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 카테고리
    건강정보, 한의학
    저자

    방성혜 (지은이)

    출판사
    시대의창
    페이지
    360쪽 | 548g | 153*224*30mm
    ISBN
    9788959402397
    출판일
    2012-07-25
    링크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낸 조선 의학 드라마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역대 군왕 27명 중에서 12명이 종기를 앓았다. 문종과 성종, 정조는 종기 때문에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고, 이로 인해 역사의 물길이 크게 요동치며 굽이돌았다.

우리가 아는 종기는 고약을 붙이면 쉽게 낫는 피부병인데, 그나마 요즘에는 잘 걸리지도 않는 병인데, 과거의 종기는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었다니, 이것은 과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종기와 같은 병인가?

종기(腫氣)란 어딘가 ‘부어 있는 기’가 보인다는 것이다. 요새 병원에서 쓰는 말로 하면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붓고 열나고 아프고 붉어지는 염증이 생겼다가 곪을 때 이를 종기라고 한다. 종기는 피부에도, 근육과 혈관에도, 뼈와 오장육부에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종기란 요즘 말로 하면 관절에 고름이 가득 차는 관절염도 되고, 뼈가 썩는 골수염도 되고, 또 때로는 오장육부가 썩는 암도 된다.

종기를 치료하려면 때로는 살갗을 가르고 때로는 뼈를 깎아내면서 환부 깊숙이 차 있는 고름을 빼내야 했다. 그래서 종기 치료는 절대 쉽지 않았고 때로는 죽을 수도 있었기에, 선조들은 종기가 생기면 명산대천에 가서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과거에 ‘종기에 걸렸다’는 것은 마치 현대에 ‘암(癌)에 걸렸다’는 것과 같은 정도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의료 역사는 종기와 맞선 처절한 싸움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종기 때문에 임금도 고생하고, 왕비도 고생하고, 신하들도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흔하게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외과의라 할 수 있는 치종의(治腫醫│종기를 다스리는 의사)들은 피침(메스처럼 생긴 넓적한 침), 뜸, 갖가지 약을 무기로 치열하게 싸웠다. 조선 의학은 때로는 승리했고, 때로는 패배했다.

한의학자 방성혜 박사는 한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다 조선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었던 ‘종기’라는 존재를 만났고, 종기와 사투를 벌였던 조선 사람들의 땀내 나는 역사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중심으로, 《부방편람(附方便覽)》《의휘(宜彙)》《주촌신방(舟村新方)》 등 민간 의서와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호산외사(壺山外史)》 등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기록에서 찾아낸, 조선 역사의 의학 드라마를 되살려냈다.


한의학자의 역사 읽기─조선의 임금들은 아팠고, 조선 의학은 치열했다


문종은 병약하지 않았다

조선의 5대 임금 문종은 본래 병약했다는 통념과 달리,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세종 31년) 등에 큰 종기가 나기 전에는 별다른 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없다. 문종은 세자 시절인 스물아홉 살 때부터, 병이 많았던 아버지 세종 임금을 도와 나라 안팎의 일을 직접 처리했고,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사냥 행사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8년 동안 실질적으로 나라를 이끌어왔으나, 다만 세종이 사망하기 넉 달쯤 전 지독한 등창(등에 난 종기)에 걸리고 말았고, 결국 완치하지 못하고는 즉위 2년여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1부 27쪽)


광해군은 재위 기간 내내 병고에 시달렸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올랐고,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계모인 인목대비를 친히 폐서인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 때문인지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화병을 앓았고, 화병은 끈질긴 눈병, 치통, 두통으로 나타났다. 재위 6년, 뺨에 종기가 생긴 뒤로는 임금이 병의 고통을 호소하며 긴급한 정사 외에는 재결을 미루거나, 아예 결재를 올리지 말도록 지시한 기록이 실록 여기저기 보인다. 만약 광해군이 병으로 정사를 놓지 않았다면, 그토록 무력하게 반정을 당했을까? (1부 69쪽)


정조는 종기 때문에 죽었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크고 작은 종기를 자주 앓았는데, 특히 여름에 발열, 오한, 통증 등 그 증상이 심했다. 정조 24년 음력 6월, 푹푹 찌는 무더운 날씨에 정조는 등의 종기에서 피고름을 쏟아내고 있었다. 며칠 동안 대량으로 고름이 쏟아지자, 의관들은 반드시 인삼이 들어간 보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정조는 자신이 인삼을 먹으면 안 되는 체질이라고 반대했지만 결국 사흘에 걸쳐 인삼을 다량 섭취했고, 끝내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하고 만다. 정조를 죽인 것은 종기일까? 인삼일까?

(1부 134쪽)


조선시대 뛰어난 여의사는 대장금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성종 25년 12월 24일, 임금은 이미 늙어 은퇴한 여의를 찾는다. 사망 직전의 위독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났기에, 이미 은퇴했는데도 다시 불러올릴 생각을 했을까? 성종 23년에는 치통과 종기를 잘 고쳤던 제주 출신 의녀 장덕이 죽은 뒤, 그녀의 제자이자 노비인 귀금을 면천해주고, 의녀 두 명으로 하여금 귀금에게 의술을 배우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실력 있는 의사에게 궁궐은 문을 열었다, 여의사에게도. (3부 218쪽)


한국 외과학의 걸출한 선조 임언국

명종 때(1545~1567) 활동한 의사 임언국(任彦國)은 본래 어머니의 종기 때문에 의술에 입문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종기를 앓자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모두 효과가 없었는데, 정읍 내장산 영은사에 머물던 한 노승에게서 전수받은 침법을 시술했더니 어머니의 종기가 나았다. 임언국은 이 침법을 더욱 연마하여 많은 이들을 고쳤다. 하루는 이웃집에 초상이 난 것을 보고 들어가서, 숨을 거두었다는 환자를 자세히 살펴보다 조심스럽게 침을 놓았는데, 죽은 줄 알았던 환자가 다시 깨어났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한양의 조정까지 알려졌고, 조정에서는 역마를 보내 임언국을 불러올렸다. 임언국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처음에는 특별한 관직도 없이 얼마 안 되는 급료와 겨울옷을 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혜민서의 작은 벼슬을 맡아, 여러 환자를 고쳐 의술을 검증받는다. 임언국이 백성들뿐 아니라 사대부와 부인들의 여러 난치병을 치료해내자, 조정에서는 국립 종기 전문 치료센터라 할 수 있는 ‘치종청(治腫廳)’을 설립해 임언국을 치종청의 의학교수로 임명했다.

임언국은 동시대 중국에서도 시행된 적이 없었던 독창적인 침법을 구사했다. 피침으로 환부를 가로 세로 길게, 종기의 뿌리까지 깊숙이 째서 썩은 피를 뽑아내는 십(十) 자형 절개법이었다. 그에 대해 동시대 사람 안위(安瑋, 1491~1563, 조선 전기의 문신)는 ‘조선의 편작(扁鵲│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명의)’이라 할 만하다고 칭송했고, 일본의 의학사가인 미키 사카에(三木榮, 1903~1992)는 서양의 파레(Ambroise Pare)와 견줄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파레는 16세기 프랑스의 의사로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3부 231쪽)


이 책은 크게 4부로 이루어진다.

1부 ‘구중궁궐 왕실의 종기 스캔들’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담긴 조선 왕실의 종기 투병기다. 누가 왜 어떻게 종기를 앓았는지, 그 역사적 파장은 어떠했는지 풀어놓았다. 그리고 기록된 증상과 병의 진행 과정을 바탕으로,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병명과 병의 원인을 추론해보았다.

예를 들어 숙종은 장 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인현 왕후와 사별하기(숙종 27년) 전후인 재위 26~32년에, 때때로 갑작스레 명치를 엄습하는 통증에 시달렸다. 실록에 기록된 ‘숨이 막힐 듯한 통증’ ‘가슴과 배 사이를 끌어당기는 듯한 아픈 증세’는 담석(쓸갯돌)이 담도(쓸갯길)를 막아서 생기는 담도산통의 특징이다. 그런데 숙종은 간에도 문제가 있었다. 숙종은 재위 35년부터 38년까지 집중적으로 식욕 부진 증세를 보인다.


“종기 자리가 곪아 터지므로 달포나 지나도록 수라를 들기 싫던 끝에…….”(숙종 35년 12월 10일)

“수라를 들지 못하는 임금의 환후가 오히려 나아짐이 없고 오한, 신열의 증세가 때로 다시 일어나는데…….”(숙종 36년 1월 15일)

“수라를 싫어하고 꺼림이 올여름과 같은 적이 없었으며, 어제와 오늘은 겸하여 메스꺼움과 설사의 증후가 있어 침수도 편안하지 못하다.”(숙종 37년 6월 5일)

“어제저녁부터 기운이 몹시 평온치 못하여 처음에는 추웠다 더웠다 하는 학질 기운 같았는데, 입맛이 없어 수라를 들기 싫어하고, 현기증이 어제에 비해 더했다.”(숙종 37년 12월 3일)

“임금께서 입맛이 떨어져 수라를 들기 싫어하는 증세가 있으므로…….”(숙종 38년 10월 24일)


실록에 기록된 식욕 부진, 오한, 발열, 메슥거림, 설사, 뱃속이 편치 않은 증상을 미루어 보았을 때 숙종은 간농양(세균이나 기생충이 간에서 증식해 고름이 고인 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 담석으로 담관이 막히면 담즙(쓸개즙)이 흐르지 못하고 여기서 세균이 증식해 곪으면 간농양으로 이어진다. 간농양을 한의학에서는 간옹(肝癰)이라 한다. 곧 간에 생긴 화농성 종기라는 뜻이다.

숙종은 엉덩이, 항문 주위, 서혜부에도 종기를 앓았는데, 이것도 숙종의 간에 쌓인 문제가 대장의 끝인 항문에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간이 병들면 대장을 치료하여 잘 통하게 하고 대장이 병들었을 때에는 간을 치료하여 고르게 하라”고 했다. 간의 경락은 발가락에서 시작하여 다리 안쪽을 타고 흐르다 생식기와 서혜부를 거쳐 복부로 올라가 간까지 연결된다. 곧 간과 생식기와 서혜부는 경락으로 이어져 있다.

2부 ‘조선 의학이 종기와 싸워 승리한 순간’은 종기 치료 성공담이다. 실제로 왕실의 인물들이 종기를 앓았을 때 누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치료했는지, 그리고 치료 도구로 쓰인 약들에 어떤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다. 일부 의서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민간의 치료 사례도 알아보았다.

3부 ‘치열하게 살다 간 이 땅의 종기 전문의’는 살이 썩고 뼈가 썩으며 오장육부가 썩는 종기를 치료하고자 치열하게 살다 간 이 땅의 의사들 이야기다. 어떤 이는 궁궐 안에서, 또 어떤 이는 궁궐 밖의 백성들 사이에서 종기와 싸움을 벌였다. 그들의 치열했던 삶이 더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4부 ‘조선 의학이 종기와 싸운 방법’에서는 조선의 치종의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종기를 치료할 수 있었는지 짚어보았다. 종기와 싸우려면 약도 필요하고 침도 필요하다. 뜸도 필요하고 적절한 타이밍도 필요하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전통 의학에 관한 기본 지식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