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해의 철학 -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생산력이 아니라 분해력을 드높이자

가장 위험한 세계는 아무것도 썩지 않는 세계

생산과 성장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던 분해의 세계를 만나다


악취가 나고 형체가 흐물흐물해지는 부패에 대해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음식물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부패는 당연히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 사회에서 부패는 언제나 그늘 속의 존재다. 그러나 부패 없이 세상이 돌아갈 수 있을까? 예컨대 발효란 부패의 일종이며, 어쩌다가 인간에게 유용하게 된 부패 현상을 ‘발효’라 부르는 데 불과하다. 또한 썩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인해 해양 쓰레기는 쌓여만 가고, 자연적 분해 능력을 넘어선 온실가스에 의해 기후 위기는 눈앞에 닥쳐왔다. 부패와 분해를 고려하지 않는 근대적 생산과 성장의 관점으로는 이 위기를 풀어낼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책은 농업사학자 후지하라 다쓰시(藤原辰史)가 생태학 개념인 ‘분해’를 주제어로 삼아 철학, 생물학, 인류학, 문학 등 학문의 틀을 뛰어넘어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분해 현상에 새롭게 빛을 비춘 책이다. ‘분해’는 자연 세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낙엽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식물에게 양분을 제공하듯, 망가진 자동차는 폐차장에서 분해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만일 그런 분해 과정이 없다면, 폐차는 부패하지 않은 채 쓰레기로 지상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말 것이다.


이렇듯 생산과 소비의 닫힌 순환에서 벗어나 ‘분해’의 관점으로 눈을 돌리면, 쓰레기를 수집하거나 부서진 물건을 고치는 노동이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얼마나 필수적인지 깨닫게 된다. 나아가 우리 자신도 자연 속에서 분해자의 역할을 해야 하며, 지금까지 그 역할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기후 위기를 초래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활성화해야 할 것은 생산력이 아니라 ‘부패력’이라고 말한다. 가장 위험한 세계는 아무것도 썩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독창적 논지로 일본 최고의 학술상인 제41회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왜 분해의 철학인가 - 폐지 줍기에서 소똥구리까지


분해 활동은 자연계의 물질 순환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기능한다. 넝마주이부터 소나 말의 사체 처리, 쓰레기 수거 등에 이르기까지 소재를 재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존재인 분해자는 그간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온 역사적 경위로 인해 경시당하고 있을 뿐이다. 가축의 분뇨를 토양에 돌려주는 농업 종사자도, 낡은 가구나 가전제품 등을 파는 재활용품 판매업자도 모두 중요한 분해 작용을 수행하고 있다.


‘분해의 철학’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역사가 일직선으로 발전해 왔다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관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근대화는 부패와 발효로 이루어진 분해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진보 혹은 발전이라고 암묵적으로 간주해왔으나, 실제로 그것은 인간 사회가 지구에서 일어나는 분해 생태계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탈로 인해 분해 생태계의 작동 원리를 간과함으로써 현재의 기후 위기와 환경 위기를 불러온 셈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급격히 단순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의 닫힌 세계관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분해 개념은 유효성을 갖는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