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

진월인, 순우의, 편작의 형은 환자의 안색을 보고 병을 알았다고 한다. 아차산의 전설에서 맹인 점쟁이 홍계관은 상자 속에 임신한 쥐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맞혔다고 한다.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나 공주, 왕자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허구다. 하지만 과장이나 와전은 있더라도 완전한 날조는 아니라면?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과학과 상상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진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본다.
[학력]
서울대학교 학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사/석사

[경력]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 인턴/레지던트 (한방내과 전문의)
국제인증수유상담가
대한모유수유한의학회 교육이사
베이비뉴스 칼럼니스트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

김나희
김나희

신화와 전설이 허공에서 창조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실존했던 상황에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나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그 사실이 무엇이었을지 탐색해 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고 해주시면 더없는 칭찬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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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귀신 들린 임신의 정체는 정자만으로 이루어진 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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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보자. 당신은 임신테스터도 초음파도 없던 시대에 살고 있다. 당신의 월경이 끊기고 입덧이 시작되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는 손꼽아 기다리던 임신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한다. 배가 하도 빠르게 커져서 쌍둥이일 거라는 말도 듣는다. 그런데 월경이 끊긴 지 열 달이 지나가도록 산기가 없고, 이미 남산만 한 배는 점점 더 커진다. 2년이 넘어가고 배는 더 커지고 하혈은 계속하며 당신은 점점 창백해지고 숨이 찬다. 주변에서는 당신의 행실을 문제 삼으며 손가락질한다.


이런 공포스러운 상황을 의미하는 귀태(鬼胎)는 귀신 태아 또는 귀신 들린 임신이라는 의미인데, 그 실체는 포상기태에 가장 가깝다.


7세기에 소원방(巢元方)이 쓴 병리학 서적인 <제병원후론 諸病源候論> 권 24에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 소원방은 ‘요사스러운 도깨비나 귀신의 정자가 내장에 들어가서 임신한 것 같은 형태가 되니 ‘귀태’라 한다. (妖魅鬼精 得入於臟 狀如懷處, 故日鬼胎也)’라고 하여 귀신과 교접한 결과로 보았다. 13세기에 진자명(陳自明)도 <부인양방대전 婦人良方大全>에서 같은 태도를 견지하였고, 16세기에 설기(薛己) 또한 <설씨의안 薛氏醫案>에서 기본적으로 귀신과 교접한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하면서도 체력이 허약한 사람에게 생긴다고 보았다. 17세기에 진사탁(陳士鐸)도 <변증기문 辨證奇聞>에서 귀신과 교접하여 임신한 것으로 단정하였다.


하지만 진사탁과 동시대의 소훈(蕭塤)은 <여과경륜 女科經綸>에서 귀태란 상상임신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장개빈(張介賓)은 <경악전서 景岳全書>에서는 물질적 실체가 없는 귀신이 어떻게 포궁을 침범하여 결과를 형성할 수 있겠냐고 말하며 귀신과의 교접 가설을 부정하였다. 18세기에 염순새(閻純璽)도 <태산심법 胎産心法>에서 귀신과의 교접설을 부정하고 귀태를 상상임신이라고 보았다. 이외에도 의사에 따라 자궁외임신, 기형아 임신, 종양 등을 귀태라고 보기도 했다.


19세기에 부산(傅山)이 지은 <부청주여과 傅青主女科>에는 ‘배가 임신한 것처럼 둥그렇게 튀어나오고 1년이 되어도 출산하지 않으며 심하면 2~3년이 되어도 출산하지 않는데 이것을 귀태라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입덧이 심해 못 먹거나 많이 토하고, 하혈이 있고 피부색이 창백하거나 붉고, 맥이 약하거나 이상하게 크고 긴장되어 있고, 부종이 생기고, 출산하면 아기는 없고 두꺼비알 같은 것이 잔뜩 나온다는 묘사는 포상기태의 실체와 일치한다.


포상기태는 태아 없는 태반에서 작은 낭포가 무한 증식하여 포도알이 잔뜩 들어 있는 모양이라서 葡狀奇胎(포도 모양의 기이한 태반)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반에서 만들어져서 임신테스터에도 쓰이는 hCG라는 호르몬의 농도가 매우 높아지기 때문에 입덧이 매우 심하고, 비정상적인 태반 조직에 혈액이 몰리고 하혈이 지속되므로 피부가 파리하고 맥이 약한 빈혈 증상이 있으며, 혈압과 혈당이 올라가고 부종이 생기는 임신중독증이 동반되어 때로는 피부가 붉고 맥이 크고 긴장되어 있고 몸이 부으며, 출산하면 태아는 보이지 않고 몽글몽글한 낭포만 나온다. 귀태를 제거해야 하므로 활혈거어하는 동시에, 심각하게 소모되는 기혈을 보하는 처방이 제시되었지만, 실제 치험례는 많지 않은 듯하다. 포상기태는 침윤성 종양인 경우도 많아서 수술로 깨끗하게 제거해야 하며 항암요법까지 진행할 수도 있다. 한약도 물론 병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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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정상, (오른쪽) 포상기태


‘귀태’로 진단받은 여성의 입장은 어땠을까. 배가 무섭도록 빠르게 불러오는데 태동도 없고 열 달이 지나도 아기가 나오지 않고 배가 끝없이 커질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심각한 빈혈과 임신중독증으로 일상생활 동작마저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성 멸시의 문화 속에서 이런 이상임신을 남자 의사들은 ‘귀신과 교접한 임신’이라고 단정하였다. 7세기부터 장장 10세기 동안 이런 인식이 지속되었다. 취약한 환자가 보호받고 위로받기는커녕 도리어 모멸스러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서양에서 마녀사냥이 사회를 휩쓸었을 때 마녀로 찍힌 여성이 악마와 교접했다고 몰아간 것을 연상시킨다. 다만, 서양에서는 마녀로 몰린 여성더러 자백하라고 고문을 했지만, 한의학에서는 치료할 수 있는 질환으로 보아 포상기태를 배출하고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처방을 구성하고 적용했으니 조금은 더 문화적일지도.


대체 포상기태의 정체가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체 유전자와 태아 유전자의 경쟁을 이해해야 한다. 태아와 정자 제공자 입장에서는 태아가 자궁에서 충분히 발달하여 가장 생존 확률이 높은 상태로 태어나는 쪽으로 유전자가 최적화되어 있다. 그래서 모체에 무리를 주면서도 혈압과 혈당을 올려 태아에게 투자를 많이 하게 한다. 모체 입장에서는 체력을 안배하여 본인의 생존 및 다음 출산까지도 대비해야 하므로 이번 임신에 에너지를 올인하지 않는 쪽으로 유전자가 최적화되어 있다. 따라서 모체와 입장을 공유하는 딸 태아(XX)보다 자기 몸집을 키우는 쪽으로 기우는 아들 태아(XY)가 큰 경향이 있다. 딸 태아의 평균 체중보다 아들 태아의 평균 체중이 더 크고, 딸 태반의 평균 무게보다 아들 태반의 평균 무게가 더 나간다. 정자 제공자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식과 그 태반을 크게 키울수록 이득이다.


포상기태의 유전자 분석을 한 결과 놀라운 점이 발견되었다. (포상기태는 태아가 없는 완전포상기태와 태아와 공존하는 불완전포상기태로 나뉘는데, 여기서는 완전포상기태만 설명하기로 한다) 포상기태는 난자의 유전체가 소실되고 정자의 유전체가 2배로 된 상태, 또는 잘못하여 정자 2개가 동시에 수정된 상태였던 것이다. 즉 엄마 쪽의 유전자가 사라지고 아빠 쪽의 유전자만 있으면 모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암처럼 무한 증식하는 태반이 생겨난다. 포상기태는 정자 측이 태아와 태반을 키우려는 쪽으로 최적화되어 있다는 수학적 논리의 결정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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