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 삼방촬요 - 전3권 (원제 國譯 三方撮要)
  • 카테고리
    한의학, 한의학/의약학 전공서적
    저자

    효종명찬 (지은이) | 안상우 (옮긴이) | 김남일 (감수)

    출판사
    행림서원
    페이지
    양장본 | 1250쪽 | 257*188mm (B5) | 3125g
    ISBN
    9791195407828
    출판일
    2017-04-20
    링크

“千古의 秘籍, 朝鮮王朝實錄에도 실려 있지 않고 

한국한의학의 마지막 희귀의서. 효종대왕의 北伐論에 웅지를 품고

命撰한 ‘삼방촬요’가 드디어 349년 만에 

한국한의학연구원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본서는 효종대왕이 尤庵 宋時烈에게 명하사 八城 內의 명의를 朝堂에 措置하시고 각자의 경험방을 百千萬言을 강구채집하신 절세의 진본으로서 三方이라 命名하신 것은

1. 處方 2. 鍼灸 3. 單品(鄕藥療法) 및 매 병증마다 병의 근원과 치료법을 논하신 것이다.

이 책을 편성하신 효종대왕은 항상 북벌(북경정복)의 大志를 품으시고 일사 有事時를 당하여 약재들이 수입이 社絶되더라도 침구요법과 단품요법으로 넉넉히 국민위생에 지장이 없을 것을 보장코저 하심이라 한다.

그러나 원고는 旣成되었으나 印行을 보지 못하고 천고의 한을 품으신 그대로 寶天하셨으므로 깊이 창덕궁(秘苑)에 深藏되어 世에서는 아는 바가 드물었는데 궁중 某 要人의 손을 거쳐 구중심처를 나와 某 장서가의 後援으로 本院에서 圖得하게 된 것이다. 가히 千古의 秘籍이요 海內의 孤本이라 하겠다.


“우리나라는 역사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전쟁과 침탈을 겪어왔지만 정묘, 병자년의 胡亂과 여진족에게 당한 굴욕을 빠트리고 지나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송파에 있는 三田渡碑를 일부러 찾아본 일이 있었다. 알다시피 여진족의 침입에 항거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수성전을 펼치던 인조가 스스로 백기를 들고 걸어 나와 무릎을 꿇고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빗돌이다. 비문을 작성하라는 왕명을 받고서, 치욕스런 이 비문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아 일부러 말에서 굴러 떨어져 이 일을 피한 이도 있었다. 결국 이 피치 못할 역할을 맡게 된 李景奭은 세상에 태어나 글을 배운 것을 가장 부끄럽게 여겨 한탄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까닭은 삼전도의 굴욕을 되갚아주고자 중원 공략을 준비했던 효종의 원대한 북벌의 꿈이 담겨진 희귀 의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三方撮要』라는 이름의 의방서로 그간 몇몇 학자들 사이에 그 이름만 거명되었을 뿐 실물이나 그 전모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원래 이 책은 효종의 명으로 조선의 명의들을 총동원하여 편찬한 『三方』에서 요긴한 내용만을 간추려서 재편한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학사에 특별한 의미가 심어진 이 의서를 찾아보고자 백방으로 애썼지만 그 어디에도 쉽사리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여기저기 수소문 해보았지만 그다지 신통한 단서를 찾지 못했었는데, 뜻밖에 기쁜 소식은 가까이서 들려왔다.

우연히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배포된 행림서원의 의서목록에서 이 책을 소개해 놓은 편집자의 글을 찾아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그간 우리가 말로만 전해 듣던 『三方』의 면모와 편찬 추진경위를 간략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전 국내 유일한 전본으로 발굴되어 공개된 행림서원 비장 『三方撮要』는 입수 과정이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궁중 전본을 구해 등사했다고 적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말기에 위의 전본 가운데 1종을 토대로 등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행림서원에 등사전의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본은 등사후 되돌려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전존 여부는 불명이다. 

행림서원의 이태호는 이 책을 등사하여 출판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아마도 장암의 후손가에서 제공받아 출판을 위해 등출하여 재편되었으나 원본 자체를 구입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류희영이 1949년까지 전존했던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으로 보아 한국동란 중에 일실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안상우의 '해제'에서


- 출판사 제공 책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