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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복작거리는 시내 한복판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지어 섰다. 한눈에 봐도 누군가 인위적으로 심어 지금까지 이어진 듯한 모습. 무심결에 감탄이 나왔다.

재앙이 몰려올 남쪽을 막아라

상당히 생소한 모습이었다. 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소나무들. 어림잡아도 백 년 이상은 훌쩍 넘은 듯한 크기다. 처음에는 흙담솔이 뭘까 싶었다. 알려지지 않은 소나무 종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를 몰아오는 내내 머릿속에 그렸던 숲은, 수목이 우거진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이 숲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그런 숲이 아니다.

늘어선 소나무 한쪽에 선 안내판을 보고서야 비로소 흙담솔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흙담솔은 흙담 옆으로 심은 소나무로, 이 나무들 옆에서는 흙담이 있었던 거다. 191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10년여 전의 일이다. 서귀포시 서홍동 일대는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 이 마을의 고경천 진사다. 그는 이 자리에 흙담을 쌓고 소나무를 심어 재앙을 대비했다고 전한다. 이야기만으로는 고 진사가 예견한 재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해일인지, 산사태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궁금증은 다른 곳에 설치해 둔 오래된 돌판에서 풀렸다. 아마도 1970년대에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은, 적이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돌판이다. 여기에 정성 들여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마을의 연유가 담겼다. 그곳에 적힌 바에 따르자면, 서홍동 일대의 마을은 고려 초까지 그 연원을 거슬러 간다. 마을에 현청이 설치된 것은 1300년경이었고, 이 마을을 중심으로 제주도 남부의 머나먼 곳까지 육지의 문물이 흘러들었다.

문제는 마을의 자리. 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은 흡사 화로와도 같은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옛 어른들은 이 마을을 홍로(烘爐)라 불렀다. 화로는 남쪽이 허하다. 그러니까, 남쪽의 바다로 향하는 길목이 뚫려 있어 화로가 제 역할을 못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런 자리는 재앙이 빈번하게 일어날 곳이다. 그 재앙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해일인지, 산불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오래전에는 남쪽으로 담을 쌓고 못을 파서 물을 고이게 하여 주민들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했다는 말만 남았다.

110년을 이어온 96그루의 비방

남쪽에 흙담을 쌓은 건 1910년 봄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이 마을에서 가장 어른이자 박식한 인물이 바로 고경천 진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마을 사람을 독려해 남쪽으로 흙담을 쌓고 둘레로 소나무를 심었다. 일어나는 불길은 물로만 잡는 게 아니다. 때로 흙으로 덮어 불길을 끄기도 하니, 아마도 고 진사는 재앙을 흙으로 막아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남쪽에서 거대하게 밀려오는 물길을 저 소나무로 막으려 한 건 아니었을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소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서 상상의 고리를 이어간다. 저 높이가 얼마나 될까? 10미터? 혹은 그 이상? 가늠조차 안 된다.

그 뒤로 지금에 이르는 동안 솔숲은 마을을 지켜왔다. 그 사이 우리가 모르는 변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지금의 서홍동 일대는 무탈하다. 평온하고 아름답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정이 가득한 동네가 되었다. ‘마을숲’이라 부르는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겠으나, 아마도 이런 모습의 숲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무의 생명이 이런 식으로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 역시 여기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만 나온다. 저 나무들은 110년을 살며 얼마나 많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지켜봤을까. 몇 세대의 인간이 나고 자라고 사라지는 동안, 지금은 전하지 않은 사라진 역사를 얼마나 숱하게 보았을까. 저 숲의 위엄이, 이 땅에 터를 잡고 산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게 경이롭다.

투박한 매력, 돼지 대창순대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차를 몰아 달리면 오래지 않아 남원읍에 당도한다. 이곳에 아는 사람만 아는 순대 명가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어 보통 점심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재료가 떨어져 문을 닫는 집이다. 순대만 파는 가게인데도 간판은 ‘범일분식’이다. 분식과 순대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이어지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분식집에서 순대를 취급하는 경우는 있지만, 순대만 파는 집은 처음 본다. 하여튼 별나다.

그런데도 입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는지라 동네 사람은 물론이고 제주 여행을 온 이도 굳이 이 외진 읍내까지 들어온다. 서두르지 않으면 금세 음식이 동난다는 건쯤은 기본 상식처럼 머릿속에 담아두고 오기 때문에, 아침부터 가게 앞이 복작복작하다.

가게의 지난 역사가 꽤 오래된 듯한 분위기가 겉에서부터 풀풀 풍긴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시골 읍내의 오래된 노포, 딱 그것이다. 간판의 전화번호도 오래전 두 자리 국번을 사용하던 것이 아직 붙어 있다. 내부가 그리 넓은 편도 아니다. 고작해야 테이블 네다섯 개 정도. 혼자 혹은 둘이 갈 경우 다른 손님과 합석하는 일은 각오하는 편이 좋다. 요즘처럼 합석을 꺼리는 정서가 팽배한 시대에도 이 집에 들어오면 손님들이 고분고분해진다.

자리를 잡고 앉아 휘휘 고개를 돌려 탐색전을 벌인다. 정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시골 순댓국 가게인데, 손님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메뉴는 순대백반, 순대한접시 두 종류다. 여기에 막걸리. 아침부터 순대에 막걸리를 찾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많은 모양이다. 순대백반은 순댓국을 의미하고, 순대한접시는 말 그대로 순대만 썰어서 내주는 거다. 이전에는 메뉴의 이름이 달랐다. 순대한접시가 아니라 순대정식이라고 적어두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연히 순대를 포함해서 이것저것 나올 줄 알고 시켰다가 밥도 없이 아침부터 순대만 먹었더랬다. 차가 있어서 술도 못 마시는데 괜스레 억울한 기분에 휩싸여 우울한 표정으로 순대 한 접시를 싹 비우고 나왔었다.

일전의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는 당당하게 순대백반을 시켰다. 주방에서는 첫새벽부터 미리미리 재료를 준비해 놓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후루룩 끓여낸다. 혹시 고추 양념을 풀지 않은 고소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가게는 좀 힘들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매콤하게 양념을 풀어서 끓여내는 탓이다. 들깻가루까지 다 넣어서 나온다. 국밥의 첫 숟갈은 국물부터 맛을 보는 게 국 룰이다. 한 수저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캬! 칼칼한 내음이 목젖을 ‘탁’ 치는 느낌으로 강렬한 첫인상을 선사한다. 매운 기는 딱 거기까지다. 입으로 들어오는 순간에만 톡 치고 그다음부터는 순하고 부드럽게 감긴다.

이 집을 유명하게 만든 건 대창순대다. 두툼한 대창 안에 꾹꾹 눌러서 담은 순대가 실하다. 겉은 쫄깃하고 선지와 채소, 찹쌀, 당면 등을 온갖 소를 다져서 넣은 속은 구수하다. 대창이 다소 질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적당히 씹으면 적당한 타이밍에 잘 분해되어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순대라는 게 원래는 이런 것이다’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순대다. 국물도 고소해서 밥을 말아 먹으면 궁합이 딱 맞는다. 곁들여 나온 깻잎장아찌를 척 얹어서 먹어도 일품이다. 먹다 보니 뚝배기 바닥이 금세 드러나 버렸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이걸 언제 다시 먹으러 올 수 있을까. 배는 부른데, 속에서 욕심이 들끓는 게 한도 끝도 없다. 아쉬울 때 얼른 퇴장해야 한다. 가게 문 앞으로 줄이 길다. 이렇게 먹고 한 그릇에 7,000원. 아유, 이러니 손님이 끊어질 수가 있나.

돼지의 대창은 체질이 허한 것을 보하고 지혈에도 효과가 있다. 치질과 변비를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성질이 찬 재료여서 비장이 약한 사람은 적게 섭취하거나 자주 먹는 것은 삼가야 한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