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

양치류 식물과 사랑에 빠지다

신경과학자 올리버 색스가 멕시코 오악사카로 떠났다. 과달루페의 기적을 신경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식물, 그중에서도 ‘양치류 식물’을 관찰하러 다녀왔다.

어린 시절부터 양치류에 매혹되었다는 올리버 색스는 평일에는 권위 있는 신경과 의사로 환자들을 만나고 주말에는 미국양치류협회의 아마추어 동호인으로 활동한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은 미국양치류협회의 동료들과 함께 떠난 양치류 탐사여행 일기를 엮은 것이다. 열흘 동안 이들은 계곡을 오르고 개울을 뛰어넘고 나무를 타며 오악사카에 살고 있는 700여 종의 양치류 중 4분의 1 이상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쯤 되면 그저 가볍게 즐기는 취미는 아닌 것 같다.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는 그의 별명에 양치류 마니아 혹은 아마추어 식물학자라는 새 별명을 덧붙여야 할 법하다.


원시성과 생명력 그리고 양치류의 미학

양치류는 가장 용감하고 강인하며 오래된 고등식물이다. 3억 5000만 년 전 뭍으로 올라온 최초의 용감한 식물이 양치류로 진화했다. 이들은 단단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해 곧 지구를 뒤덮었고, 양치류 숲이 화석으로 남아 석탄이 되었다. 현재는 지구상에 1만여 종의 양치류가 있으며, 한국에는 2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소년 올리버 색스를 매혹한 것이 바로 양치류의 이런 원시성, 생명력, 적응력이었다.


양치류는 이렇다 할 변화 없이 10억 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살아남았다. 공룡 같은 다른 생물들은 지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겉으로는 아주 연약해 보이는 양치류는 지금까지 지구가 겪은 모든 멸종 사건과 그 밖의 흥망성쇠를 이기고 살아남았다. 선사시대라는 세계에 대한 감각, 엄청나게 먼 과거까지 이어지는 시간감각을 가장 먼저 자극한 것이 바로 양치류와 양치류 화석이었다. _23쪽


양치류 세계의 팜므파탈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양치류인 고사리. 고사리에 들어 있는 타미나아제는 동물에게는 신경학적인 불안과 경련 그리고 발작을 일으키고, 엑디손이라는 호르몬은 곤충에게는 이상 탈피를 촉진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비밀스럽고 마법 같은 양치류의 성생활

양치류의 씨앗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옛 유럽인들은 그 ‘보이지 않는 씨앗’을 지니면 몸이 투명해지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믿었다. 양치류 포자체의 은밀하고도 왕성한 성생활을 관찰하는 것은 탐사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인류를 기아에서 구할 물개구리밥

질산염과 구아노마저 고갈된 지구에는 더이상 천연비료가 충분치 않다. 맬서스가 경고한 굶주림을 면하려면 흙 속에 질소가 더 필요하다! 자그마한 수생 양치식물, 물개구리밥 아졸라Azola가 질소고정으로 지상의 생명들을 지탱한다.


투명한 레이스 히메노필룸

두께가 겨우 세포 하나 정도여서 100퍼센트에 가까운 습도가 유지되는 강우림에서만 자랄 수 있는 히메노필룸. 무한히 섬세하며 사랑스러운 투명한 레이스 같은 처녀이끼과의 양치류다.


건생 양치류, 사막의 태양 아래 살아남다

선인장만큼이나 사막의 태양을 즐기는 양치류도 있다. 양치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강인한 건생 양치류들!


아마추어 마니아의 순수한 열정

2012년 말, 아마추어 마니아들이 ‘큰일’을 냈다. 동호인 6,000여 명이 모인 ‘야사모(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찍은 사진을 모아 한국 야생화 도록(≪꽃 피던 날의 연서≫)을 펴낸 것이다. 대상에 대한 순전한 애정으로 모여 집단지성을 이뤄낸 사례다.

아마추어들의 순수한 열정이 취미를 넘어 과학 발전에 이바지하는 일은 근대에는 드물지 않은 것이었다. 진화론의 단초를 정립한 앨프리드 월리스, 곤충의 변태 과정을 발견한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근대 지질학을 창시한 제임스 허턴. 어느 기관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 연구했으며 개인적인 열의로 탐험에 나섰다는 점에서 이들은 ‘아마추어’이자 ‘마니아’였다. ‘경계와 장벽을 가로질러 애정과 관심에 추동되어 탐구하는’ 아마추어리즘은 근대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불러왔다.

이 책은 현대의 아마추어 마니아들에 대한 올리버 색스의 애정 어린 스케치이기도 하다. 오악사카 탐사 여행 모임의 동료들이 풀어놓는 여러 분야의 지식은 양치류 분류학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경쟁심 없이 진지하게 열정을 공유하는 모임에서 세계에 대한 서로의 이해도 넓어진다. 탐사에서 새로운 종을 발견해 동료의 이름을 학명으로 붙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여행이다.


식사 분위기는 아주 편안하고 달콤하다. 이제 함께 지낸 지 아흐레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동안 힘들게 돌아다니며 작은 계곡을 오르고 개울을 뛰어넘어 오악사카에 살고 있는 700여 종의 양치류 중 4분의 1을 보았다. 내일이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나 시애틀이나 애틀랜타나 뉴욕의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가의 이 커다란 낙엽송 밑에 앉아 살아 있음을 기뻐하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_206쪽


- 출판사 제공 책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