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이승민
[워킹맘 한의사 앤 더 시티]

안녕하세요? 저는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침구과 전문의로서 활동하면서 침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2019년 미국 뉴욕으로 왔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한의사로서, 강사 및 연구자로서, 또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해외에서 살아가는 일상과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의사 이승민 프로필

뉴욕에서 첫 왕진 경험

 

한국에서는 2019년에 의사들의 왕진 시범사업이 시작된 데 이어 올 2021년 초에는 한의계도 왕진 수가 시범사업을 추진한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는 환자분들은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까지 오기가 쉽지 않음으로 매우 잘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뉴욕에서도 한의사의 왕진은 가능하고, 이를 ‘house call (하우스콜)’ 혹은 ‘home visit (홈비짓)’ 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왕진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인 친구에게 들어보니, 맨해튼에서는 거동이 불편하고 연로하신 분들이 왕진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 많은 환자가 연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요. 개중에는 돈 많은 운동선수, 연예인들도 많아서 화려한 집 구경과 넉넉한 팁을 받으며 치료하는 때도 있지만, 간혹 안 좋은 의도로 부르는 일도 있다고 했습니다.


환자분이 왕진을 요청해서 가보니 야동을 틀어놓고 맞이한다든지, 부적절한 언행이나 성추행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한의원에서도 침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시라고 했더니 전라 상태로 누워 있으면서 치료 중 아래 부위를 덮는 것을 거부했던 환자도 있었고, 진료 상담을 받겠다면서 30분 내내 본인의 음경 지속 발기증 (priapism)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얘기하던 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오죽하겠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여자 한의사들은 왕진을 잘 안 가거나, 잘 아는 환자일 경우에만 간다고 해서 저도 미국에 있는 동안 갈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직전, 제가 매우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한국에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교수님의 스승님이신 원로 교수님께서 뉴욕에 거주하시는데, 가족 중 한 분이 몸이 아프셔서 치료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가족분도 워낙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진료실까지 오시는 것 힘드실 것 같아서 필요하시면 왕진해 드리겠다고 했고, 그렇게 해서 뉴욕에서의 첫 왕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왕진 가방 준비였습니다. 의료 도구와 제품들이 진료실처럼 다 세팅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왕진 가방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고 진료 도중에 갑자기 필요할 수 있을 물품들을 챙겼습니다. 제가 직접 환자분 댁까지 이동하는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까지 넉넉하게 생각해서 앞뒤로 환자 예약이 없도록 변경해야 했고, 첫 왕진이다 보니 치료비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진료실 이용비가 안 나가는 대신 교통비와 그 시간 동안 다른 환자를 못 보는 비용까지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 외에 여벌의 가운도 챙기고, 급하게 처방해야 할 경우에 드릴 수 있는 가루 한약도 챙기고, 환자 차트 및 서명을 받아야 하는 동의서 서류 뭉치, 일회용 부항컵, 휴대용 전침기도 넣고… 그러다 보니 짐이 정말 많아지더군요.


빵빵한 왕진 가방을 보며 준비를 잘한 것 같아 마음도 뿌듯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무게를 짊어지고 돌아다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지칠 것 같아서 내친김에 바퀴 달린 가방까지 하나 더 구매했습니다. 보통 메이크업 아티스트분들이 방문 출장을 많이 다니시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 가방을 검색하니 많이 나오더군요. 물론, 한의사는 주요 치료 도구가 날카로운 의료기기인 만큼, 왕진 가방은 무조건 바늘이 뚫고 나올 수 없는 딱딱하고 단단하면서 구멍이 없는 가방이어야 한다는 정침법 (Clean needle technique, CNT) 규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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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내고 환자분과 예약한 시간에 맞춰서 진료하러 갔습니다. 실수를 안 하는 것은 물론, 흡족해하실 만한 진료를 해드리고 싶은 욕심에 진료 시작부터 치료 마무리까지 머릿속으로 과정들을 하나씩 밟아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한의원을 떠난 새로운 환경에서의 진료는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순간순간 생각지 못했던 상황들도 발생하고 이에 대처하는 임기응변도 빨라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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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환자분을 만나 뵙고 간단하게 인사드린 뒤에는 본격적으로 진료 및 치료를 할 방으로 안내를 받게 되는데요. 그때 방으로 들어가면서 재빨리 파악해야 하는 것은 손 씻는 곳, 청결지대를 설치할 곳, 그리고 환자가 치료받을 곳입니다.


1. 손 씻는 곳: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손 세정제로만 씻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 물과 비누를 이용해서 손을 씻어줘야 하는데요. 방에 개인 화장실까지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음으로 방으로 안내받으면서 손 씻는 곳이 없다면 먼저 손을 씻고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안 그러면 방 안에 들어갔다가 우왕좌왕하면서 다시 나와 손을 씻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원래 정침법 (CNT)에서 추천하는 손 씻기 방법은 마지막에 일회용 종이 타월로 손의 물기를 닦는 것인데 일반 집에서는 수건밖에 없는 경우가 많음으로 청결을 확실하게 챙기고 싶으면 왕진 가방에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을 종이 타월 (청결지대 설치할 때도 필요함) 몇 장을 화장실에 들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2. 청결지대 설치: 그다음에는 왕진 가방을 펼쳐서 청결지대를 설치할 곳을 파악해야 합니다. 청결지대 (clean field)는 멸균된 제품과 깨끗한 도구들을 올려놓고 물건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준비하는 구역을 말합니다. 깨끗하고 평평하며 건조한 표면을 먼저 물색해야 하고, 침이나 의료 도구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 곳에 종이 타월을 깔고 청결지대 설치를 시작합니다. 청결지대 중앙에는 뜯지 않은 멸균된 침, 거즈, 알코올 솜을 올려놓고, 청결지대를 중심으로 그 옆에는 휴대용 침 폐기물 통, 쓰레기 봉지 등을 세워두어서 발침 즉시 폐기하여 관련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합니다.


3. 환자 치료 장소 확인: 환자가 치료받을 곳으로는 보통 본인의 방 침대나 소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왕진 갔을 때도 환자분께서는 1인용 소파 베드에서 침 치료를 받겠다고 하시고 저도 처음에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침 맞으려고 보니 생각보다 침대가 낮아서 환자분께서 눕고 일어나실 때 많이 불편해하시더군요. 버튼 하나로 침대가 내려가고 올라가는 진료실 환경이 갑자기 그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왕진 치료 시 고민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유침하는 동안의 대기 시간입니다. 한의원에서는 보통 문을 열어두고 벨을 쥐여주며 불편하시면 부르라고 말씀드린 뒤 커튼 닫고 환자분도 조용히 쉬실 수 있도록 하는데, 환자분 집에서는 이것 또한 고민해야 하는 것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왕진 갔던 환자분 댁은 제가 방을 나가면 앉아 있을 곳도 없었고, 환자분이 연세가 많으셔서 혹시라도 불편하시거나 움직이실 경우에 생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한시도 곁을 떠나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적막이 흐르는 와중에 숨소리조차 너무 크게 들리는 - 정말 길게 느껴지는 유침 시간이었고, 진료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정리한 왕진 가방 안에는 휴대용 음악 기기와 생활용 무전기 한 쌍이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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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왕진이 본격적으로 수가 시범사업으로 시작되는 만큼, 이번 칼럼에서는 뉴욕에서의 제 첫 왕진 경험담을 공유하였는데요. 의료 활동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예민한 수가 문제뿐만 아니라 왕진 (방문 진료) 특성상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과 안전사고들을 고려해서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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