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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죽음들 -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과학수사에 남긴 흔적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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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테고리
- 건강정보
- 저자
브루스 골드파브 (지은이), 강동혁 (옮긴이)
- 출판사
- 알에이치코리아(RHK)
- 페이지
- 408쪽 | 145*215mm | 530g
- ISBN
- 9788925577579
- 출판일
- 2022-09-19
- 링크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과학수사관은 장갑을 끼고 핀셋으로 증거물을 수집하고,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지 모를 지문을 채취한다. 법의학자는 죽은 자의 몸에 남겨진 죽음의 흔적을 하나씩 살핀다. 과학수사를 빼놓고는 오늘날 살인사건 수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중심에는 법의학이 있다.
이 책은 미국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 (Frances Glessner Lee, 1878~1962)의 삶을 통해 법의학이라는 학문이 시작된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여자가 대학에 가는 일이 흔치 않았던 시절, 당시 검시관이었던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의 한마디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학 학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프랜시스를 법의학으로 이끌었다. 부패한 코로너 제도를 검시관 제도로 바꾸고, 대학에 법의학과를 개설해 전문가를 배출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프랜시스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그 첫걸음은 하버드 의대에 법의학과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랜시스는 학과를 이끌 교수진을 구성하고 매그래스 도서관을 만드는 등 하버드대에 경제적·물리적·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법의학은 법학, 의학, 경찰 세 분야가 모두 탄탄해야 한다고 생각해 경찰을 위한 살인사건 세미나를 여는 등 어느 하나 프랜시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프랜시스의 노력이 모두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실제 하버드대에 법의학과가 생겼고 살인사건 수사에 대한 경찰들의 인식 개선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남아 있는 프랜시스의 기록처럼 ‘그 삶은 외롭고 겁나는’ 것이었고, 학위가 없다는 것과 여자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일련의 시련에도 법의학을 향한 프랜시스의 지성, 강인함, 재력, 영향력은 살아남아 현대 법의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프랜시스가 남긴 업적 중 이 책에서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살인사건 현장을 미니어처로 만든 디오라마다. 살인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이 디오라마는 주로 경찰 살인사건 세미나에 활용됨으로써 과학수사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18개의 디오라마 중 6개의 사진과 함께 프랜시스의 생전 모습이 책에 함께 실려 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볼 수 있을 만큼 간단명료한 진실만을 찾아야 한다.
폭력과 죽음이 깃든 디오라마, 과학수사의 얼굴을 바꾸다
법의학을 생각했을 때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이름을 떠올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프랜시스의 경찰 살인사건 세미나와 디오라마는 ‘살인과 인형의 집’이라는 특집기사를 내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언론에서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의 사교계 여성, 돈 많은 페미니스트, 무시무시한 인형의 집을 만든 노부인…… 프랜시스는 그 배후에 있는 돈 많은 여성 정도로만 축소되어 보도되었다. 이는 프랜시스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프랜시스는 자신의 이름이 법의학에 앞서 언급되기를 원치 않았고, 이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프랜시스가 세상을 떠나고 50년도 더 지난 뒤,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 작업을 완성한 이는 메릴랜드주 수석검시관실 공공정보원으로, 디오라마 관리인이자 프랜시스의 전기 작가인 이 책의 저자 브루스 골드파브다. 골드파브는 디오라마와 관련된 그림, 미술품, 서류들을 모았고 70년 된 이 디오라마의 보존 작업을 위해 전문가들과 함께 모든 작업 과정에 참여했다. 마침내 ‘의문사에 관한 손바닥 연구’라 불리는 이 디오라마들은 2017년 말에서 2018년 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그녀의 취미는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공개 전시되었다.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의 손에서 디오라마는 이에 걸맞은 대접을 받았고, 이 책을 통해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이름도 재조명되었다.
의문사를 다루는 방식: 코로너 제도와 검시관 제도
법의학 분야에서 프랜시스가 이룩한 개척자로서의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지난 수백 년간 죽음, 특히 의문사를 어떻게 다루어왔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1944년 미국에서 일어난 약 28만 3,000건의 의문사 중 1~2퍼센트 정도가 자격을 갖춘 검시관의 조사를 받았다. 당시 보스턴, 뉴욕, 볼티모어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코로너 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코로너 제도는 중세 영국에서의 매장물 조사관 제도로, 코로너의 임무에는 세금 등 왕실이 받아야 할 돈을 받는 것을 포함해 갑작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일까지 포함돼 있었다. 코로너는 사망 원인과 사망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밝혀야 했는데, 사실 의학도 법학도 알 필요가 없었고 대부분 글도 모르는 농부였다. 이들은 배심원과 함께 조사와 재판이 뒤섞인 사인 심문을 했는데, 시신을 보고 목격자 진술을 들은 뒤 투표로 평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전문지식도, 과학적인 증거도 없이 모든 것이 그들의 판결로 결정되었다.
코로너 제도의 결함은 도시 지역의 인구가 팽창하면서 두드러졌다. 범죄는 증가했고 죽음에 대한 수사는 점점 어려워졌다. 코로너 제도는 부패하고 무능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코로너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위기감이 절정에 달한 사건은 시카고에서 일어났다. 신생아의 시신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고 이후 네 번이나 다른 관할 구역에 다시 버려졌다. 사인 심문 배심원은 각자 2달러를, 코로너는 10달러를 벌었다.
바로 이 세상이 프랜시스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반면 검시관 제도를 도입하면 특수 훈련을 받은 유능한 의사가 사인을 판단하고 형법적 측면은 경찰, 검찰, 법원이 수행한다. 미국 법의학을 중세에서 빼내 코로너를 검시관으로 대체하고 의문사에 대한 조사를 현대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랜시스의 목표였다.
아주 작은 죽음들: 의문사에 관한 손바닥 연구
법의학과를 세우는 일 못지않게 경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프랜시스는 알았다. 사망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은 대개 경찰이었다. 최초 몇 분은 수사를 성립시킬 수도,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 범죄 현장을 훼손하지 않는 훈련이 경찰에게 필요했다. 직접 현장에 교육생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프랜시스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 손재주가 있었던 프랜시스는 시카고 교향악단을 보러 가는 것을 좋아했던 어머니를 위해 선물로 교향악단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담긴 미니어처를 만드는 야심 찬 일을 했다. 플론잘리 사중주단 미니어처도 만들었다. 이처럼 1 대 12의 정확한 축적으로 범죄 현장의 모습과 시신을 그대로 배치한 모형을 만들면 어떨까? 프랜시스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해 목수인 랠프 모셔에게 가장 작고 정교한 재료들을 구하게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오래된 목재를 찾아다녔고, 낡은 소파 천을 구해 미니어처 조각을 만들었다. 프랜시스는 아주 작은 세부 사항을 즐겼다. 가구는 대부분 실제로 작동했고 책은 펼치면 글자가 인쇄돼 있었다. 인형들은 속옷은 물론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었다. 벽에 튄 피와 피 웅덩이를 위해 빨간색 매니큐어를 발랐다. 액사, 총격, 자살, 둔기에 의한 사망 등 경찰 교육생들은 각 디오라마에서 사건 현장에 대한 증거를 찾아야 했다. 경찰관을 위한 최초의 살인사건 세미나는 1945년 일주일에 걸쳐 열렸다. 경찰관들은 각자 연구할 디오라마를 두세 개씩 배정받았고 이들에게는 디오라마를 관찰할 시간이 90분씩 주어졌다. 각자 교실 앞으로 나와 결과를 발표하고 토의가 이루어진 다음, 각 모형의 요점이 공개되는 식으로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프랜시스는 정찬을 열어 이들을 최고로 대접했고, 하버드 경찰과학협회를 만들어 경찰들이 서로 교류하며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을 프랜시스 혼자 힘으로는 다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모리츠, 매그래스 등의 노력과 도움이 결국 법의학이라는 큰 세계를 이룩하는 데 공헌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짓이라 했고 누군가는 죽은 자를 위한 일이라는 걸 언짢아했다. 프랜시스는 이들을 설득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받쳐주고, 맨 앞에서 법의학의 중요성을 외치는 개척자였다. 또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일이 프랜시스의 나이 50세가 훌쩍 넘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의 말처럼, 모든 시작에는 누군가의 열렬한 헌신이 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기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하는 추진력, 다른 이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개인의 경제적‧물리적 자원을 아끼지 않는 희생,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오직 법의학의 발전만을 생각하는 정신. 프랜시스의 헌신이 없었다면 밝혀지지 못한 죽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숫자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