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화 노트

올해, 38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85년 대전대학교에서 시작하여 88년 모교 경희대학교에 돌아왔고, 2014년에는 단국대학교로 옮겼습니다. 그 사이에 대만 2회, 중국 1회, 미국 3회에 걸쳐 모두 6차례 교환 교수 활동을 하였고, WHO에서 5년,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3년을 대학 밖에서 지냈습니다.

한의학의 세계화라는 비전 아래, 제가 한의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주도했던 경험이 저에게는 큰 영광이자 보람으로 남습니다. 특히 5년간의 WHO 활동이 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의학을 위해서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러나 해내야만 했던 과업들을 완수하였습니다. 반대와 방해가 엄청났었지만 그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한의학의 큰 물줄기를 이끌었습니다. 후에 ICD-11 26장으로 진화한 전통의학 국제 표준 용어의 제정, 수백 년 이상 각 나라마다 달리 썼던 침구 경혈 위치의 통일과 국제 표준 제정, 일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CPG 가이드라인의 개발 등이 그것들입니다. 국내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Nature와 같은 저널이나 논문에 소개되었고 전 세계의 교과서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들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제는 후학들이 이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학력]
198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1987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 박사학위 수여
1989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과정 수료

[경력]
2021-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2020-현재 국제동양의학회 (ISOM) 회장
2020-현재 미국 Emory의대 겸임교수
2008-현재 대만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
2014-2016 단국대학교 부총장
2003-2008 WHO 서태평양지역 전통의학 자문관
2011-2014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2008-201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2018-2019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2009-2011 세계전통의학대학협의회 (GUNTM) 창립인·회장

[상훈]
2014.10 세계 표준의 날 ‘勤政褒章’ 수상
2015.12 경희한의대 동문회 ‘자랑스러운 慶熙韓醫人賞’ 수상
2022.02. ‘綠條勤政勳章’ 수상

[저서]
Koonja Press, Pajoo, 2021
<韓醫學原論> 군자출판사, 파주, 2020
<內經病理學> 통나무, 서울, 1993, 1995(2판), 1999(3판), 2001(중국어판, 중의고적, 북경)
외 10권 및 180여 편의 논문

최승훈
최승훈

한의학 세계화의 아이콘. 대전대, 경희대, 단국대에서 38년간 교수로 재직, 대만 중국의약대학과 국가과학위원회, 중국 국가중의약관리국, Stanford 의대, Emory 의대 교환교수, WHO/WPRO 전통의학 책임자,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동양의학회 회장, Emory 의대 겸임교수와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로 Boston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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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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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시간


2008년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서울에서 ‘3rd Informal Consultation on Development of ICTM-EA’ 회의가 열렸다. WHO에서 내가 주관했던 마지막 회의였다.


회의를 마치고 서울에 머무는 동안 경희의료원의 한의 본과 4학년 강의실에서 ‘WHO의 전통의학 표준화’에 관한 특강을 하였다. 강의 참석자는 한의대 임상 교수를 포함하여 열 명 정도였다. 그러나 뒷자리에는 대학 본부에서 온 유 모 교수가 참석하여 경청하였고 강의를 마친 후 그간의 성과와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8월 초, 조인원 총장님께 귀국 인사를 하였다. 그 며칠 후 학장 인사 명령을 받았고 8월 14일부터 제18대 한의대 학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학장의 주요 역할은 학술적인 리더십보다 단과 대학 구성원들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고, 또 대외적으로는 단과 대학을 대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대학의 비전을 수립하고 끊임없이 구성원들과 소통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대학은 학장이 가진 비전만큼 성장할 수 있다. 특히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은 한국 한의학의 방향을 선도해야 하는 엄중한 책무가 있다.


5년간의 해외 근무에서 복귀한 나를 기수 가리지 않고 바로 학장으로 임명한 것은 학교 당국으로서 파격적인 결정이고 그만큼 기대하는 바가 컸다고 생각한다. 보직 명령을 받고 바로 학장으로서 가져야 할 비전과 목표를 확인하였다. 갑자기 아이디어를 쥐어짜기보다는 그간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평소 생각하고 기대했던 한의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한의학을 보편 학문세계로 안착시켜 전 인류 보건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비전에 걸맞은 인재부터 선발하여야 한다. 기존 신입생 선발 기준은 100% 이과 출신으로 되어 있었다. 의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고, 더군다나 한의학은 철학을 중심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더욱 요구하고 있다. 한의대 교수 회의에서 신입생의 30%를 문과 출신으로 선발하는 규정을 통과시키고 본관의 승인을 받아 2010년부터 실행하였다. 그 후 재학생들 대상으로 추적 조사한 결과, 문과 출신들이 이과 출신보다 학업 성취도에서 더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후로 다른 한의대에서도 문과 출신 학생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문과·이과의 구분은 일본과 한국만 하고 있으며, 조속히 사라져야 할 불합리하고도 지독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아직 어린 나이에 한 인간의 운명과 방향이 결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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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 신입생 선발에 관한 결정이 이루어지면서 나아가 이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결국 학문의 힘은 독서량에서 나온다는 평소의 생각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세계 명문 대학들이 실행하고 있기도 하다. 100명에 가까운 한의대 교수 전원에게 각자 도서 100권씩을 추천토록 요청하였다. 모두 600여 권을 추천받았고 그중 추천을 많이 받은 순서로 100권을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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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4일 대학 중앙도서관에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추천도서 100권 선포식’이 조인원 총장님과 추천도서 선발에 참여한 한의대 교수님들을 모신 가운데 열렸다.


추천도서 100권은 <논어>, <대학>, <자본론>, <순수이성비판> 등 동·서양 고전 31권과 <문명의 충돌>, <로마인 이야기>, <유토피아>, <파우스트> 등 인문·사회과학 44권, <엔트로피>, <이기적 유전자>, <통섭> 등 자연과학 분야 25권으로 선정됐다.


09학번 신입생부터 예과 2년 동안 추천도서 100권 중 20권 이상의 독후감을 제출해야 본과 진입이 가능하다. 학생들은 학기마다 읽은 책의 내용과 감상을 한의대에서 제공한 ‘독이고(讀而考, 읽고 생각하다)’에 적어 담당 교수에게 제출해야 한다. 교수 한 명당 5~6명의 학생이 배정되고 학생들은 담당 교수의 평가와 지도를 받게 된다. 예과 2학년 말에 최종 심사를 해서 본과 진입 여부를 가리고, 성적이 좋은 학생은 장학금 혜택도 받는다.


시행 2년 후 103명 전원이 20권 이상의 독후감을 제출하여 본과에 진급하였고, 한 여학생은 예과 2년 동안 추천도서 100권을 모두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국내 일간지에도 소개되었다. 교내 타 단과대학에서 우리와 같은 방식을 도입하였다가 학생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불과 몇 달 만에 좌초되고 말았다.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讀而考 독서 추천 프로그램은 한의대의 자존심이자 힘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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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대에서 예과 학생들에게 제공한 독후감 기록부 ‘讀而考’, 제자(題字)는 한의대 동기인 최석봉 원장이 써주었다.


재학생들의 다양한 역량 개발을 격려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한의 인재 양성을 목표로 ‘청년허준상’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2010년부터 시작된 ‘청년허준상’은 인성, 봉사 정신, 리더십, 국내외 각종 연구 및 활동 등의 성과가 우수하여 한의학의 명예와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본과 4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하였다. 시상은 1학기 말에 실시하고 이어 수상자를 ‘대한민국인재상’ (대통령상, 후에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상으로 바뀜) 후보로 추천하였다. 첫 해 수상자인 남민호 군 (현 KIST 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UST 부교수, 경희대 겸임교수)은 그해 12월에 ‘대한민국인재상’도 수상하였다. 그 후로 다수의 한의대 학생이 ‘청년허준상’에 이어 ‘대한민국인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는 ‘청년허준상’과 ‘대한민국인재상’의 선발기준을 거의 일치시켜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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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청년허준상’ 수상자 남민호 박사의 ‘KIST Young Fellow 2022’ 선정 당시 사진 2022. 03. 18.


이와 동시에 학생들의 연구 능력을 고양하기 위해서 URP (Undergraduate Research Participation, 학부 학생 연구 참여 프로그램) 제도를 시작하였다. 학부 학생과 지도 교수를 연계 선발하고 공동 연구케 함으로써 SCI급 논문에 게재토록 소정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제도이다. 09학번인 이현훈 군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조교수)은 학부 기간에 제1저자 2편을 포함한 4편의 SCI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는 ‘독이고’ 프로그램이 시작되던 해의 예1과대표이기도 하다. 그 후로 많은 학생들이 이 제도에 참여함으로써 미래 한의학 연구의 인재로 성장하고 있다. 타 한의과대학에서도 이 제도를 마련하여 재학생들의 연구 능력과 의지를 고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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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훈 연구조교수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가 의료용 인공지능 챗봇을 개발하고 연구 결과를 의료정보학 분야 국제 학술지 JMIR (의료정보학 분야 JCR 상위 4%)에 게재했다.


학부 수업에서는 전체 과목의 20%를 영어로 진행하도록 하였다. 한의학은 한자와 한문을 주로 사용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다소 어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학년에서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교양, 자연과학, 양의학 과목의 기원은 영어권이기 때문에 영어로 수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학생 시절부터 영어가 익숙해져야 한다. 이는 나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학생들보다 평소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한 덕에 뜻밖의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학생들도 그러한 기회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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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일 자 중앙일보 11면 기사 내용


‘청년허준상’이나 URP 제도는 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지만, 모름지기 한의대가 수행해야 할 중심 과업은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교과 과정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10월 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뉴 패러다임 한국한의학 교육과정 개발 연구’라는 제목의 2년 연속 과제가 선정되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한의대 교육과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연구책임자는 의사학 교실의 김남일 교수, 실무연구팀장은 원전학 교실의 백유상 교수, 총무간사는 의사학 교실의 차웅석 교수가 맡고, 실무연구팀은 기초 교수 7명, 임상 교수 4명으로 구성했다.


이 연구과제에서는 새 교육과정 개편 방향으로 한의학의 패러다임 연구, 교육 단위별 연계성 강화, 실습 교육 내실화, 타 학문 수용에 대한 방법 모색, PBL 도입, 트랙 제도 도입, 통합식 교육과정 개발, 분반 강의, 교육 평가법 개발, 교육 지원 시스템 구축, 교육 재정 및 인프라 확보 등이 중점적으로 연구되었다. 이 과제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부학장인 김남일 교수에게 다른 보직 업무보다는 새 교육과정 개편 작업에 집중하도록 배려하였다.


일부 선배 교수들은 “최 학장, 왜 이렇게 우리들을 힘들게 하느냐? 나 정년하고 난 다음에 하도록 하세요.”라고 불평 어린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 교수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작업에 참여하였다. 2010년에 결과 보고서가 나오면 새로운 교과 과정을 2011년 신입생부터 시행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이 고안된 ‘뉴 패러다임 한국한의학 교육과정’은 그 후로 소리 없이 실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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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4일 자 한겨레 16면 전면에 실린 한의대에서 진행 중인 혁신 작업에 대한 기사


전 세계적으로 의과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연대하는 국제 조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약한 조직일수록 뭉쳐야 하고 그래야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 한의과대학 연합체와 같은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2009년 경희대학교 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대학의 지원을 받아 세계전통의학대학협의회 (Global University Network of Traditional Medicine: GUNTM)를 설립하였다. WHO 등 국제 활동을 통해 얻은 개인 network를 활용하여 한국에서는 경희대학교, 중국에서는 북경중의약대학, 상해중의약대학, 대만의 중국의약대학, 일본의 메이지국제의료대학, 호주의 RMIT 대학과 홍콩의 홍콩침례대학 등 모두 5개국 7개 대학을 결성하였다. 국제 전통의학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염두에 둔 북경중의약대학 등 중국 측에서 회의 전날까지 반대 책동을 하였지만 천신만고 끝에 성사시킬 수 있었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이 국제 전통의학 분야에서 지속해서 명성과 주도권을 지켜가기 위한 방안으로 사무국을 운영하였으나,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사무국이 대만의 중국의약대학으로 옮겨 갔다. 출범 후 회원 대학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연례 회의를 주최하도록 하였고, 한차례 다 돌고 나면 회원 대학을 대폭 늘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만의 잔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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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60주년을 기념하여 2009년 5월 6~8일 GUNTM 창립총회가 경희대학교 본관과 COEX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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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의대와 지방 자치단체와의 협력 사업으로서, 2010년 4월부터 경북 영천시와 공동으로 영천시를 한방특화도시로 발전시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후반기에는 경남 산청군의 요청으로 6개월간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의 기본 계획서를 만들었다. 한의학 분야에서의 국제적인 엑스포로는 규모가 작았지만 1999년 학과장 재직 시절 경희대학교와 중앙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했던 ‘제1회 한의학국제박람회’ 사무국장을 맡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경험이 있었다. 2013년 9월 6일부터 45일간 개최된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는 예상 참가 인원 100만 명을 훨씬 뛰어넘는 170만 명을 기록하였으며, 재정적으로도 21억 흑자를 달성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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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0일, 경북 영천시 초청으로 영천한방산업 발전을 위한 세미나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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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7일 경남 산청군청에서 ‘2013 산청 세계전통의약 엑스포의 의미와 발전과제’에 대해 발표하였다.


학장 보직과 함께 국제 활동으로는 WHO/ICTM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Traditional Medicine) 프로젝트와 ISO/TC249의 한국 대표직을 수행하였다. 거의 매달 해외 출장을 가야 했고 이는 결정적으로 학장 보직을 자진 사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WHO와 ISO/TC249 업무는 국내에서 다른 인사로 대체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WHO의 ICTM은 WHO에서 내가 주관했던 ‘WHO 국제 전통의학 표준 용어’의 후속 작업으로 나중에 ICD-11 전통의학 챕터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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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2~24일, 제네바의 WHO/HQ에서 열린 ICTM 회의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제도와 프로그램은 대부분 현재까지 지속해서 발전 유지되고 있으나, 막상 교수들이 주도적으로 자기 혁신해야 할 교과 과정이나 국제화 활동은 좌초되고 말았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고, 이는 한국 한의학의 진로와 명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첨부하는 글


학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수시로 교수들과 ‘학장서신’이라는 메일로 소통하였다. 첨부하는 글은 학장직에서 이임하면서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이고, 다음은 그에 대해 교수들이 보내온 답글이다.


학장서신


존경하는 교수님께


긴 겨울이 물러가고 새 학기가 되었습니다.

지난주 교수회의에서 인사드렸었습니다만, 2년 반 동안 부족한 저를 학장으로 세워 함께해 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근 겪고 있는 한의계의 고난은 난데없이 밀어닥친 것이 아니라, 他力에 의해 잘나가던 시절 우리 한의계가 일찍이 自覺하고 대비하였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나 도움이 아닌, 오로지 우리들의 손에 달려 있으며, 우리 한의대는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최근 우리 한의대의 부활을 위한 노력은 하나둘씩 궤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구성원들이 그 변화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힘을 모아준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특히 젊은 교수들과 함께했던 노력과 시간들은 저에게 큰 위안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문제 해결이나 잘 해내는 학장보다는 비전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헤쳐 나가는 학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論語>의 “老者安之, 朋友者信之, 少者懷之”라는 구절을 품고 겸손하고 진솔하게 여러 동료 교수님들과 함께 하는 학장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저의 진실을 다 보여 드리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事實이라는 그릇이 眞實을 담아 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하다”라는 신영복 교수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저는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老子가 보여준 시간의 위대함을 믿습니다.


두 달여 전 (12월 23일) 총장님과의 면담에서 당시 현안으로서의 조교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올 상반년에 몰려 있는 WHO와 ISO 등, 다른 전문가로 대체가 가능하지 않은, 국제기구 활동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잦은 해외 출장과 수반되는 업무가 학장직을 제대로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학장직의 사직을 청하였습니다. 말씀드리기가 정말 송구스러웠지만, 총장님께서도 결국 수용해 주셨습니다.

일본에서 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동경의대의 쯔다니 교수는 지난 2월 초 마닐라에서 열렸던 WHO 회의에서 중국 대표와 격돌하면서 병이 생겨 얼마 전 맡았던 역할들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중국에 맞서 공조했던 저의 어깨에 무게가 더해지고 있습니다.


뉴 패러다임 한의대 교육과정의 정착, Space21 신축 한의학관 건립의 당면 과제와, 창조21과제의 성공적인 수행, 대형 국가연구과제의 수주, 대학원의 혁신 등, 우리 대학과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이제는 후임 학장인 김남일 교수에게로 그 짐을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교육과정과 한의학관 신축 문제 모두 김 교수가 실무 책임자로 일해 왔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축하한다기보다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더 드는 것은 저의 괜한 기우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이만 먹는다고 元老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교수가 되기를 열망했던 젊은 날의 初心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댁내 두루 복되고 건강하시길 기원하면서, 

그간 부족한 저와 함께하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1년 3월 7일

최승훈 배상


한의대 교수들의 답글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일 복이 많은 것 같군요.

다시 또 국제적 일을 숙명적으로 맡아야 한다니…….

부디 건강도 챙기십시오.

그동안 여러 가지 도와주셨음도 더불어 감사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입니다.

오늘 신임 학장 발령 관련 소식을 접하고 아쉬움 반, 안도감 반이었습니다.

아쉬움은 그래도 유임되셔서 앞으로도 많은 일들 하실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하는 마음.

안도감은 그간 너무나 많은 일들을 숨 돌릴 시간 없이 달려오신 것 같아 이제는 조금 내려놓고 쉬시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

저로서도 학장님과 같이 일했던 시간이 소중한 시간이었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임상 교수로서 항상 반쪽짜리 교수라는 아쉬움이 많았는데 그 반쪽을 채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학생 때부터 학장님과의 인연이 있었는데, 이렇게 제가 교수가 되어 다시 학장님과 인연을 맺게 되니 세상에 정말 인연이란 것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동안 한 번도 학장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제가 본과 2학년 때 저희 이모님이 암으로 투병 중이셨고, 그때 마침 학장님이 중국에서 돌아오셔서 저희 본과생 강의를 시작하셨고, 또 하나한방병원에서 암 환자 진료를 하셔서 제가 이모님 모시고 병원에서 교수님 뵙던 기억이 나네요. 비록 이모님은 운명을 달리하셨지만 매우 학장님께 고마워하시며 떠나셨습니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나 보네요.

소중한 인연 부디 계속되길 바라며, 그동안 너무나 고생 많으셨고, 조금 쉬시고 다시 복귀하시길 기대합니다.

*** 드림


좀 더 직무를 수행하셨으면 했는데 아쉽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 학장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국제 관련 일이나 WHO 관련 일에 대한 관리도 우리 분야에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챙겨 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건강하시고 한의계 발전을 위해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 드림


안녕하십니까? *** 입니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한의학의 큰 힘이 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의대 분위기도 일신되었던 것 같습니다.

건강하세요.

*** 올림


부담이 많으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조금 편안해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항상 평안하시고 하시는 일에 행운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학장님 혜존

날이 아직은 싸늘한 기운이 여전합니다.

말씀해 주신 시간이라는 것이 항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하고는 다르지만 또 그러해서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해 봅니다.

제게 처음 내경 병리학을 교수해 주셨을 때가 생생합니다. 기실 저는 예과 일 이학년에는 사서나 내경을 좀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요,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경은 모르겠다는 생각에 부딪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상한론을 한번 읽어봤는데 '아 드디어 내가 가야 할 길이 이것이구나' 하고 한참 상한론 공부에 빠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내경은 정말 버려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를 정도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다가 학장님의 내경 병리학 강의를 듣고 그 안목에 놀라웠고 다시 한번 내경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았었습니다.

그게 인연이었던지 작년 재작년의 학장님의 은혜에 힘입어 이제 교수의 자리에까지 올라 같이 할 수 있어서 더 없는 영광이었고 제겐 큰 힘이 되었는데 이제 막상 퇴임을 하신다니 아쉬운 맘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학장님께서 보여주신 명철한 안목과 후학을 사랑하고, 제자를 길러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앞으로 더욱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은 맘과 몸을 추스르시고, 바쁘시더라도 조금은 일을 놓고 단 하루라도 편히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2011.03.08 

불초 제자 *** 올림 


학장님께, 먼저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말씀 올립니다.

학장님께서 보여주신 사실 속에서 저는 진심과 진실을 많이 봤습니다.

학장님께서 역할을 해주신 덕분으로 오펨도 이제 제자리를 찾아 새롭게 변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상황들을 잘 알지 못하지만 제가 임용된 이후로 한의대가 가장 새롭게 변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바쁘시겠지만 학장님을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배상


보직 맡으신 기간 동안 물 흐르듯이 원활한 학사 행정을 잘해 오셔서 장수하시리라 생각했었는데...

아쉽습니다.

다시금 국제적인 무대에서의 활약으로 경희대와 한의계의 이름을 날려 주실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Best wishes!

*** 올림 


학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학장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언제 시간 되면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 드림 


최승훈 학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 해 동안 학장님을 모시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교수님이 하실 의미 있는 일들을 기대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 드림


교수님 *** 입니다.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이렇게 교수님의 서신을 받고 우선 안부 인사를 드립니다.

교수님께서 학장을 하시면서, 한의학계의 침울한 모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 놓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작스럽게 그만두신다고 하니 조금은 섭섭합니다.

사실 2년이란 세월은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교수님께서 올해 하셔야 할 일이 더 많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어, 학교 현장보다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의학자로서의 노력에 감히 감사와 경의를 드립니다.

학교에서는 자주 뵐 수 있겠지요?

앞으로도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교수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심어 주길 바랍니다.

우리 한의학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교수님께서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나가는 한의학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해 더욱 좋은 성과를 얻으시고, 그 성과를 저희들과 공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님 올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기대하시는 성과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교수님, 그리고 한의학의 미래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배상 


최승훈 학장님에게

한의대 학장님으로 재직하시며

보여주신 비전에 대하여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감사의 마음 올리며

앞으로도 좋은 말씀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올림


최승훈 학장님

한의학과 학생 및 그 구성원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고민하시면서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한의학의 큰 보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의대 교수 회의 때 갑자기 이취임식 문제를 거론하셨을 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니 안타까움이 우선 앞서고, 아마 큰 능력이 있으시기에

또 다른 큰 모습으로 저희들 앞에 나타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장님의 열정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배상


최승훈 학장님께,

한의과대학 수장으로써 많은 고심과 진심 어린 애정을 모두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날에 평안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 배상


최승훈 학장님 귀전

한의대학장 보직을 내려놓아 저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습니다.

향후 한의계를 위해 더 큰 일에 쓰임 받으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올림


최승훈 교수!

평화와 강건함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그동안 대학을 훌륭하게 이끌어 온 수고와 열정, 감사합니다.

어려웠던 한의계와 한의대생들에게 꿈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 준 점, 그리고 학생들의 필독의 추천도서 100선은, 최 학장의 업적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동안 리더로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한의계의 회색빛 모습을 미리 보고, 모두를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세계와의 소통 타 학문과의 협력 등등 ....

정말 감사했어요. 앞으로도 더 큰 일하기를 기도하고 축원합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2011년 3월 18일

서초동에서

오송



© 최승훈 교수의 나의 세계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