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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소리 없이 나뭇가지 위로 알록달록 물이 들어오기에 이곳을 떠올렸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이면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하는 아산의 외암민속마을이다.

숱한 학자를 배출한 예안 이씨의 집성촌

아산은 충청남도 북부에 자리한 곳이다. 위로는 평택, 아래로는 예산, 양옆으로 당진과 천안을 이웃하고 있다. 아산 하면 온천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만큼 아산은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사실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이 통합돼 아산시가 되었는데, 두 지역 모두 여기저기에 온천이 많았고, 아산시로 통합된 이후에는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물 좋기로 유명한 온천 관광지의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그렇다고 아산에서 온천만 찾는다면 섭섭한 일이다. 아산에도 여러 여행지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외암민속마을은 가을에 꼭 가야 할 여행지로 손색없는 곳이다. 외암민속마을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된 마을이다. 이 자리에 마을이 생긴 건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예안 이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강씨와 목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외암 이간이라는 인물이 명망을 얻으면서 점차 예안 이씨의 집성촌으로 변모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간이라는 인물은 숱한 천거에도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는데, 그만큼 대내외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길러낸 인재들은 호서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많은 과거 급제자를 길러냈다. 가옥을 집주인의 이름이 아니라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등의 관직으로 부르는 독특한 풍습이 전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어떤 집은 가옥 주인의 출신지명을 따서 부르기도 한다. 영암댁, 신창댁 같은 택호가 그렇다.

외암마을은 초입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맑게 흐르는 물길 너머로 물레방아가 있고, 바로 곁에 초가로 지은 정자가 섰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그 예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설화산 아래 산마루의 굴곡을 따라 앉은 마을은 평온함 그 자체다. 늦은 오후면 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풍경. 인적이 드문 평일에 찾아가면 한적한 그 마을의 정경이 그렇게 푸근할 수가 없다.

가을밤 한옥스테이의 즐거움

추석을 즈음해서 여기저기 단풍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의 복판으로 나아가고 있다. 외암마을은 1년 중 언제 가도 좋지만, 그중에서도 가을은 마을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다. 풍요로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머릿속으로 그리게 되는 그 정서가 그대로 남았다. 500년이라는 시간을 한자리에서 버텨온 오래된 마을의 힘이다.

마을로 들어가 정겨운 돌담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걷는다. 외암마을의 특징은 충청도 고유의 격식을 잘 간직한 반가의 고택과 초가의 돌담, 정원이 오롯이 보존돼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어디서도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 잘 여문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가 담장 밖으로 쑥 불거져 나온 풍경도 그렇게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 수가 없다.

  

외암마을의 가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차츰차츰 물들어 오기 시작하는 단풍은 10월 말쯤 최고조를 향해 달리고 11월 초면 바람이 불 때마다 울긋불긋한 이파리가 흩날리는 비처럼 쏟아진다. 지금부터 시간 계획을 짜서 단풍이 한창일 때 이 마을을 찾아가도 좋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동화책의 삽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보여주기 좋으니 꼭 한 번은 가을의 외암마을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 마을 앞 너른 논 가운데 줄지어 선 허수아비가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남는다. ‘농사’라는 단어가 점점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져가는 시대에 허름한 옷을 입고 구멍 난 모자를 쓴 허수아비를 실제로 본다는 건 분명히 쉬이 잊지 못할 경험이다.

외암마을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청하는 거다. 마을에는 민박도 많고 고택에서 즐기는 한옥스테이도 곳곳에서 운영 중이다. 그중에서도 감찰댁은 한옥스테이로 아주 각광받는 고택이다. 운치 있는 한옥에서 보내는 저녁은 각별하다. 푸른 잔디가 아직 성성한 마당에 앉아 머리 위로 총총히 뜬 별을 보며 와인 한 잔을 즐기는 밤은 마음을 한껏 부풀어 오르게 한다. 좀처럼 떨치기 어려웠던 머릿속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느낌이랄까. 푸른 가을하늘이 높이 펼쳐진 아침이면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마을 사이사이로 산책하러 다녀오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다. 아침나절의 흠뻑 들이마시는 신선한 공기는 다디달다.

철종을 위해 빚은 180년 역사의 약주

외암민속마을에서 꼭 맛봐야 하는 것도 있다. 연엽주라 부르는 전통주다. 무려 6대에 걸쳐 180년간 만들고 있는 약주다. 예안 이씨 집안에서 전해오는 연엽주는 조선 철종 대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철종은 지독한 가뭄에 수라상마저 간소하게 줄여 백성의 고통을 나누고자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과도 같은 관직인 비서감승 이원집은 이런 임금의 건강을 염려해 직접 반주를 빚어 술을 진상했는데, 이것이 바로 연엽주다.

사실 이원집은 대단한 음식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궁중음식 120여 가지에 대한 자세한 조리기법과 설명을 <치농>이라는 책으로 엮어낼 만큼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그가 빚은 술의 주조법은 그 이후로 종손에게만 이어져 왔고, 지금도 이씨 가문의 제주로 사용하고 있다. 철저히 집안의 가양주로 전하던 이 술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88년 서울올림픽 때였다. 당시 한국의 전통문화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환으로 몇 남지 않은 전통주를 발굴했고, 당시 발굴한 전통주가 바로 안동소주 그리고 아산의 연엽주였다. 외암마을의 참판댁에서 이 연엽주를 매년 소량씩만 만들어 판매를 하고 있다.

연엽주의 주재료는 멥쌀과 찹쌀, 솔잎과 연잎, 누룩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다. 외암마을은 물이 참 좋은 마을이다. 물이 좋기에 임금에게 진상해도 될 만큼 질 좋은 술을 빚을 수 있었던 것. 연엽주는 덧술을 쓰지 않는 단양주다. 열흘쯤 잘 익히고 난 후에 거름망인 용수를 박아 꼼꼼하게 세 번 걸러 완성한다. 이 술에는 연잎이 들어가 피를 맑게 해 주고 기가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약주로 알려져 있다.

맛을 보면 첫맛은 다소 새큼하다. 살포시 올라오던 신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조청을 연상케 하는 쌀의 단맛이 입안에 감미롭게 퍼진다. 술을 빚는 이득선‧최항규 씨 부부는 필요한 만큼만 술을 빚어 팔고 떨어질 때쯤 다시 빚는다. 마을 밖에서는 팔지 않는다는 것도 이 어른들의 철칙이다. 오직 외암마을 참판댁을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판다. 이마저도 예의를 지키지 않거나 흥정하듯 하는 이에게는 술을 내주지 않는다. 대를 이어 집안의 가양주를 지켜온 종가의 자존심이다.

연의 이파리인 연잎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진정 작용을 한다. 특유의 향이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는 역할도 하여 머리를 맑게 하고 불면증을 해소한다. 연잎에는 루시페린 (luciferin), 레메린 (Roemerine), 비타민 C, 플라보노이드 등의 성분이 있어 항산화 작용을 한다.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세포재생을 도울 뿐 아니라 피부 노화를 억제한다. 또한 피를 맑게 해서 고혈압, 동맥경화, 당뇨 등의 혈관성 질환을 예방하고 혈액순환을 개선해 준다. 이와 더불어 지혈 작용도 연잎의 기능 중 하나다. 코피나 혈변, 산후출혈, 부정출혈, 월경과다 등을 개선하는 데 사용한다. 연잎의 찬 성질은 몸속의 열을 제거하고 이뇨 작용을 통해 체내 독소를 배출하여 다이어트에도 도움을 준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