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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봄은 스며들었는데, 시절이 하 수상하다. 여행을 떠나기도 어렵고, 권하기도 어려운 시국, 가까운 인왕산에 봄맞이를 나섰다.

마을 바로 곁에서 펼쳐지는 절경

옷깃을 여미며 길을 걷던 게 엊그제 같은데, 훈훈한 바람이 귓불을 스친다. 그 사이 겨울이 가고 기어이 봄이 왔음을 바람의 결에서 느낀다. 예년 같으면 카메라를 짊어지고 이 산으로 저 산으로 뛰어다녔을 테지만 올해는 옴짝달싹 못 하는 중이다. 치료제도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집 밖을 벗어나기도 어려운 봄이 되어 버렸다.

이 좋은 계절에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아이들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학교도 못 가는 상황에 온종일 집에 앉아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고 엄마의 통제를 받으려니 힘들 법도 하다. 창밖으로 노란 아지랑이 같은 산수유가 한들한들 흔들리기에 마음을 냈다. 가까운 곳에 꽃구경이라도 다녀오자고. 온 식구가 마스크를 채비하고 손 소독제까지 챙겨서 길을 나섰다. 무려 한 달 만의 외출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경복궁역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경복궁역이 있는 서촌은 인왕산의 아랫마을이다.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서 서촌. 그 뒤에 자리한 인왕산에는 수성동계곡이 있다. 이제는 서촌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명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었다. 1968년 1월 21일, 북에서 내려온 간첩 김신조 사건으로 청와대 일대가 통제됐고, 인왕산도 덩달아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이 되어 버렸다. 그 통제가 풀린 게 1993년. 25년 만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왕산의 일부는 통제돼 있었는데, 2018년 지금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나머지 구역까지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서촌은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동네가 됐다. 금천교시장을 따라 허름한 술집을 찾던 이들이 서촌의 안쪽을 파고들며 이 동네의 매력을 알렸다. 입소문을 따라 서촌의 골목을 여행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본이 그 뒤를 따랐으며 자연스레 골목골목의 안쪽까지 사람의 발길이 닿기 시작했다. 수성동계곡이라는, 서촌 최고의 절경이 명성을 더욱 널리 알리게 된 계기다.

수성동계곡의 장점이라면 마을과 바로 인접해 있다는 것. 잇따라 늘어선 골목의 빌라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느닷없이 푸르른 자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황스러울 만큼 급작스럽게 드러내다 보니 처음 이곳을 찾아온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절경을 맞이하게 된다. 더불어 구태여 인왕산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아이를 데리고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인파를 피해 나들이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봄꽃 놀이조차 조심스러운 이때 인파가 몰리기 전 살짝 다녀올 만한 곳이라는 판단이 섰다.

겸재 정선이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한 달 내내 집에만 갇혀 있던 아이들이 몸을 움직이도록 해 주고 싶었다. 사실 수성동계곡은 경복궁역에서 도보로 15~20분 정도 걸어야 만나는 곳이다. 걷기를 반기지 않는 이들이 “마을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다.”라고 푸념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거리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봄날, 잠깐의 나들이를 즐기며 걷는다면 큰 문제는 아닐 법하다. 길을 걷는 사이사이 따스한 봄볕을 아이들도 충분히 만끽하는 표정이다. 눈치를 보아 걷는 게 지겹다고 느낄 때쯤 부러 통인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기름떡볶이와 닭강정, 호떡 따위를 먹이며 다리를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은 아주 가까운 편이다.

서촌이 가진 또 다른 미덕은 곳곳에서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현장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길을 걸으며 윤동주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선 시대의 일화를 들려주며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야기가 있는 걷기는 수고로움이 덜하다. 깔깔 웃다가 멈춰 서서 건물을 구경하다가, 마침내 수성동계곡에 다다랐다. 아이들의 입에서 “우와”하는 탄성이 터진다. 겨울을 보낸 봄의 인왕산은 연둣빛 색깔로 옷을 갈아입고 곳곳에서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중이었다.

인왕산은 겸재 정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정선의 그림에서 인왕산은 진경산수로 완성된다. 모르는 이에게 이곳에 신선이 살았다고 해도 믿을 법한 산세다. 둥그스름한 능선과 거칠지 않은 품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수성동계곡은 먹으로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경관을 가졌다. 바위와 그 틈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 바위와 바위 사이로 놓인 돌다리는 여지없는 선계의 풍광이다. 겸재 정선이 남긴 <장동팔경첩>에 이 수성동계곡이 남아 있다. 지금 보아도, 왜 ‘진경’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그림이다.

이 계곡에 피어난 꽃은 여자아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노오란 산수유꽃을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본다. 자그마한 꽃이어도 그 안에 첩첩이 들어찬 꽃잎은 매년 보아도 신비롭고 보면 볼수록 앙증맞다. 멀리서 안개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보면 촘촘하다. 집 마당에서 매년 피고 지는 모습을 보았던 그 꽃이라는 게 믿기지 않으니, 봄의 아름다움은 그저 신비로울 따름이다.

계곡 곁으로 난 인왕산 자락길을 따라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수성동계곡의 화룡점정은 계곡 중간에 지어둔 정자다. 계곡 아래에서 보면 인왕산의 산세 아래로 정자가 놓여 마침내 선경을 완성한다. 그 정자에는 이미 산을 찾은 어른 몇몇이 앉아 봄의 햇살을 즐기는 중이었다. 둘째 아이가 약수터까지 올라가고 싶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식구 중에 몸 움직이는 걸 가장 싫어하는 녀석이 먼저 그리 이야기를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수성동계곡 위쪽에 있는 석굴암으로 발길을 옮기기로 했다. 그 길 중간에 약수터가 있다. 계단 몇 개를 따라 100미터쯤 올라가면 된다. 그곳에서 200미터쯤 더 올라가면 인왕산 석굴암이다.

약수터 즈음 왔더니 한 달 내내 집에만 머물던 식구들이 거기까지는 가지 말자며 손사래다. 궁금하긴 하지만 체력이 달리니 코로나바이러스가 지나가면 운동 좀 해서 다시 오잔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 여기까지 나온 것만 해도 어디인가.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돌아가면 되지. 약수를 떠서 건네니 꿀떡꿀떡 잘도 마신다. 얼음처럼 시원한 그 맛에 첫째가 “파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나도 한 번. 물이 달다. 꽉 막혀있던 체증이 확 내려가는 맛이다. “파 하하!” 웃음이 절로 난다.

봄날의 고소한 채식

“배고파요.”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충분히 배꼽시계가 울 법도 하다. 이곳으로 향할 때부터 가야겠다 마음먹은 식당이 있다. 사찰음식을 기반으로 한 채식 식당 ‘마지’이다. 이렇게 볕 좋은 봄에는 봄나물 한 상 차려 먹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창 봄나물이 올라올 시기이니 이런 때엔 채식 싫어하는 이도 채식에 맛을 들이기 좋다.

사실 마지는 내게 스승 같은 곳이다. 식문화에 관심이 많아 어떻게 하면 사찰음식의 진면모를 세상에 알릴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사찰음식 조리법을 가르쳐 준 곳이 마지였다. 채수를 내리고 식자재를 어떻게 하면 말끔하게 다 먹을 수 있는지 그 지혜를 여기서 배웠다. 물론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스님도 많지만, 일상에 가까운 사찰음식 조리법을 배우기에는 이곳이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마지는 ‘세 끼 중 한 끼는 채식, 삼 일에 한 번은 채식’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식당을 운영한다. 오신채가 빠진 담박한 음식이 얼마나 몸을 편안케 해 주는지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곳. 더 솔직히 말하자면, 속이 부대끼지 않는 이곳의 음식이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호두로 만드는 만두를 참 좋아했다.

마지는 삼계탕으로 유명한 ‘토속촌’ 바로 부근이다. 원래 방배동에 터를 잡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과감히 서촌의 한옥으로 옮겼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터진다. 반가움 가득한 얼굴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작은 마당에는 지난겨울에 담근 장이 넉넉하게 익어가고, 사찰음식 특유의 고소한 향이 온 집안에 가득하다.

한동안 달달 외우고 다니던 메뉴는 지금도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두부스테이크와 비빔밥을 시켜주고 아내에게는 정식을 주문해 주었다. 호두만두가 그리웠던 나는 호두만둣국이다. 사찰음식은 특성상 조리 시간이 길지 않다. 물론 주문이 밀려있을 때는 예외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손님이 정말 많이 줄었다는데, 이날만큼은 손님이 적진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횡행하면서부터 이쪽 골목도 상황이 심각하단다. 심지어 ‘토속촌’마저 하루 몇만 원을 못 버는 날이 허다하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 힘든 시기에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이가 있으니 더없이 반갑다며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아이들의 입에서 “맛있다!”라는 탄성이 터질 때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부로 만든 스테이크가 이렇게 맛있는 거냐며 되묻는다. 너희 어릴 때 이미 그거 먹어 봤거든? 기억이 안 나겠지만. 아내가 받은 채식 한 상 차림은 나물 특유의 상큼한 맛이 한가득이다. 다만 현미밥은 아무리 씹어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눈치다. 무엇보다 입이 즐거웠던 건 오늘의 주인공으로 삼은 호두만둣국이다. 고기를 넣지 않아도 잘 다진 호두와 채소가 어우러져 만두 속을 고소한 맛으로 꽉 채운다. 약간은 두툼한 만두피는 차진 식감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켜 만족도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음식의 재료로 쓰이지 못하고 잘려 나간 채소의 각 부위는 음식쓰레기가 아닌 채수로 되돌아왔다. 뜨거운 물에 채소 각각의 맛이 우러나 어지간한 육수 못지않은 감칠맛을 선보인다. 도리어 채수가 가진 그 맛이 호두만두와는 찰떡궁합. 뜨끈한 국물이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느낌이다.

만족스러운 한 끼를 누리고 문밖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나들이 나오길 잘했다. 역시 사람은 햇살을 봐야 즐거워지는 모양이다. 봄이 왔다는 건 참새들도 아는 건지, ‘마지’ 문간에서 이리저리 후루룩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장난을 친다. 소생하는 기운이 만방에 가득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도 지나간 저 겨울처럼 스쳐 지나가길, 이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모두의 입가에도 저 반짝이는 햇살처럼 미소가 가득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차오르는 봄의 어느 날이다.

견과류 중에서도 영양이 풍부하기로는 호두가 으뜸이다. 다량의 단백질과 다종의 필수 아미노산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L-아르기닌은 다량으로 함유돼 있는데, 이는 지구력과 운동능력을 향상하고 혈액순환과 다이어트에 도움을 준다. 임산부에게는 임신 중 혈압의 수치를 낮추고 혈관을 확장해 혈류를 원활케 한다. 혈액순환 개선과 심장병 예방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폴리페놀 같은 항산화 성분도 많아 노화방지에도 좋다. 더불어 엽산, 오메가-3, 비타민 E 등이 많아 뇌 건강에도 도움을 주며 노화 방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