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좋은 대학원을 만든 대학원생 노동자들의 노력

[기고] 좋은 대학원을 만든 대학원생 노동자들의 노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와 생물학연구정보센터(브릭)을 포함해 6개 전문연구정보센터가 30일 발표한 ‘이공계 대학원생 처우 개선을 위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대학원생의 슬픈 자화상이 드러난다. 대학원생 중 62%가 하루 평균 근무시간이 10시간이 넘고 29%는 공식적인 휴가를 쓰지 못하고 있다.  대학원생 40%는 연구 외 다른 업무량이 많다고 한다. 이러면서도 과제와 조교활동을 통해 받는 월급여는 100만~125만 원이 전부다. 연구윤리에 어긋나는 부당한 지시를 받는 경우도 다반사라는 증언도 나왔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한국 대학원생들은 대안으로 유학을 택하곤 한다. 실제로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대학원생의 20%가 만에 하나 입학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유학을 떠나겠다고 답했다. 유능한 연구자들과 연구시설이 많다는 사실 외에도 연구 부정과 부조리가 적고, 특히 지원금을 받는 경우 조교 업무를 통해 생계를 해결할 수 있어 유학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은 단순히 유능한 제도를 만든 한 두명의 설계자 덕분에 조성된 것일까. 지난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북미지역 대학원생노동조합연합(CGEU)의 연례회의에 참석하며 외국의 대학원생이 누리는 권리의 배경이 대학원생들의 연대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오랜 노력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대학원생 노동조합이다.

 

한국에서는 대학원생노동조합이 생소한 개념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대만, 호주, 터키 등은 대학원생노조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활동이 가장 활발한 나라가 공교롭게도 과학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미국과 캐나다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은 대학원생 노조원 규모가 10만 명을 넘긴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캐나다도 대다수 대학에서 대학원생노조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대학원생노조들은 1992년부터 CGEU를 구성해 더욱 힘을 모으고 있다. 설립 첫해 이후 매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콘퍼런스를 열고 노조 운동에 관해 토론하고 연대를 확인한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이번 콘퍼런스에는 한국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도 함께 했다. 올해 콘퍼런스는 3박 4일간 14가지 토론주제를 놓고 40여 대학 110여 명이 만나 교류했다.

 

노조 설립을 준비하는 이들과 대학에서 일하는 학부생 조합원들도 참여했다. 여러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업과 행진, 연좌농성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기본적인 조직화부터 임금, 건강보험 등 혜택, 학내 성폭력, 인종차별, 유학생 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노조의 활동 등에 대해 다양한 토론이 오갔다.

 

필자와 함께 이번 학기부터 미국에 유학 중인 김선우 조합원이 참가해 전 세계 대학원생노조의 현황과 전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는 CGEU와 한국 대학원생노조 간의 국제적인 연대와 지속적인 교류를 약속하는 공식 결의안도 채택됐다.

 

이번 행사에서 들었던 미국과 캐나다 대학원생노조의 성과는 놀라웠다. 조교로 근무하면 대학원 등록금을 면제받고 생계를 해결할 만한 임금을 받는다. 가족까지 적용되는 건강보험도 들어준다. 임금 대신 생활비를 보조하는 개념인 ‘스타이펜드’를 받는 곳도 많다. 이러한 혜택에 힘입어 미국 대학원생 교육 조교의 학비면제를 포함한 실수령액은 3만 5000달러(약 4100만 원) 정도다. 미국 정교수 평균 연봉의 3분의 1 수준이다.

 

안경을 맞추기 위해 지급되는 보조금과 척추교정을 위한 마사지 등 생활에 밀접한 복지혜택도 노조가 얻어낸 혜택이다. 오랜 시간 앉아 모니터와 서류를 쳐다봐야 하는 연구 업무의 특성에 따른 시력감퇴와 척추질환을 업무에 따른 질환으로 인정받았다. 실험실 보험이 충분한 보장을 제공하는지를 묻는 설문에 27%만이 충분하다고 답하는 등 안전 상해 보장도 받지 못하며 개인 복지혜택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과 크게 대비된다.

 

업무범위 조정, 추가근로수당, 성폭력이나 인권침해 같은 부조리 문제 등이 담긴 단체협약을 위반하면 학교에서 시정 조치를 해주는 공식적인 탄원절차도 있다. 수행되지 않으면 법적 조정도 가능하다. 이것도 한국과 대조적이다. 한국의 대학원생은 호소할 곳이 없다. 학내 부조리를 해결할 절차나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른다는 응답은 48%, 없다는 응답은 34%에 달했다.

 

하지만 그들이 최대 성과로 꼽는 건 따로 있다. 1969년 설립되며 미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학원생노조로 꼽히는 위스콘신매디슨대 교육조교노조의 조합원 롭 팀버레이크는 자신들의 가장 큰 성과를 소개해 달라는 말에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대학에서 조교로 20시간 이하의 일을 하면 대학 등록금을 면제받고, 최저생계를 해결할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꼽았다.

 

성과의 배경엔 조합원의 참여가 있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미국은 학교에 조교의 수가 많다. 한 학교에 2000~3000명 정도의 조합원이 있는데, 노조가 있는 학교엔 이들 중 대다수가 노조에 가입해 있다. 탄원이 발생하면 조합원들이 탄원인과 함께 면담에 참여해 문제해결을 도와준다. 교섭과정에선 집회와 행진, 파업까지 불사한다.

 

이만한 숫자를 모은 비결을 요약하면 ‘일대일 대화’와 ‘연구실 방문’, ‘민주적 원칙’이라고 한다. ‘노동조합은 당사자인 우리가 참여한 만큼 싸울 수 있다’, ‘대학이 운영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하기 때문이므로 우리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조합원들과 나누고 새로운 조합원이 주변 사람들을 참여시킨다. 이것이 확대되어 지금의 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인 힘으로 대학원생의 문제를 해결해온 역사가 쌓여서 좋은 대학원이 만들어졌다. 노동조합은 어렵지만 성공할 수 있는 길이었다.

 

미국의 대학원생노조의 성과와 힘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도적 차이는 있으나 한국도 대학원생의 노동 없이 대학원이 운영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대학에서 수행하는 수조 원의 연구과제 실무는 대학원생들이 수행한다. 행정노동과 교육보조, 연구보조 업무도 마찬가지다. 연구과제 대다수는 세금으로 이뤄지는 정부 과제다. 하지만 급여와 대우는 학과와 연구실마다 천차만별이다.

 

한국은 연구원의 급여 일부를 빼돌려 연구실 운영비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과제 참여율 조정이 임의로 이뤄지며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노조가 정착된 캐나다는 다르다. 참여율 개념이 없고 학위과정에 따른 최저 스타이펜드를 바로 대학과 협상한다. 성과급은 별도로 책정한다. CGEU에서 만난 이들은 “대학원생의 급여에서 일부를 빼돌려서 연구실을 운영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북미 대학원생노조의 뿌리는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미국의 시민권 운동을 발판삼아 학내 인종주의와 성차별, 권위주의에 맞서는 운동에 참여하던 대학원들을 주축으로 발생했다. 한국 대학원생총학생회 대부분이 1987년 정권에 맞서 진행된 87년 민주항쟁의 산물인 것과 유사하다. 미국은 첫 대학원생노조가 생긴지 올해가 5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의 전국대학원생노조가 2017년 12월 설립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역사다.

 

대학원생노조 운동의 선진국이라 할 만한 미국도 대학원생의 '노동자' 지위 인정을 놓고 논란이 많다. 그래서 노조는 여전히 투쟁중이다. 미국 보수적인 주에서는 주 법원이 노조를 결성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곳도 있다. 하지만 점차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추세다. 미주리대 대학원생노조가 올해 주 대법원 판결을 승소하며 노동조합 권리를 얻어낸 것이 대표적 예다. 2015년 미주리대가 대학원생에게 지급되던 건강보험 보조금을 갑자기 중단하자 대학원생들은 집회와 행진을 조직해 이 결정을 막았다. 이때 집단행동을 통해 오히려 스타이펜드를 1만2000달러에서 1만8000달러로 높였다. 이 경험에 힘입어 미주리대는 2016년 노조를 결성했다. 하지만 대학은 승인을 거부했다고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결국엔 대법원이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을 부정한 미주리대의 상고를 기각하며 노조 결성이 최종 승인됐다.

 

북미 지역 노조의 대부분은 공립대다. 하지만 최근 사립대에서도 노조 결성 움직임이 활발하다. 컬럼비아대, 하버드대, 시카고대 등이 대표적이다. 컬럼비아대 대학원생은 노조 결성을 위해 시민사회와 지역 정치인의 지지를 끌어내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교수와의 중재도 주목할 만하다. 교수들이 ‘노조 결성 문제는 대학원생 당사자의 권리로 교수들은 중립’이라는 선언을 하게 만들어 갈등을 봉합했다. 사립대 연합은 미국 국가노동관계위원회에 사립대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라는 탄원을 집중적으로 넣어 2016년에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노동관계위원회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정부 들어 이를 다시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미국 사회가 어떤 대응에 나설지를 보는 것도 한국 대학원생노조에 있어 주목할 만한 요소다.

 

이번 콘퍼런스를 통해 얻은 교훈은 ‘좋은 제도는 민주적 권력이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대학원생노동조합은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 대학원생노조에 응원을 아끼지 않은 월터 럭큰 미국 웨인주립대 대학원생노조 부위원장의 말을 전한다.

 

“지금의 노동자들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든 시민이든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면 일터에서 민주적인 대표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을 고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길 수는 없겠지만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동아사이언스 강태경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수석부지부장

http://dongascience.donga.com/news/view/32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