of Oriental Medicine)의 타이틀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플로리다 주나 워싱턴 주 등에서는 ‘acupoint injection’이라 하여 주사기를 사용하는 약침 기술을 주면허를 가진 acupuncturist가 법적으로 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리조나 주의 경우 통합의학 (Integrative Medicine)이 처음으로 메디컬 스쿨에서 정립된 곳으로서, 의료인 간 협력을 중시하고 보완적, 통합적 치료들에 대해 포용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료구조 내에서 관계를 맺으며 구현되느냐에 따라 한의 콘텐츠 자체도 영향을 받아 해체되고 재구성됨으로써 새로운 것으로 탄생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내 각 주의 의료환경은 한반도의 공간에만 적용되는 한국 의료법에 의해 영향을 받는 한의진료의 활용 방식을 탈피해 한의학의 혁신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실험적 무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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