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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니다 보면 외면받는 여행지가 적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면서 꼭 한 번은 들러봐야 할 가치가 있는 여행지가 많음에도, 우리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홍천의 류인석기념관도 그런 곳 중 하나다.

항일운동의 반석, 의암 류인석

요즘 홍천은 차박 캠핑의 성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차박을 위해 찾는 사람이 많다. 근래 홍천에 이렇게 사람이 몰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남한강 지류를 따라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강변이 너르게 펼쳐져 있으니 그 위에 차를 두고 하루를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그네의 마음에 이해가 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기왕 나온 거 안전하게 놀고 가겠다는 그들을 위해, 혹은 홍천으로 바람 쐬러 나온 김에 닭갈비나 먹고 간다는 여행자들에게 들렀다 가면 좋을 법한 여행지를 소개하려 한다.

수려한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마곡 유원지 근처에 류인석기념관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십중팔구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 들었거나 혹은 지나는 길에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부지가 꽤 크고 잘 정비해 놓은 곳임에도 여기를 아는 이는 드물다. 우연히 발견하고 잠시 들렀다 가는 이조차 많지 않다. 이유는 아마도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가 아닐까. 하지만 때로 여행은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퍼즐 하나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류인석기념관이 그런 곳이다.

의암 류인석이라는 이름은 나에게도 무척 낯설었다. 홍천 취재를 잡고 자료를 찾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이름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커다란 기념관을 만들어 놓을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니겠다 싶었다. 그래서 잠깐 파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찾다 보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1842년 1월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위인전 소개하듯 줄줄이 읊어대는 정보는 다 거두절미하자.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라서 화서 이항로 선생의 제자가 됐다. 화서 선생이 누구냐 하면 조선 후기 유학의 태두라 불렸고 화서학파의 중심이다. 이리저리 휘둘리며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던 조선을 구하고자 위정척사 운동을 벌인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위암 선생도 위정척사를 부르짖으며 조선의 전통을 수호하고자 했다. 그런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자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에 맞서 싸우겠다며 방향을 잡은 셈인데, 그의 외침은 많은 사람이 항일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된다.

13도의 민족을 규합한 최초의 시도

의암 류인석이 일으킨 의병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춘천, 홍천, 제천, 영월, 충주를 따라 일본군에 맞섰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충주성을 점령했을 때는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의 목을 베기도 했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으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고 무기가 열악한 의병이 정규군인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합동 공격을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여러 번 패전을 경험하고 국내에서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결국 연해주 땅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항일 의병을 이끈 의암 류인석의 존재는 연해주와 만주 일대의 피 끓는 청년들에게 큰 동기를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의병부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차후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을 인물들이 탄생한다. 홍범도, 안창호. 모두가 다 아는 그들은 류인석이 남긴 발자취를 따르며 성장한 조선 호랑이였다.

연해주 활동 중에 그는 조선팔도에 동간도, 서간도, 연해주 등 조선인이 살고 있는 13개 지역을 규합해 13도의군을 창설한다. 이때가 1910년이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민족의 역량을 집결하기 위한 이 시도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여건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이때의 이 결과가 훗날 수많은 항일단체가 모여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반석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의암이 일으킨 바람은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여행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런 인물이 왜 대중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는지 의아할 만큼 의암 류인석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홍천군이 배산임수가 완벽한 그 너른 들판을 내어 기념관을 세운 것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기념관 안쪽에는 의암의 묘가 있고, 산 중턱의 자리에서 마냥 평화로운 홍천의 들판을 굽어본다. 곁으로 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고, 아래로 작은 연못이 있고, 입구 한쪽으로 기념관이 섰다.

  

이런 역사문화유적지가 대체로 그렇듯 어렵사리 몇 가지 유물을 모아 구색을 갖추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기념관은 좀 달랐다. 의암 선생의 생애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건 물론, 의병에 관한 기록도 제법 모아 두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항일 의병들의 유품과 무기류다. 약 60여 점에 달하는 유품 중에는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박으로 만든 신표가 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하려고 의병끼리 메시지를 주고받던 표식이다. 원본은 독립기념관에 있고 이것은 복제품이지만, 충분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곁에 진열된 의병의 무기는 또 어떤가. 세상에, 이런 무기로 정규군을 상대했단 말인가 싶다. 그토록 처절하게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이름 없이 스러져 간 백성 하나하나의 눈빛이 흐릿한 사진 속에 남았다. 더 많은 이가 이곳을 찾아 의암 류인석과 의병의 이야기를 되살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아쉽지만, 공간은 참 좋다. 마땅히 홍천 여행길에 들러볼 만한 곳이다.

아, 춘천의 의암호와 의암 류인석은 전혀 관계가 없으니 오해하지 말기를. 춘천의 의암호는 옷바위(衣岩)라는 뜻이다. 의암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동네에 있던 유명한 바위의 이름이다. 류인석의 호 의암은 毅菴이다.

오래도록 맴도는 콩밥과 우렁된장의 맛

홍천 취재를 끝내고 현지 주민에게 갈 만한 식당을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몇 군데를 알려줬는데, 그중 한 곳이 마침 서울양양고속도로 설악IC로 가는 길목이다. 이름은 동막골식당. 처음 상호를 들을 때부터 향토색이 진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싶었다.

남한강변에서 20분 가까이 빠져나오다 보니 길 한쪽으로 식당이 보인다. 역시나 식당 외관은 소박하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것이었는데, 문을 여는 시간이 10시다. 30분쯤 식당 앞에 앉아서 주변 경치를 감상한다. 저 멀리 복사꽃이 발그스레 피었고, 그 앞으로 밭을 가는 이가 터벅터벅 밭고랑을 만든다. 우와, 이 시기에는 어디로 눈을 돌리든 다 한 폭의 그림이다. 은은한 꽃내음이 바람결에 실려 날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따스하게 떨어지는 햇살이 봄을 즐기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들어오세요.” 주인의 한 마디에 가게 문을 열었다. 원래 이곳을 소개한 이는 주꾸미제육과 우렁쌈밥을 추천했는데, 아침이어서 그런지 정작 눈길은 우렁된장으로 향했다. 가격은 7,000원. 식사를 주문하고 직접 반찬을 덜어서 가져온다. 도라지에 깍두기, 콩나물, 멸치고추볶음. 홍천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들이다. 식사가 나왔는데, 콩밥이다. 그러고 보니 콩밥은 정말 오랜만이다. 우렁된장의 냄새도 구수하다. 밥 한 숟갈을 떠서 입에 넣었다. 어라? 콩밥이 이렇게 맛있었던가? 달다. 갓 지은 쌀밥의 단맛과 콩의 구수한 향이 어우러져서 이렇게 달고 맛있을 수가 없다. 우렁된장도 집된장 특유의 감칠맛이 일품이다. 쫄깃하게 씹히는 우렁이는 또 어떻고. 콩밥에 된장국이 이렇게나 황송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순식간에 밥이 사라져서 다시 한 공기를 시켰다. 그것도 금세 사라질 기세.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렁된장에 비벼 먹을 밥을 또 시켜야 한다. 천천히 수저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공기에 밥이 딱 절반 남았을 때 비로소 된장을 퍼 담았다. 두부도 넣고, 채소도 넣고, 우렁은 듬뿍. 두부를 으깨가며 슥슥 비벼서 한 입. 캬, 이 맛이다. 된장국은 이렇게 먹어야 제대로 먹은 느낌이다.

강원도 남자답게 조금은 퉁명스러운 듯이 카드를 받고 계산을 해 주는 사장님께 물었다. “사탕 하나 가져가도 돼요?” “가져가요. 원하는 대로 집어 가. 잘 먹고 가시는데 입가심까지 제대로 하셔야지.” 겉보기와 다르게 사장님이 은근히 푸근하다. 다시 바깥에 앉아 누룽지 사탕을 하나 입에 물었는데 자꾸만 콩밥의 단맛, 된장의 구수함이 자꾸만 입안에 감돈다.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제대로 밥 한 상 먹고 간다.

동의보감에 전라(田螺)라고 등장하는 우렁이에는 성장을 돕는 칼슘과 철분이 풍부하다. 골격 형성을 도와주기 때문에 성장기 어린이에게 좋고 임신부나 여성의 빈혈을 예방한다. 한의학에서 우렁이는 찬 기운을 가진 것으로 분류하며 독성은 없다. 열을 내리고 갈증을 없애주며 간 기능 회복을 돕는 효과도 있어서 숙취 해소에도 도움을 준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