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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여행을 시작했다. 전라북도의 곳곳에 숨은 생태여행지와 그 곁의 마을을 함께 찾아가는 길이다. 첫 여정에서부터 모시의 쌉쌀한 향기가 깃든 이야기를 만났다.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여행

한국에서 오지라고 칭할 수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 여러 사람에게 이 질문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늘 제각각이었다. 가장 많은 지목을 받은 지역은 강원도다. 경북 봉화, 울진, 영양 일대도 제법 비중이 높았다. 개중에서 인상 깊었던 건 “무·진·장”이라는 대답이었다. 전북 무주, 진안, 장수를 이르는 것인데, 설명에 의하면 산타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무·진·장’을 오지로 받아들이는 이가 많단다. 전북지역을 오지로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라 무척 흥미로웠다.

전라북도의 생태관광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 대답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생태관광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자연 생태계의 특정한 순간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여행이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여기는 이러저러한 지리적 특징이 있고, 그 안에 어떤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 시기에는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식. 당연히 전라북도의 생태관광도 그런 유의 수순을 따르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뜻밖의 설명을 듣게 됐다.

“우리는 천편일률적인 생태체험보다는 생태의 다양성을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어디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 공간의 주인을 인간이라고 이야기해서도 안 됩니다. 다양한 생명체가 인간과 함께 공생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부터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요. 그래야 여행자에게 우리 마을의 자연 생태를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우선의 목표예요.” 전라북도생태관광육성지원센터 박종석 센터장의 설명이다.

전북은 도 차원에서 무려 10년의 기간을 두고 생태관광사업을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투입되는 예산만 1,000억. 지금까지 4년간 14개 시·군 중 12개 시·군에서 관광에 필요한 인프라를 조성해 왔다. 올해는 이 프로젝트가 반환점을 도는 시기. 이제는 지금까지 준비한 이야기를 차례차례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준비해 온 여행 인프라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프로그램의 이름도 ‘보타닉 원정대’라고 그럴듯하게 지어 두었다. 박 센터장은 전에 없던 형태의 여행으로 생태환경과 마을 공동체를 모두 살리고자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이 한눈에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직접 보는 수밖에. 이럴 때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첫 번째 목적지는 정읍이다. 정읍은 고창과 더불어 12개 시·군 중에 생태관광의 원취지를 가장 잘 살리고 있는 지역이다. 지역마다 여러 마을이 있고, 각기 서로 다른 생태환경과 프로그램을 구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정읍의 솔티마을이 선두에 서서 롤 모델의 역할을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적잖이 기대가 차올랐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주민들이 나와 달뜬 얼굴로 손님을 맞는다. 준비해 놓은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네의 미소에서 엿보였다. 첫 손님들이 어떻게 느끼고 평가할지 자못 기대가 큰 눈치였다.

토종 식물이 군락을 이루는 생명의 보고

생태관광이니 만큼 이 여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생태탐방이다. 솔티마을은 마을 뒤에 자리한 내장산의 중턱을 따라 ‘솔티 달빛 생태숲’이라는 숲길을 조성해 놓았다. 예부터 마을 주민이 다니던 숲길인데 생태환경이 잘 보존돼 있다. 자연 탐방에 안성맞춤이다. 숲으로 들어가는 동안 이 마을 사람들이 어릴 적 뛰어놀던 놀이터로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변한 놀거리가 없던 시절, 마을의 아이들은 마을 곁의 산과 들을 뛰어다녔을 테니 말 그대로 이 숲이 놀이터였을 테다.

“어릴 때 여기서 많이 노셨죠?”
“그럼요. 그때는 눈만 뜨면 뛰놀던 곳이 이 숲이에요. 우리가 걷게 될 숲속의 산책로가 곧 놀이터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이 숲에서 노는 게 마냥 좋았어요. 시간은 또 어찌나 잘 가던지요.”

에코 매니저를 맡은 마을주민 김광열 씨 표정이 신이 났다. 마을의 숲이 여행지가 될 줄 그때는 몰랐을 테지. 어릴 적 추억을 여러 사람에게 풀어놓을 기회인지도 모른다.

숲의 초입은 제법 돈 들어간 티가 확연히 난다. 내장산이 뒤에 있고 앞으로는 운치 있는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어서 풍광이 멋지다. 이쪽에 스카이워크를 만들어 여행객이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했는데, 인근의 조각공원까지 이어진다. 이는 생태관광과 별도로 도 차원에서 공원화해 놓은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일대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온갖 희귀식물의 보고다. 특히 진노랑상사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늦여름에 진풍경을 만든단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붉은 상사화는 외래종이고 샛노란 빛을 띈 진노랑상사화가 우리 토종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외에도 우리 토종 단풍도 이 주변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일대가 한국 토종식물의 보고라는 걸 무척 강조한다.

우리가 걸을 길은 이 공원을 지나 훨씬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솔티숲 옛길’이라고 적어둔 이정표를 지나 오솔길에 접어들었다. 숲은 전반적으로 눈길을 확 사로잡는 화려함이나 웅장함은 없다. 대신 천천히 걸으며 소박한 산길 구석구석에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온갖 생명의 흔적을 마주한다. 하나하나 따라붙는 설명도 재미가 쏠쏠하다.

숲 탐방은 에코 매니저 소임을 받은 마을 주민이 이끈다. 마을 주변은 그곳에 사는 주민이 제일 잘 아는 법이다. 길을 걷는 동안 발밑에 자리한 수많은 식물을 찾아 설명을 듣는다. 한겨울 추위에 메마른 몸을 움츠린 나무도 그 안쪽 깊이 생명의 기운을 감추어 두고 있음을 확인하고, 썩은 나무 둥지 안쪽을 루페 (loupe)로 살피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 루페는 눈으로 보기 어려운 미세한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돋보기다. 어린아이를 둔 가족이라면, 이 숲이 감추어둔 미지의 세상에 적잖은 재미를 느낄 법하다.

마을 숲이 주는 또 다른 매력도 빼놓아선 안 된다. 이 숲에 깃든 개인의 역사와 마을의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다, 숲길이 주민들에게 어떤 공간이었는지, 어릴 적 이 숲에서 무얼 하고 놀았는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경험담이 말하는 이의 입술에서부터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다른 무엇보다도 여행자가 공감 백배하는 순간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머물던 곳에서는 마을의 주민이 주민을 괴롭히고 죽여야 했던 비극에 가슴 시려온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라지만, 이미 시간의 너울에 실려 희미해진 잔혹사가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다시 일어섰고,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재건했으니, 진정 박수를 보낼 일이다.

‘모시’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결속

숲 탐방에 더불어 마을을 여행한다. 골목을 따라 걷고 마을 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다양한 체험시설을 둘러보는 것도 좋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관심을 끌었던 건 마을에서 직접 준비한 식사였다. 마을회관을 임시로 사용해 상을 펴고 숱하게 고민하고 연습한 한 상을 떡하니 펼쳐놓는다. 그릇마다 담겨 있는 음식이 알록달록하다. 정성과 정성이 나란히 놓여서 한가득. 밥상에서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건 돼지갈비인데, 이것도 보통의 손길로 완성한 게 아니라는 것쯤 훤히 보인다.

상에 오른 음식은 무엇 하나 뺄 것 없이 균형 잡힌 맛을 선사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온 게 모시밥이다. 모시 잎을 넣어 함께 지은 모시밥은 쉽게 먹기 어려운 모시의 맛에 밥알의 단맛이 더해져 별미 중 별미였다. 여행의 시작을 모시밥이 놓인 밥상으로 시작한 건 이유가 있다. 이 마을은 모시 농사로 단단한 결속을 이룬 공동체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이 밥상인 셈. 모시는 기르는 데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 아닌 데다, 줄기마다 가늘게 풀어헤쳐 천을 짜는 재료가 되기도 하고 음식의 재료로 쓰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는 재배한 모시를 모두 떡의 재료로 쓰는데, 여기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41년째 떡집을 운영하는 김용철 씨 가족은 형의 영향으로 다섯 형제가 전국 각지에서 떡을 만들었다. 어릴 때 먹고 살자고 제각기 떠났지만 남부럽지 않게 떡 장사를 해서 돈도 제법 벌었다. 그러던 중에 노모의 치매로 형제는 귀향을 결정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어머니의 병 수발을 드는 한편, 마을의 특용작물로 모시 농사를 시작했다. 혼자 짓는 농사가 아니라 마을이 함께 짓는 농사다. 수확한 모시는 떡집에서 전량 수매해 마을에 공동의 이익을 안겨주었다. 김 씨는 모시 잎을 수매할 때 시중보다 비싸게 사들이고 킬로그램당 300원씩 기금을 조성하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잣돈은 갈수록 불어나 마을 연금의 기능을 한다. 팔순 이상 어르신 6명에게 매달 10만 원씩 120만 원을 연금으로 보낸다. 마을 어른을 위한 마음 씀씀이가 저러하니 마을의 분위기도 자연스레 바뀌어 간 모양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사는 마을 공동체의 표본으로 여기만 한 곳이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직접 재배한 모시로 떡을 만들어 올리는 수익만 40억에 이른다. 작은 마을에서 이룬 성과치고는 놀라운 수준이다. 모시떡이 유명하니 안 먹어볼 수가 없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솔티떡집에 들어가니 다양한 종류의 떡과 음료까지 즐길 수 있도록 해두었다. 고급스러운 두텁떡도 함께 나왔지만, 관심은 모시떡에 쏠렸다.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떡을 집었다. 오호라, 인절미와 비슷한 쫄깃한 식감이 훌륭하다. 씹다 보면 모시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전국에서 이 마을의 모시떡을 찾는 이유가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이만한 맛이면 경쟁력이 충분했다. 전국에서 이 마을의 떡을 찾는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을을 나오면서 전라북도가 시도하는 생태관광이 잘 자리 잡는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보완해야 할 점도 적잖이 눈에 보인다. 그런 단점을 고려해도 이 여행에 관심을 둘 당위성은 충분했다. 올해는 전라북도에 자주 오게 되겠구나. 의미 있는 여정이다. 기분이 좋았다.

모시는 한국인에게 있어 여름날 시원한 옷을 만드는 재료이자 훌륭한 먹거리 역할도 하는 귀한 식물이다. 칼슘이 우유의 48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골다공증이나 뼈 관련 질환에 좋다. 플라보노이드 (flavonoid), 루틴 (rutin) 등의 영양소도 함유되어 있어 치매와 노화 방지에 도움을 준다. 칼륨과 아미노산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이며, 식이섬유가 풍부해 변비에 좋은 다이어트 식품이기도 하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