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화 노트

올해, 38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85년 대전대학교에서 시작하여 88년 모교 경희대학교에 돌아왔고, 2014년에는 단국대학교로 옮겼습니다. 그 사이에 대만 2회, 중국 1회, 미국 3회에 걸쳐 모두 6차례 교환 교수 활동을 하였고, WHO에서 5년,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3년을 대학 밖에서 지냈습니다.

한의학의 세계화라는 비전 아래, 제가 한의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주도했던 경험이 저에게는 큰 영광이자 보람으로 남습니다. 특히 5년간의 WHO 활동이 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의학을 위해서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러나 해내야만 했던 과업들을 완수하였습니다. 반대와 방해가 엄청났었지만 그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한의학의 큰 물줄기를 이끌었습니다. 후에 ICD-11 26장으로 진화한 전통의학 국제 표준 용어의 제정, 수백 년 이상 각 나라마다 달리 썼던 침구 경혈 위치의 통일과 국제 표준 제정, 일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CPG 가이드라인의 개발 등이 그것들입니다. 국내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Nature와 같은 저널이나 논문에 소개되었고 전 세계의 교과서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들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제는 후학들이 이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학력]
198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1987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 박사학위 수여
1989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과정 수료

[경력]
2021-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2020-현재 국제동양의학회 (ISOM) 회장
2020-현재 미국 Emory의대 겸임교수
2008-현재 대만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
2014-2016 단국대학교 부총장
2003-2008 WHO 서태평양지역 전통의학 자문관
2011-2014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2008-201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2018-2019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2009-2011 세계전통의학대학협의회 (GUNTM) 창립인·회장

[상훈]
2014.10 세계 표준의 날 ‘勤政褒章’ 수상
2015.12 경희한의대 동문회 ‘자랑스러운 慶熙韓醫人賞’ 수상
2022.02. ‘綠條勤政勳章’ 수상

[저서]
Koonja Press, Pajoo, 2021
<韓醫學原論> 군자출판사, 파주, 2020
<內經病理學> 통나무, 서울, 1993, 1995(2판), 1999(3판), 2001(중국어판, 중의고적, 북경)
외 10권 및 180여 편의 논문

최승훈
최승훈

한의학 세계화의 아이콘. 대전대, 경희대, 단국대에서 38년간 교수로 재직, 대만 중국의약대학과 국가과학위원회, 중국 국가중의약관리국, Stanford 의대, Emory 의대 교환교수, WHO/WPRO 전통의학 책임자,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동양의학회 회장, Emory 의대 겸임교수와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로 Boston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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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대만 중국의약대학 대학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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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경희대에서 병리학 강의를 시작하고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김완희 학장님께서 “아무래도 최 교수가 내년에 대만으로 교환교수 가야겠어.”라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교칙에는 교수가 신규 임용된 후 적어도 3년이 지나야 비로소 외국에서의 장기 체류가 가능한 것으로 규정한다. 임용된 지 일 년도 안 되어 교환교수나 방문교수 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사정을 들어보니, 대만의 중국의약학원(中國醫藥學院, 후에 중국의약대학 China Medical University로 개명)에서 박사과정을 처음으로 개설하고 외국인 교수를 초빙하여 강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매 대학인 경희대에 요청하였고, 대만에서 한 학기 동안 영어로 강의할 수 있는 교수를 고르다 보니 가장 신임인 나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다. 한의학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영어 능력이 우선 선발 조건이었다. 영어가 또다시 나에게 기회를 준 셈이다.


당시까지 국내 한의계에는 해외 교환교수 사례가 없었다. 그래서 교환교수가 무엇인지, 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다행히 고려대학원 철학과 지도교수이신 김충렬 교수님은 대만에서 유학하셨고 또 오랫동안 체류하셨기 때문에 기본적인 정보는 들을 수 있었다. 대만행을 준비하기 위해서 겨울방학 동안 북경대 출신 유학생으로부터 중국어 교습을 받았다. 그러나 김 교수님은 “그런 거 별로 도움이 안 되니까 가서 배우도록 하라.”고 하셨다.


대만은 나에게 첫 외국이다. 1989년 3월 8일 정오 무렵 타오위안(桃園)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그 대학의 교수 대표, 교직원 대표, 학생 대표가 꽃다발을 들고 나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이 하는 중국어를 들었는데, 김충렬 교수님 말씀대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들은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나를 처음 본 그들의 표정에는 실망감이 역력했었다. 그 대학에서는 큰 기대를 하고 자매대학으로부터 교환교수를 요청했는데, 너무 젊은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보다도 어린 교수가 왔기 때문이고, 나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약 2시간 고속도로를 달려 타이중(臺中)의 대학에 도착하였고, 대학원장 비서인 쟝쇼우청(張修誠)의 안내로 근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오늘이 부녀절(婦女節)인데 학교에서 열리고 있는 그 행사 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마지못해 따라갔고, 그는 그 행사장에서 참가 여학생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나에게도 한마디 하라고 부탁해서 간단히 영어로 인사하였다. 호텔로 돌아와 방에서 그는 나에게 “당신이 잘하면 학교에서 기간을 더 연장할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당신들이 요청해도 나는 이번 학기를 마치면 무조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 동안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한 과목 강의를 해야 한다. 쟝쇼우청을 보내고 혼자서 소파에 앉아 어떻게 강의할 것인가를 궁리하였다. 박사과정 학생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 대학 최고 엘리트 교수들이다. 이들에게 한의학 과목을 강의한다면 아마도 이들보다 우월할 수가 없고 오히려 실망시킬 수 있다. 그렇지. 나에게 유리한 게임을 하도록 하자. 철학의 샅바를 잡자.


학교 근처의 서점으로 가서 적절한 교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 가운데 문득 죠우쉐하이(周學海)가 쓴 <역학십강 易學十講>이 눈에 들어왔다. 주역과 의학, 물리학, 화학 등 각 분야와의 관계를 열 개 챕터로 풀어낸 책이다. 나는 지난 수년간 김용옥 선생의 지도로 철학 훈련을 하고 고려대학원에서 철학 분야의 다양한 과목을 섭렵하면서 특히 ‘주역(周易)’과 ‘노자(老子)’를 비롯한 중국철학에 물이 한참 오른 상태였다. 쟝쇼우청에게 학생들이 그 책을 모두 구입하도록 전하라고 지시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로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이번 학기 강의의 실질적인 초청자인 황웨이싼(黃維三) 대학원장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하였다. 그는 산둥(山東) 출신으로 쟝제스(蔣介石) 총통을 따라 1949년 대만으로 왔고, 대만에서는 침구학계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7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태극권을 연마한 덕인지 내공(內功)이 바로 느껴지는 분이다. 그분을 중심으로 십여 명의 대학원생이 자리를 같이하였고,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헤어지면서 내일 아침 식사를 위해 석사 반 학생들을 호텔로 보내겠노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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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웨이싼 교수님은 산둥성 출신으로 대만 침구계의 대부 역할을 하셨다. 대만에 머무는 동안 학부생들과 함께 ‘침구학(鍼灸學)’과 ‘난경(難經)’ 강의를 들었고, 매일 새벽 학교 캠퍼스의 약원(藥園)에서 나에게 태극권을 지도해 주셨다. 수련이 끝나면 동네 음식점에서 아침 식사를 같이하였다. 수년 후 미국에 계실 때, Las Vegas의 자택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다음 날 아침 석사 반 학생들과 호텔 근처의 조그마한 식당에 갔다. 대만은 도처에 식당이 많이 있다. 메뉴 가운데 요우탸오(油條)라는 꽈배기 같은 모양의 음식이 있었다. 밀가루를 기름에 튀긴 것이라 보기만 해도 느글거려 나는 꺼렸으나 그들은 그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면서 나보고도 먹어보라고 권하였다. 마지못해 한 가닥을 다 먹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다가 속이 느글거리면서 뱃속이 부글부글 매우 거북하였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 콜라를 한 캔 사서 마셨으나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 사무실로 가서 사정을 말했더니 직원이 웃으면서 자기네 차를 마시라 하면서 한 잔 권한다. 우롱차(烏龍茶)다. 같은 찻잎이라고 하더라도, 그늘에서 건조해 낸 것은 녹차이고, 완전히 발효시킨 것은 홍차이고, 우롱차는 절반 발효시킨다. 중국의 남부 지방, 특히 대만에서는 대부분 우롱차를 마신다. 느글거리던 속이 우롱차로 인해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병이 있는 곳에 약이 있게 마련이다. 자연이 그러하거나 아니면 인류의 문명이 그리 만든다.


다음 날 저녁에는 대학의 첸메이슨(陳梅生) 총장님이 열 분의 보직교수과 함께 환영 만찬을 베풀어 주셨다. 70대 중반으로 직전에 교육부 차관을 지내셨고, 총장으로 부임하고 나서 바로 이 대학원에 박사과정을 개설하셨다. 그래서 이 박사과정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이 있으셨다. 자리를 같이하신 보직교수들의 평균 연령은 70세 정도로 원로원 분위기가 충만하였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외국 교수에 대한 접대가 황공하기 그지없다.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직급, 권위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면 여기는 잘 대해 줌으로써 절로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분들의 환대에 나는 속으로 충심을 다해 그에 보답하겠노라 생각하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대만에서는 처음 만나거나 반가운 사람들과는 싼베이(三盃)를 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모두와 삼배를 했다. 합이 33잔이다. 다행히 고량주가 아닌 샤오싱(紹興) 곡주였다. 모두 얼큰한 분위기였지만, 내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깍듯이 예를 갖추니 모두 좋아하신다. 천 총장님도 흡족하셨던지 “최 교수는 술을 참 잘하시네.” 하시면서 “앞으로 학교 행사에 외빈이 오시면 내 옆자리에 같이 있어라.”고 하신다. 아마 즉석 술 상무 임명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공식 만찬이 끝나고 나는 그 학교에서 그리고 대만의 중의계에서 술 잘하는 것으로 바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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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메이슨 총장님은 대만 교육부 차관 출신으로 중국의약대학의 의학박사 과정을 만드신 분이었다. 왼쪽은 진자오껀(林昭庚) 교수, 오른쪽은 장용쉰(張永賢) 교수


일주일 후에 아내와 돌이 갓 지난 규하가 합류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 박사과정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학생은 모두 4명인데, 나보다 10살 위 침구학 전공 린자오껀 교수, 6살 위 부인과 전공의 천롱조우(陳榮洲) 교수, 2살 위 내과 전공 쟝헌홍(張恒鴻) 교수, 그리고 약학 전공의 천위팡 교수이다. 린자오껀 교수는 이 대학의 1기생으로 황웨이싼 교수의 수제자이며, 일찍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주치의를 하고 돌아와 타이베이에서 하루에 200~300명의 환자를 보는 명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최근에는 국제동양의학회 (ISOM) 회장을 지냈고, 중의계 유일의 대만 중앙연구원 원사로, 대만 중의계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쟝헌홍 교수는 후난성에서 오신 내과 명의 마광야(馬光亞) 교수의 수제자로 미국 UCLA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대만 중의 내과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한때 창겅(長庚) 대학 중의학원 원장을 하다가 다시 중국의약대학으로 돌아와 최근까지 중의학원 원장을 지냈다. 대만 중의계의 최고 엘리트들과 조우한 것이다.


강의를 시작하고서 2주가 지나니까 대학원에서 나에게 학기를 연장하자는 요청을 해왔다. 성공적인 출발이다. ‘나이도 어린 한국인이 어떻게 자기들보다 중국 철학을 훨씬 더 많이 아느냐?’, 그리고 ‘그걸 어떻게 영어로 표현하느냐?’는 것에 많은 점수를 주었던 것 같다. 그들은 “철학은 골치만 아프고 돈이 안 되니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경희대 규정이 일단 기간을 정하고 해외로 나가면 현지에서는 연장할 수 없고, 귀국해야만 한다.”고 답하였다.


대학원 강의 이외 시간에는 황웨이싼 교수가 학부생들에게 하시는 ‘침구학(鍼灸學)’과 ‘난경(難經)’ 강의를 청강하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녹음기를 켜 놓고 열심히 수강하였다. 그 자료들은 귀국하고 나서 <난경입문 難經入門>이라는 책으로 정리해서 출간하였다. 그리고 침구학 전공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병원 임상 실습에 참여하여 작탁법, 제삽법 등 황 교수님의 수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침관을 이용하여 모 심듯 하는 한국이나 일본의 침 치료 기법과는 사뭇 다른 중국 전통 수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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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웨이싼 교수님의 학부 ‘難經’ 강의를 듣고 귀국 후 자료를 정리하여 국내에서 최초로 ‘난경’에 대한 입문서를 냈다.

<難經入門> 題字는 천리푸 선생님이 써 주셨다.


학기 말이 되자 학교 측에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해달라고 하여 “중의학(中醫學)의 인관(人觀)’’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200여 명의 학부생들이 들었는데,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순진해 보이는 인상들이다. 당시 3년에 걸쳐, 1987년 대전대 한의학과 학생, 1988년 경희대 한의학과 학생, 1989년 중국의약대학 학생들에게 강의한 셈인데, 그 얼굴만 보아서는 어느 대학 학생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보면 “아, 그 대학 학생이구나.”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총장님 만찬에서의 소문이 대만 중의계에 널리 퍼져 타이베이(臺北) 중의계에서 여러 차례 식사 초청이 있었다. 그러나 계속 거절하다가 여름 귀국하는 길에 한 번 응하였다. 그 장본인은 대만 위생서 (衛生署) 중의약위원회(中醫藥委員會) 주임위원인 황민더(黃民德, 1934~1995) 선생이었다. 그는 국립대만대학 토목과 석사로 특별 검정고시 출신 중의사인데, 두뇌가 총명하고 노회하며 (談吐幽默, 妙語如珠, 語含玄機, 慧語如沐春風) 중국 표준어, 광둥어, 푸젠어, 영어, 일본어가 능통하고 장제스 총통의 부인 쏭메이링(宋美齡) 여사의 주치의를 하는 등, 대만 중의계의 최고 실력자였다.


점심 식사에 우리 가족을 초청한 가운데, 그와 나는 둘이 열일곱 병의 맥주를 마셔 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서로 끝없이 풀어 놓았다. 대만에 와서 6개월 동안 지내면서 이처럼 시원하고 화통한 대화는 없었다. 가슴이 시원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그는 “오늘 이걸로는 아직 우리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내일 저녁 최 교수님 가족들을 내 형제들과 함께 다시 초대하고 싶다.”고 하였다.


다음 날 저녁 식사는 타이베이 신이루(信義路)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신라관(新羅館)에서였다. 다섯 병의 양주와 바지 호주머니에서 고액권 한 뭉치를 보이면서 “오늘 이걸 다 마시자.”고 한다. “좋다.” 하였고, 어느 정도 거나해지자 “가족들은 먼저 택시로 숙소까지 모시자.”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내가 “오늘 만난 이 자리가 신라관인데, 그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한의과대학에 나의 사부님이 한의대 학장으로 계신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셨으면 참 좋았겠다.”고 했더니 “그분도 아마 우리들이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을 느끼고 계실 거라.” 위로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소설 <25시>를 쓴 C.V. 게오르규 (Constantin Virgil Gheorghiu)가 경주에 있는 불국사에 와서 ’여기에는 25시가 없다.’고 하였는데, 내가 보니 바로 당신과 내가 자리를 같이한 지금 이곳 신라관에 25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면서 내 손을 쥐고는 “우리, 형제 결의를 맺자.”고 한다. 그날 우리들은 형제가 되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의형제가 있었는데 가장 어린 나는 막내가 되었다. 대만에서는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진정 고수의 경륜을 느낀다. 그러나 그 형님은 몇 년 후 대만 중의계 인사들을 인솔하여 티베트에 갔다가 병을 얻어 1995년 예순이 조금 넘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항상 독주를 마시면서도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 병명은 영양실조였다. 대만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1999년부터 매년 ‘기념황민덕의사국제연토회(紀念黃民德醫師國際研討會)’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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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여름 황민더 선생과 타이베이에서 처음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그다음 날 의형제의 연을 맺었다. 대만뿐만 아니라 세계 전통의학계에서 가장 총명하면서도 훌륭한 리더십을 겸비한 인물이다. 일찍 떠나신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경희대로 복귀하여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며칠 후 중국의약대학의 천메이슨 총장님은 경희대 조영식 총장님과 김완희 학장님께 편지를 보내 나를 다음 학기에 꼭 다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학교 측에서는 “도대체 네가 어떻게 하고 왔길래 그 학교에서 이렇게 안달을 하냐?”고 하였다. 나는 “그냥 열심히 했습니다.”라고 했고 학교에서는 총장님의 전권으로 그다음 해 일 년간 더 파견하기로 하였다. 중국의약대학의 천리푸 이사장님과 조영식 총장님이 오랜 개인적 인연과 친분이 있으셨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두 분은 매번 찾아뵐 때마다 나에게 서로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다. 첫해에는 한 학기의 초청 조건이 그 대학의 객좌교수였는데, 두 번째 초청에는 대만 행정원국가과학위원회(行政院 國家科學委員會, National Science Council) 초청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연봉 3만 불에 주택 제공, 전 가족 항공권을 제공해 주었다. 물론 경희대에서는 또다시 교환교수로 근무하다 복귀하고 다시 출국하려면 적어도 3년이 지나야 한다는 규정을 풀어 주었다.


대만에 두 번째로 가면서는 중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첫해에도 물론 중국어를 배우려 하였으나, 내가 한마디 중국어를 하면 그들은 영어로 하고, 나는 중국어로 더듬더듬, 그들은 영어로 하고 결국은 나도 영어로 하고 말았다. 이듬해 도착하자마자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하고 나서 바로 주변의 중국어 교습소를 찾아가 등록하였다. 그렇게 일 년을 지내면서 귀국 무렵에는 약 60~70%를 중국어로 강의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수온이는 집 근처의 성삼(省三)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나보다도 발음이 좋고 사성(四聲)도 정확하다. 아이들이 역시 어른보다 훨씬 낫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 한 채로 시작해서 수온이는 열 달 만에 전국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받았다. 그를 계기로 린자오껀 교수는 수온이를 양딸로 삼았다.


둘째 해를 시작하면서 대학원에 무슨 과목을 강의했으면 좋겠느냐고 문의했더니, 내가 한국에서 왔으니 한국 한의학의 특징인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대해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바로 서울에 연락하여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 50권을 공수해달라고 하였다. 대학원생 전원에게 책을 나눠주고 나서 두 학기에 걸쳐 박사와 석사 반에서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강독하였다.


2학기 종강 때는 끝을 내느라 무려 오후 다섯 시간을 속강하였는데, 끝내면서 우리는 모두 벅찬 성취감을 감격스럽게 나누었다. 학생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책에 사인을 부탁하는 등, 밤늦게까지 즐거운 만찬을 나누었다. 그들은 나에게 대만 특산의 홍목(紅木)으로 조각한 사자상을 선물하였는데, 거기에는 “한의지사(漢醫之獅)”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들과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FB로 반갑게 교감한다.


그렇게 두 학기에 걸쳐 강독한 자료를 바탕으로 나는 귀국하여 1996년 ‘동의수세보원’의 영문판 〈Longevity and Life Preservation in Oriental Medicine〉을 출판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1년 반을 지냈던 대만의 경험은 일생을 통해 나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고 깨달음과 가르침을 주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내 인생에 대만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같은 전통의학계라도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과는 결이 다른 대만을 난 사랑한다.


첸리푸(陳立夫, 1900~2001) 선생님은 한때 마오쩌둥(毛澤東)이 조우언라이(周恩來)를 보내면 장제스가 그에 대적하여 파견했던 중국 근대사의 위인이시다. 37세에 중국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40대에 Time지 표지 인물로도 등장했었다. 내가 처음 중국의약대학에 갔을 때 그 대학의 이사장으로 계셨다. 대만의 중국의약대학 중의학과 출신들이 중의사 면허를 따면 그다음 해에 서의사 면허까지 따서 중서의결합의사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제도도 만드셨다. 선생님의 지론은 ‘중서의결합(中西醫結合)’이다. 한국 한의계가 중국이나 대만 중의계가 부러운 것은 마오쩌둥이나 첸리푸와 같은 지도자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몇 차례 뵈었고, 귀국 후에는 92년 김용옥 선생을 모시고 같이 타이베이 쓰린(士林) 자택으로 방문하기도 했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항상 단아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맞아 주셨다. 대만의 지식층들은 대부분 그분의 독특한 글씨체를 알아보는데, <내경병리학 內經病理學>, <난경입문 難經入門>, <한의학 韓醫學> 등 내 책의 제자(題字)를 써 주셨고, 마지막 귀국 인사 때에는 동양문화의 정수(精髓)에 관한 족자를 써 주시기도 하였다. 2000년 중국의약대학에서 열린 백세탄신기념행사에 특별히 초청해 주셔서 마지막으로 뵐 기회를 가졌다. 이듬해 101세로 서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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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귀국한 후에도 대만을 자주 방문했었고, 92년 김용옥 선생과 같이 쓰린에 있는 댁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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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리푸 선생님은 나에게 여러 책의 제자(題字)를 써 주셨는데, <내경병리학 內經病理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92세이셨다. 이 책은 중국의약대학 리푸박물관(立夫博物館)에 전시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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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리푸 선생님의 형제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원해 주셨다. 특히 경희대 조영식 학원장님께서 일제 치하에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을 때 첸리푸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셨던 인연으로 두 분은 각별히 지내셨다. 내가 대만에 오갈 때마다 두 분은 서로 나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다.


대만에 입국을 금지하는 WHO에 근무하던 5년을 제외하고는 일 년에 두세 번 대만을 방문하여 우의를 다지면서 교류하였고, 중국의약대학에서는 매년 객좌교수 임명장을 보내주고 있다.


대만은 나에게 첫 번째 외국이자 내가 사랑하는 따스한 남쪽 나라이다.



© 최승훈 교수의 나의 세계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