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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시작한 바이러스의 창궐은 봄을 지나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도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며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은 자연의 복판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럴 때일수록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은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푸른 눈의 한국인이 일군 비밀의 숲

태안이라는 동네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갈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전국 어느 동네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매번 새로운 게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따지자면 태안만 한 지역이 드물다. 국도를 따라 달리면 길가로 온갖 이정표가 지나가고, 곳곳에 수목원이니 유원지의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붙었다. 봄에는 봄이어서, 여름에는 여름이니까. 가을이 되면 가을대로, 심지어 겨울에도 놀거리 볼거리 먹을거리 천지다. 그중에서도 천리포수목원은 이제 태안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곳이다. 태안 여행 좀 했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가 봤을 만큼 꽤 유명세를 치렀다.

이 수목원의 이름이 드높아진 건 설립자의 덕이 크다. ‘푸른 눈의 한국인’이라고까지 불리는 고 민병갈 선생. 원래 이름은 Carl Ferris Miller지만 민병갈이라는 한국 이름이 워낙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62년 태안 소원면 일대에 대지를 매입해 1970년부터 본격적인 나무 심기를 했다. 그렇게 40년 이상 온 정성을 들여 일궈 낸 곳이 이곳 천리포수목원이다.

이 수목원은 우리나라 1세대 수목원으로 분류된다. 이곳의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이유다. 당초에는 교육 및 종 다양성 확보와 보전을 목적으로 운영됐다. 오랫동안 관련 분야의 전문가나 후원회원 등에만 공개해서 일반인은 그 안에서 자라는 온갖 보석 같은 식물을 볼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곳이 세상을 향해 빗장을 연 건 아주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09년에 이르러서다. 총 17만 평이라는 커다란 규모에 호랑가시나무, 목련, 동백나무, 단풍나무, 무궁화 5속을 중심으로 13,200종의 식물자원이 식재돼 있다. 이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종류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건 고 민병갈 선생이 식물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오로지 이 땅의 식물이 좋아서 그 아름다움을 보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목원을 만들었다. 평생 모은 자산을 모두 털어 민둥산의 박토를 일궈냈다. 그 어떤 욕심 없이 이런 거대한 일을 해냈다는 건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이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산으로 돌아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그의 행보는 산림 분야 최초로 금탑산업훈장 수여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수목원은 그 자체로 숲의 명예전당에도 헌정됐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목원이 자리한 곳은 태안의 천리포다. 십리포, 천리포, 만리포같이 태안에는 숫자로 해안의 크기를 나타내는 이름의 해수욕장이 많다. 심지어 일리포라고 불렸던 곳도 있지만, 지금은 구름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천리포라는 건 그만큼 해변의 면적이 크다는 의미다. 그 아름다운 해안을 옆구리에 끼고 수목원이 앉았다. 수목원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무척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입구부터 신경 써서 정리해 둔 모습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이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피어난 꽃잎

식물이 사람에게 주는 감성은 각별하다. 매표소를 지나 수목원으로 들어서면 길 양쪽으로 익숙한 꽃과 처음 만나는 꽃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별다른 맛이나 향이 느껴지지 않아도 괜히 공기부터 달달한 것만 같고, 꽃잎의 발색은 마음을 편안케 한다. 힐링인지 치유인지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단어를 나열하지 않아도 마음이 마냥 편안해지는 걸 보면, 심사가 괴로울 때 식물을 찾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듯하다.

수목원의 길을 따라 걷는 걸음은 허리를 숙여 꽃송이 하나하나를 살피는 덕에 자연스레 천천히 흐른다. 무리 지어 피었어도 꽃잎 하나가 사랑스럽다. 다만 이렇게 마냥 천천히 걷기에 수목원은 정말 크다. 길도 수시로 갈라지기 때문에 반드시 매표소에서 수목원 지도를 챙기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다 길을 헤매는 경우도 일어나기 딱 좋은 구조다. 수목원 안에는 각기 다른 주제의 정원만 27가지다. 수목원 가운데에 큰 연못과 작은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둘레로 온갖 꽃이 만발했다.

벚나무 하나만 해도 이토록 종류가 많은지 미처 몰랐다. ‘처진잉키사벚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꽃 하나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흔하게 봐왔던 왕벚나무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뽐낸다. 주변으로 노오란 수선화와 흰 수선화가 각각 무리 지어 피었고, 주변으로 동백나무도 드러나지 않게 다소곳이 앉아 있다.

수목원 안에는 옛 정취를 그대로 살린 한옥과 초가집이 곳곳에 놓였다. 각각의 집은 주변에 심은 나무의 종류를 이름으로 삼았다. 호랑가시나무집, 다정큰나무집, 해송집 같은 식이다. 연못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하나씩 만나게 된다.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멸종위기식물 전시 온실에는 어떤 종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코로나19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아쉬울 따름이다. 온실 밖에서나마 슬쩍 안쪽을 들여다보지만, 분위기만 알 수 있었을 뿐 좀처럼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북쪽의 비비추원을 지나 서쪽으로 넘어가면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서해전망대다. 푸른 잎사귀와 알록달록한 꽃의 잔치를 즐기다 슬쩍 바다를 끼고 걷는 것도 탁월한 선택이다. 고운 모래사장과 일렁이는 파도. 이곳이 바로 천리포해수욕장이다. 그 앞으로 작은 낭새섬이 떠 있다. 이곳의 주민은 섬의 모습이 마치 닭의 볏을 닮았다고 해서 ‘닭섬’이라고도 부른다.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면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벚꽃과 목련으로 만든 시원한 맛

한참을 걷고 걸어도 새로운 식물과 정원은 끝없이 이어진다. 좀처럼 지루할 틈이 없다. 도리어 걷다 지치기 쉬우니 수목원에 두 군데 있는 카페나 벤치에서 충분히 쉬면서 관람하는 게 좋겠다. 수목원의 한복판 습지원과 민병갈기념관 사이에 ‘안녕, 나무야’라는 카페가 있다. 이름부터 감성 충만한 느낌. 안쪽은 미니멀한 느낌을 잘 살린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메뉴를 찬찬히 살펴보는 중에 독특한 음료가 눈에 들어온다. 벚꽃아이스티와 목련아이스티. 봄날이면 보기만 해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꽃으로 만든 음료라니. 급 관심이 쏠렸다. 다른 여느 카페에는 없는 메뉴이니 맛을 안 볼 수가 없다.

주문을 받는 카페 관계자에게 물으니 두 가지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꽃이 피었을 때 따서 청으로 만들었다가 음료로 만든단다. 두 가지를 다 시켰다. 음료가 나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포장 용기에 담아 내주는데 투명한 듯 우아하게 물든 색감부터 시선을 끌었다. 벚꽃아이스티는 확연한 붉은빛이다. 반면 목련아이스티는 연한 브라운에 가깝다. 음료 위에는 각각 벚꽃과 목련꽃을 봉오리 채로 담아놓아 마시는 이가 헷갈리지 않도록 배려한 것도 눈에 띈다.

두 음료의 맛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벚꽃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만큼이나 달콤하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하게 퍼지는 첫맛 뒤로 쌉쌀한 생화의 향이 남는다. 입안으로 감도는 향은 잠시 머물렀다 일순간 사라진다. 긴 여운으로 남는 건 처음 퍼졌던 화사함이다. 반면 목련아이스티는 좀 더 우아하다. 마치 생강나무처럼 톡 치며 솟아오르는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든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을 연상케 한다. 향기의 파장은 길지만, 일순간 말끔하게 사라진다. 피어났다 흩어지는 봄꽃처럼.

마지막 수목원을 빠져나오는 길에는 온갖 색깔을 뽐내는 튤립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나오는 길까지 눈이 즐겁다. 이곳은 사계절 언제나 꽃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는 곳이다. 봄에는 온갖 다채로운 색으로, 여름에는 수국의 보랏빛으로, 가을이 오면 붉은 빛깔의 꽃이 눈을 황홀케 한다. 겨울에는 수목원에 하얀 눈이 내리는 날도 왕왕 있다. 그때마다 이 안의 온 숲이 하얗게 눈꽃을 피운다. 언제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여행지라는 얘기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다시 태안으로 향할 생각이다. 언제나 푸른 바다와 맛있는 먹거리가 풍성한 그곳을 다시 찾을 때, 수목원도 다시 가 볼까 한다. 그때는 또 시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말이다.

목련은 봄에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금세 시드는 대표적인 봄꽃이다. 꽃을 피우기 직전의 꽃봉오리는 한약재로 사용하는데, 이를 ‘신이(辛夷)'라고 부른다. 목련의 꽃봉오리, 신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약간의 매운맛이 난다. 성질도 따뜻하다. 그래서 이를 약재로 쓰면 신체의 땀구멍을 열어 가래, 땀, 소변 등의 배출을 돕는다. 노폐물의 체외 배출을 도와주는 것. 이를 통해 호흡기 증상을 개선한다. 알레르기 비염이나 축농증으로 인해 막힌 코를 뚫어주고 기관지나 폐처럼 공기가 드나드는 기도를 열어주는 효과가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