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이승민
[워킹맘 한의사 앤 더 시티]

안녕하세요? 저는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침구과 전문의로서 활동하면서 침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2019년 미국 뉴욕으로 왔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한의사로서, 강사 및 연구자로서, 또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해외에서 살아가는 일상과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의사 이승민 프로필

뉴욕 오기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본 칼럼의 제목은 대학원생 때 접했던 엄태웅, 최윤섭, 권창현 작가의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의 글 제목을 패러디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저는 박사과정 때 그 글을 읽으면서 이 좋은 것을 왜 진작에 못 읽었나 한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나마 박사과정 끝나기 전에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책으로까지 발간이 되었던데, 그 당시에는 인터넷에 올라온 블로그 글을 출력하여 읽으면서 줄을 긋고 무릎을 치며 폭풍 공감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윗글에서 큰 도움을 받은 것처럼, 결국 사람은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성공 또는 실패했던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하여 같이 성장할 기회로 삼자는 의미에서 이번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다른 많은 분과 마찬가지로 저희 가족에게도 2020년부터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연일 최악의 수치를 찍는 코로나로 인한 불안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일하면서 아이 둘 키우느라 발생하는 육아 전쟁, 그리고 남편의 대학원 졸업과 함께 또다시 온 가족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는데요. 미국에 계속 있는 것이 좋을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온 가족이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마음잡고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쉽지 않았는데 다시 또 모든 것을 접고 돌아오려니 참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미국에서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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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 해외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 밑에서 돈 걱정 없이 학교만 다니며 살던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과는 달리, 전기세부터 월세까지 모두 다 책임져야 하는 해외 생활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생활비와 월세는 물론, 애들 용품, 남편 학비까지 생각했을 때 한국에서 계획했던 것보다 두 배에서 세 배 이상 돈이 더 든 것 같은데요. 심지어 남편은 장학금까지 받았고, 저는 좋은 인연들 덕분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쉼 없이 일할 수 있었지만, 돈을 모으면서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서비스를 받을 때면 무조건 내야 하는 18%의 팁, 물품을 구매하면 추가되는 뉴욕주세 4%, 뉴욕시세 4.5%, 그리고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비싼 의료비와 보험비, 통신요금, 전기세 등 돈이 나갈 일들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 살던 것만큼의 삶의 질을 유지하고 싶다면 한국에서 벌던 것보다 최소 두세 배는 벌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국 어느 지역에 정착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만큼 물가가 저렴한 동네에서는 그만큼 한의원에서 받을 수 있는 돈도 적어지므로 결국 비슷할 것 같습니다. 초기 정착 비용은 많이 드는데, 한의원은 정착하는 데 최소 6개월은 걸리니 미국에 오시게 된다면, 현실적으로 잘 계산해서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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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가 말하는 삶의 질이란, 문화생활을 하고 여유 있게 사는 삶의 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의사로서의 삶의 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버는 것보다 훨씬 많이 벌면서도, 한국에서처럼 하루에 환자 수십 명을 보면서 온종일 잠시도 못 앉아 있어서 힘들었다거나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입이 아픈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환자 수가 정말 많은 뉴저지 내 한의원의 부원장으로 근무하면서도 한국에서 일할 때처럼 퇴근하고 나서 다리가 퉁퉁 붓는다거나 온종일 허리를 못 펴서 요통으로 고생하는 날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진료하면서도 에너지가 남아서 환자분들의 이야기를 더 경청해 드릴 수 있었고, 더욱 성심성의껏 봐 드릴 수 있었고, 집에 와서도 찬찬히 돌이켜 보며 더 좋은 치료 계획을 고민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서 진료를 못 하게 돼도 대부분 예약을 하고 오시는 환자분들이라 미리 조율해서 비울 수 있었습니다.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환자를 많이 본다고 돈을 더 많이 버는 구조는 아니기에 미국에서 오래 진료하신 분들이 제게 이구동성으로 해 주셨던 말이긴 했습니다. “미국에서 한 번 진료 맛을 보면 한국 돌아가서는 하기 쉽지 않다던데…”라고요.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이런 진료 환경에 맞춰서 준비를 해왔을 것 같습니다. 치료 방법과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줄 아는 진료, 치료 변화를 캐치하고 하나씩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진료를 더 구축하고, 영어도 그에 맞춰서 어려운 전문 용어를 쓰는 영어가 아닌 일상 대화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영어로 준비하시는 게 더 맞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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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위한 모임인 인터네이션즈 (Internations)의 대표로 일할 때, 외국 분들이 한국 살면서 제일 좋다고 감탄하는 것 중 하나가 서울의 지하철이었습니다. 서울 지역에서는 지하철이 안 가는 곳이 없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저렴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거의 모든 역마다 에스컬레이터 혹은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뉴욕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기와 외출을 할 때면 한쪽 팔에는 아기를 안고 다른 팔에는 유모차와 기저귀 가방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슈퍼우먼처럼 수시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다니나 싶어서 주변 외국 엄마들한테 물어보면 다들 워낙 체격이 크고 씩씩해서 애 둘, 심지어 셋까지도 곧잘 끌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뉴욕 맨해튼에서 아이 낳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임신했을 때 누워서 태교 동화를 읽을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체력을 길렀어야 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안 그래도 타지에서 살 때는 더더욱 서러운 일도 많은데, 육아와 일까지 병행하다 보면 더 힘듭니다. 체력이 곧 정신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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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을 돌이켜보면 후회도 되고, 진작 알지 못해서 아쉬운 일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어떤 것들을 공유해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지면 관계상 일반 외국인으로서, 한의사로서, 그리고 워킹맘으로서 뉴욕 오기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한 가지씩만 정리해 봤습니다.


지금은 온 가족이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남편도 복직했고, 저도 새로운 일터를 구했고, 애들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가족분들 곁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여유롭고 편안하게 살고 있고, 친구들을 만나서 팁을 내지 않아도 되는 식당에서 마음껏 한국 음식을 먹고 있을 때면 귀국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아직 정리하지 못한 한 가지, 뉴욕에서의 제 개인 한의원 홈페이지는 왠지 모르게 가끔씩 들여다보게 됩니다. 어떻게 불태워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간직했던 제 마음속 꿈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가끔 삶에 열기를 넣어줄 수 있을 개인적인 용도로 남겨 두고자 합니다.

Healthy with Kathy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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