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화 노트

올해, 38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85년 대전대학교에서 시작하여 88년 모교 경희대학교에 돌아왔고, 2014년에는 단국대학교로 옮겼습니다. 그 사이에 대만 2회, 중국 1회, 미국 3회에 걸쳐 모두 6차례 교환 교수 활동을 하였고, WHO에서 5년,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3년을 대학 밖에서 지냈습니다.

한의학의 세계화라는 비전 아래, 제가 한의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주도했던 경험이 저에게는 큰 영광이자 보람으로 남습니다. 특히 5년간의 WHO 활동이 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의학을 위해서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러나 해내야만 했던 과업들을 완수하였습니다. 반대와 방해가 엄청났었지만 그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한의학의 큰 물줄기를 이끌었습니다. 후에 ICD-11 26장으로 진화한 전통의학 국제 표준 용어의 제정, 수백 년 이상 각 나라마다 달리 썼던 침구 경혈 위치의 통일과 국제 표준 제정, 일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CPG 가이드라인의 개발 등이 그것들입니다. 국내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Nature와 같은 저널이나 논문에 소개되었고 전 세계의 교과서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들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제는 후학들이 이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학력]
198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1987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 박사학위 수여
1989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과정 수료

[경력]
2021-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2020-현재 국제동양의학회 (ISOM) 회장
2020-현재 미국 Emory의대 겸임교수
2008-현재 대만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
2014-2016 단국대학교 부총장
2003-2008 WHO 서태평양지역 전통의학 자문관
2011-2014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2008-201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2018-2019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2009-2011 세계전통의학대학협의회 (GUNTM) 창립인·회장

[상훈]
2014.10 세계 표준의 날 ‘勤政褒章’ 수상
2015.12 경희한의대 동문회 ‘자랑스러운 慶熙韓醫人賞’ 수상
2022.02. ‘綠條勤政勳章’ 수상

[저서]
Koonja Press, Pajoo, 2021
<韓醫學原論> 군자출판사, 파주, 2020
<內經病理學> 통나무, 서울, 1993, 1995(2판), 1999(3판), 2001(중국어판, 중의고적, 북경)
외 10권 및 180여 편의 논문

최승훈
최승훈

한의학 세계화의 아이콘. 대전대, 경희대, 단국대에서 38년간 교수로 재직, 대만 중국의약대학과 국가과학위원회, 중국 국가중의약관리국, Stanford 의대, Emory 의대 교환교수, WHO/WPRO 전통의학 책임자,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동양의학회 회장, Emory 의대 겸임교수와 중국의약대학 객좌교수로 Boston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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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의학의 세계화, 그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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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의학연구원(한의연) 원장 3년 차에 접어들면서 주변에서는 원장 연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연초에 연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이미 ‘기관 평가 우수’라는 목표를 달성하였기 때문에 연임해야 할 명분은 사라졌다. 굳이 연임을 하자면 임기 중에 한의연에서 우수 연구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자면 적어도 10년 이상 일사불란하게 몰아쳐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실정에 장기 연임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박수 칠 때 떠나고, 주어진 임기까지 마무리를 잘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한편 3년 만에 돌아가야 하는 경희한의대는 안타깝게도 예전의 명성과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국내 한의대의 종가(宗家)로서 제구실을 못 하고 있었다. 경희대학교는 국내 명문 사학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으나, 그에 비해 한의대의 위상은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에게 뇌물성 돈봉투를 건넸다가 거절당한 이후 필사적으로 나를 모함하면서 헛소문을 퍼뜨렸던 한의대 행정실장과 그에 놀아난 일부 교수들이 있었다. 그들에 의해 일그러진 한의대로 다시 돌아가 애써 노력한들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냥 묻어두고 떠나자.


2014년 8월 초, 한의연에서 경희대로 복귀 인사하는 자리에서 조인원 총장께 사직 의사를 밝혔다. 당시 몹시 실망하시던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고 그분에 대한 송구함도 여전하다.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단국대는 한의사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장형(張炯) 선생이 해방 후 설립한 사학이다. 한의연 원장 임기를 마치기 몇 달 전부터 단국대 측에서 여러 차례 나에게 영입 의사를 전해 왔다. 단국대 장충식 이사장과 장호성 총장을 만나 그들의 제안을 들었고, 그 자리에서 나의 포부도 밝혔다. “그래, 단국대로 가서 통합의학을 주도하는 한의대를 만들어 보자. 단국대에서 한의학의 미래를 새롭게 일구어 보자.”


2014년 9월부터 단국대에서 특임부총장 근무를 시작하였다. 주요 임무는 단국대에 한의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의학계열 대학 신설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존 한의대를 대상으로 합병 시도를 하였다. 마침 전북 소재 모 대학에서 한의대와 한방병원을 매각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그 대학의 재단 책임자와 상호 방문하는 등 여러 차례 접촉하였다. 그러나 단과대학만 분리해서 합병하는 것은 선례가 없고 또 법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그 후 경기도 소재 대학과도 접촉하였으나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그래서 방향을 국외로 선회하여 미국 애틀랜타에 단국대 분교를 설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총장이 주재하는 주요 보직자 회의에서 내가 마련한 마스터플랜이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재정상의 이유로 이사장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한편, 최원철 교수의 주도로 대학 죽전캠퍼스에 Nexia Global Center (NGC)가 개설되었다. 나도 암 환자 위주의 진료를 하면서 대학 보건소에서도 수요일마다 교직원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대한의사협회가 교육부에 압력을 넣고 적극 방해함으로써 그러한 활동들이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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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부터 단국대에서 특임부총장으로 근무하는 한편 NGC와 대학 보건소에서 진료하였다.



표준화 공로 근정포장 수훈


2014년 10월, 정부로부터 세계 전통의학 표준화의 공로를 인정받아 근정포장을 수훈하였다. 2003년부터 5년간 WHO에 근무하면서 전통의학 표준 용어와 경혈위치 국제 표준 제정, 그리고 전통의학 임상진료지침 개발 등 공적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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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4일 세계 표준의 날 기념행사가 충북 진천 소재 국가표준원에서 열렸고, 당일 수훈자들을 대표하여 ‘전통의학의 표준화’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자랑스러운 경희한의인(慶熙韓醫人) 상(象) 수상


2015년 12월, 경희한의대 총동문회에서는 경희한의대 교수 및 학장, WHO/WPRO 전통의학 자문관,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 단국대학교 부총장 등으로 재직하면서 이룬 업적을 치하하고 ‘자랑스러운 경희한의인’으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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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한의대 입학 후 40년 만에 ‘자랑스러운 경희한의인’으로 선정되어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중서의결합지국의대사(中西醫結合之國醫大師) 선정


2017년 12월, 대만의 12개 한의학 관련 학회 연합회가 주관하는 ‘중서의결합지국의대사’에 선정되었다. 1989년 대만 중국의약대학(中國醫藥大學, China Medical University) 대학원에서 강의를 시작으로 꾸준히 대만의 학계와 교분을 쌓았고, 특히 WHO에 근무하면서 전통의학의 표준화 등을 통해 양의학과의 협력을 도모함으로써 인류 건강에 기여하였다는 공적을 인정받아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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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원론〉 저술


2016년 봄, 부총장 보직을 마치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한의학 개론서 집필에 착수하였다. 중국에서는 정부 주도로 최고의 편집진이 중의학 개론서를 만들어 전국의 중의약 관련 대학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내용이 충실하고 전반적으로 완성도도 높은 편이다. 주기적으로 개정판을 내고 있다. 국내 한의학계에서는 개론서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인지 대부분 수십 년 전 발간되었거나 중국의 중의학 개론서를 그대로 번역하여 쓰고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개방적으로 변해가고 언젠가는 의료일원화가 될 터인데, 그에 대비하여 내놓을만한 개론서가 없는 것은 우리 한의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대만, 미국 대학과 WHO에 근무하면서 국내에서도 잘 만들어진 한의학개론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자료를 모으면서 준비해 왔다. 어차피 대학원에는 한의학개론 전공이 없기 때문에 그 분야에 이렇다 할만한 전문가도 없다. 그러니 그 필요성을 절감(切感)하고 있는 사람이 해야 했다. 마치 사상의학 전공이 아니면서 〈동의수세보원〉을 영역했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먼저 내가 개론서의 초고(草稿)를 완성한 다음, 국내 한의대와 한의연에 재직하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각 전공 챕터 별로 3년간 33차례의 월례 집담회를 통해 원고를 수정 보완하였다. 드디어 2020년, 〈한의학원론〉이라는 이름의 개론서를 군자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기존의 개론서와는 달리 그림과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 중국의 중의학 개론서보다 더 나은 것은 물론이고 국내외적으로 최고의 한의학 개론서라 자부하고 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부채와도 같은 부담을 덜었다. 표지 문양은 내가 좋아하는 목련으로 했다. 현재 국내 일부 한의대에서 교재로 활용하고 있으며, 아마존을 통해 미국 한의대의 한인 학생들도 구매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베트남에서 이 책을 번역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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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쪽의 ‘한의학원론’, 한국의 대표적인 한의학 개론서이다.



COVID-19 원격 진료


COVID-19은 온 인류에게 커다란 재앙이었지만, 국제 전통의학계에게는 황금 기회이기도 했다. 중국의 경우, SARS 시절에 개발된 롄후아칭원(連花清瘟: 麻杏石甘湯과 銀翹散 응용)이 2022년 중국 내에서 COVID-19 치료제로 1조 2천억 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면서 COVID-19 치료를 위해 새로이 개발된 칭훼이파이두탕(淸肺排毒湯: 麻杏石甘湯, 射干麻黃湯, 小柴胡湯과 五苓散 응용)과 함께 중의약의 가치를 드높였다.


대만에서는 국립중의약연구소(國家中醫藥硏究所,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hinese Medicine)가 주도적으로 NRICM101 (淸冠一號: 荊防敗毒散 응용)이라는 COVID-19 치료 신약을 개발하여 국민의료보험에 포함하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그와 동일한 신약 개발 방식을 다른 질환에 대한 신약 개발에도 적용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 기간에 Amazon과 같은 e-commerce 시장에 한약제제가 대거 진출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면역력 증강이 주요 관건이었다. 한국에서는 한의협 중심으로 전화를 통한 원격진료의 새로운 장을 열기는 하였으나 중국이나 대만처럼 실질적인 황금 기회로 만들지는 못했다. 아무튼 아이러니하게도 COVID-19은 한의학의 세계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 참고: 連花清瘟 연화청온; 麻杏石甘湯 마행석감탕; 銀翹散 은교산; 淸肺排毒湯 청폐패독탕; 射干麻黃湯 사간마황탕; 五苓散 오령산; 淸冠一號 청관일호; 荊防敗毒散 형방패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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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7~29일 한의협 회관에서 COVID-19 확진자를 대상으로 원격 전화 진료에 참여하였다.



정년, 녹조근정훈장(綠條勤政勳章) 수훈


정년이 2년 남아있던 2021년, 학교 측에 조기 정년을 신청하였다. 2014년 통합의학을 주도하는 한의대를 설립하려고 단국대로 옮겨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에 더 이상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고, 또 앞으로 미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년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나의 인생 계획을 정년에 맞추기보다는 정년을 나의 계획에 맞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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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일, 단국대 총장실에서 녹조근정훈장을 전달받았다. 36년간 대학에서 근무하였다.



Nature의 글


2018년 9월 27일 자 Nature (vol. 561, pp 448-450)에 나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글이 실렸다. 그다음 해인 2019년부터 전통의학 챕터가 포함된 ICD-11이 전 세계 의료계에서 공식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저자 David Cyranoski는 이러한 우리 전통의학의 역사적 진전을 WHO에서 이끌었던 나와 여러 차례 서면 인터뷰했다. 그 해 Nature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글로도 선정되었다.


※ 링크: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18-067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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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Nature 글의 첫 페이지와 그해 연말에 동아사이언스에 소개된 내용



국제동양의학회 ISOM 회장


2020년 12월, 대한한의사협회에서 나에게 국제동양의학회(國際東洋醫學會, International Society of Oriental Medicine: ISOM) 회장직을 제안하였다. 국제동양의학회는 1975년 한의협이 일본과 대만의 한의계 지도층과 연대하여 동양의학의 발전을 목표로 출범시켰으며, 세계 전통의학 분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학회이다. 그러나 세 나라의 협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정작 학회의 중심이 되어야 할 학자들은 들러리만 서 왔다. 그러다 보니 국제동양의학회는 자연스럽게 학계로부터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런 국제동양의학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한편 중국에서는 ISOM보다 늦게 세계침구학회연합회(世界鍼灸學會聯合會, World Federation of Acupuncture and Moxibustion Societies: WFAS)와 세계중의약학회연합회(世界中醫藥學會聯合會, World Federation of Chinese Medicine Societies: WFCMS)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을 통해 중국의 중의학계는 세계 전통의학의 주도권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중국은 WHO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면서 중의학을 세계 전통의학의 중심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한국, 일본, 대만, 미국 등의 전통의학계가 연대해야 한다. 그동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국제동양의학회가 WFAS나 WFCMS에 맞서는 선봉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회장직을 수락하였다.


국제동양의학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2년마다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 (International Congress of Oriental Medicine: ICOM)를 개최하는 것이다. 취임하고서 바로 매달 사무처 관계자들과 줌 미팅을 하면서 차기 대회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COVID-19으로 인해 대회 개최가 두 차례 연기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래서 차라리 이 불안정한 시기를 내부적으로 국제동양의학회의 체질을 개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학회는 학술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를 주도적으로 수행할 조직으로서 각국 학자들 중심의 학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회장단과 이사진, 그들만의 잔치를 종식하고 명실공히 학술조직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였다.


2023년 9월 16~17일, 서울대학교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5년 만에 제20회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자로 대만의 첸왕췐(陳旺全) 박사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 이임하면서 마지막으로 국제동양의학회가 진정한 학술 조직으로 거듭나도록 각국 이사진에게 재차 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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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부터 3년간 국제동양의학회 회장으로서 학회의 체질 개선에 주력하였다. 2023년 9월, 서울대에서 제20회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Emory 의대



2017년 가족들이 미국 애틀랜타로 이주하였다. 대학에서는 나에게 분교 설립과 관련하여 두 차례에 걸쳐 Emory 의대 파견 교수의 기회를 주었다. COVID-19 팬데믹 기간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한편 Emory 의대에서 통합의학센터장을 맡고 있는 Omer Kucuk 교수의 추천으로 Emory 의대 혈액 종양학과 (Dept of Hematology and Medical Ontology) 겸임교수가 되었다. 주요 임무는 학부 강의, 교수 세미나 참석과 통합의학 관련 공동 연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미국 침구사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병원 내 암 환자 진료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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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Emory 대학 학부생 강의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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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ry 의대 Omer Kucuk 교수, Winship Cancer Institute의 Walter Curran 소장과 함께



〈Constitutional Medicine in the East〉 출간


1996년, 이제마 선생의 서거 100주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학으로서 그의 꿈이었던 사상의학의 세계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의수세보원 (Longevity and Life Preservation in Oriental Medicine)을 영역하여 출간했었다. 이는 내가 한의학의 세계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WHO에서 돌아온 2009년에는 ‘WHO 전통의학 표준 용어’에 기초하여 제2판에 해당하는 동의수세보원 (Longevity and Life Preservation in Eastern Medicine)을 출간하였다.


COVID-19 팬데믹 기간이던 2021년에는 주로 미국에 머물면서 세계화에 더 역점을 두고 기존 영역 본의 체제를 전면 수정 개편하여 제3판 동의수세보원 (Constitutional Medicine in the East)를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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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영대조(漢英對照)의 Constitutional Medicine in the East를 출판하였다.



유일한 취미, 아이스하키 지원


나의 유일한 취미는 아이들의 아이스하키 지원이다. 20여 년 전 아들 규하에 이어, 요즘은 외손자인 동하를 돌보고 있다. 2003년 WHO로 떠나기 전에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의무이사와 국가대표팀 주치의로 봉사했었다. 그런 전통이 이어져서 지금도 아이스하키 국대팀 주치의는 한의사가 맡고 있다.


2022년, 5년간의 애틀랜타 생활을 뒤로하고 동하와 서하의 전인(全人) 교육을 위해 보스턴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동하의 아이스하키가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애틀랜타에는 좋은 팀이 없어서 동하가 2021년 시즌에 미국 동남부 유일의 AAA 팀인 Tennessee주 Nashville의 Jr Predators 선수로 뛰었다. 그러나 주말마다 애틀랜타에서 5시간 걸리는 내슈빌을 왕복하면서 이틀은 호텔에 머물러야 하는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2022년 봄, 다행히 동하가 AAA Elite 팀인 Boston Jr Eagles에 선발되면서 보스턴 인근의 Lexington으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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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동하가 속한 Boston Jr Eagles가 미국 최고 리그인 EHF의 23-24시즌 플레이오프 챔피언이 되었다.


동하 외삼촌인 규하는 경희초 3학년에 하키를 시작하였다. 중등 시절에 미국으로 가서 San Jose Jr Sharks 선수로 활약한 다음, 미국 내 아이스하키 최고 명문 Shattuck-St. Mary’s School에 진학하였다. 규하는 아시안 최초 U14 AAA 등록 선수이다. 친구들은 아직도 NHL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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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하여 KAIST 재학 시절, 대전 지역 사회인 아이스하키 선수로 뛰던 모습



Lexington에서


Boston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약 10마일 거리에 위치한 Lexington은 미국 독립전쟁의 총성이 처음 울렸던 역사적인 고장이다.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주민들 교육 수준이 매우 높고 자부심으로 충만한 인구 3만의 자그마한 도시이다. 한인들은 보스턴의 평창동이라고도 한다. 유일의 공립 고교인 Lexington High School 졸업생들이 재작년과 작년 연속해서 노벨화학상과 생리의학상을 받기도 하였다. 또 중국인들이 많아서 이 학교의 중국 학생 비율이 현재 31%이다. 중국 경험이 있으면서 중국어가 가능한 우리 가족에게는 매우 유리한 지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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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achusetts 주 Lexington 다운타운에 있는 미국 독립전쟁의 상징 조형물인 ‘Minuteman (긴급 소집병)’. 집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다.



MCPHS/NESA 특강


23년 2월 Harvard 의대 Vitaly Napadow 교수의 추천으로 MCPHS (Massachusetts College of Pharmacy and Health Sciences) 대학 Worcester 캠퍼스에 있는 한의대 New England School of Acupuncture (NESA)에서 교수와 학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였다. 제목은 “COVID-19 and TRM”.


MCPHS는 1823년 설립된 보스턴 지역의 보건 및 생명과학 분야 명문 사학이다. 1975년 설립된 NESA는 미국 동북부의 대표적인 한의과대학으로 2016년 MCPHS에 합병되었다. 마치 국내 유일의 한의대였던 동양의과대학(東洋醫科大學)이 1965년 경희대학교에 합병된 것과 흡사하다. 앞으로 미국에서는 그와 유사한 사례들이 이어질 것 같다. 이는 미국 내 한의학 교육 및 연구 수준이 상승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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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COVID-19 and TRM”이라는 제목으로 MCPHS/NESA에서 교수와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하였다.



NCCAOM 한의사 시험


애틀랜타에서 시작했던 The National Certification Commission for Acupuncture and Oriental Medicine (NCCAOM) 시험을 렉싱턴으로 이사 온 이듬해인 2023년 3월에 모두 합격하였다. 아마도 최근 합격한 사람들 가운데 최고령일 것 같다. 뉴욕에서 Pacific College of Health and Science (PCHS)를 졸업한 아내 친구의 며느리가 보내준 시험 준비 자료를 기본으로 삼았다. 그 외 이렇다 할만한 정보나 참고 서적이 없어 마치 맨땅에 헤딩하듯 시험 준비를 하였다.


Clean Needle Technique (CNT) 이론과 실기 2과목과 한의학 기초이론 (Foundations of Oriental Medicine: FOM)과 양방의학 (Biomedicine: BIO)은 애틀랜타에서, 침구경혈학 (Acupuncture with Point Location: ACPL)과 한약 (Chinese Herbology: CH) 시험은 렉싱턴에서 합격하였다. 각 과목은 객관식 100문제로 두 시간 반 이내에 풀어야 한다. CNT를 제외한 네 과목 문제의 절반 이상이 실제 임상 케이스를 다루고 있다. 다 풀고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 여부를 알려 준다.


NCCAOM의 문제 은행에 들어 있는 그 문제들은 시험 준비 과정에서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시험을 시작하면서 문제 풀이에 들어가기 직전 응시자들에게 문제 유출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있다. 문제들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듯하다. 국내 한의대 졸업생들도 한의사 국가고시와 더불어 같이 준비해 볼 만하다. NCCAOM 시험은 국내에서도 응시할 수 있고, 그 자격은 유럽과 남미의 국가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해외 진출을 생각한다면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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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한의사 자격을 주관하고 있는 NCCAOM의 한의사 (Diplomate of Oriental Medicine) 자격증. 미국 내 대부분의 주에서 이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Massachusetts 주 침구사 등록


2023년 3월, NCCAOM 한의사 자격을 획득하고서도 개업에 대해서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023년 10월 하버드 의대의 David Lee 교수를 만나면서 Massachusetts 주 침구사 면허를 신청하여 12월 중순에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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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achusetts 주 침구사 자격증. 10여 종의 서류를 접수하고 나서 약 2개월 후 주등록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한약 관련 경력 자료를 제출하면 한약도 처방할 수 있다.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 한의과대학을 졸업한 경우, TOEFL 성적도 제출해야 한다.


대만 출신인 David Lee 교수는 유기화학과 약학 전공으로 Harvard 의대 부속 McLean 병원에서 천연물 유래 신약 개발을 이끌고 있는 학자이다. 2023년 10월 19일 처음 만나던 날, 그분은 나에게 통합의학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州) 침구사 면허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12월 14일 주 면허를 받고 나서 그분 소유 건물에 있는 Massachusetts Integrative Medicine Center에서 진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그분이 1월 초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분은 나를 만날 때마다 “우리의 만남은 God’s will.”이라고 하셨었다. 며칠 동안 나는 그 ‘신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고심했었다. 그러고는 그 ‘신의 뜻’이 내가 미국에서 한의학 세계화의 마무리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그분은 내가 Massachusetts 주 면허를 따도록 격려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고 가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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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ard 의대 McLean 병원의 David Yue-wei Lee 교수님. 2023년 10월 처음 만나 통합의학을 위해 의기투합하고 같이 Massachusetts Integrative Medicine Center 준비 작업을 하시다가 24년 1월 초 갑자기 돌아가셨다.



Massachusetts Integrative Medicine Center (MIMC) 진료


작고하신 이 교수님의 뜻을 이어 MIMC에서의 진료를 준비하고 있다. 침 치료로는 한국에서 유래한 일침(一鍼)과 사암침법(舍岩鍼法)을 위주로 하고, 한약 치료로는 탕약, 연조엑스제와 아마존 등 e-commerce에서 제공하는 한약제제를 활용하려고 한다. 또한 진료와 함께 한국 한의계의 우수한 치료 기술이나 한약제품을 미국에 소개하는 활동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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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Amazon에서 구입하여 한약제제 캡슐을 복용한 위장 경련과 말기 췌장암 환자분이 보내온 카톡 내용. 앞으로 한약은 아마존 등 e-commerce를 통한 구매가 주류를 이룰 것이다. 유효, 안전, 저렴, 편리하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지난 일 년여에 걸쳐 ‘나의 세계화 노트’를 쓰면서 반세기 전 한의학 입문 시절로부터 현재 진행형인 미국 한의사 생활까지 회고, 정리할 기회를 가졌다.


이제 ‘한의학의 세계화’는 거의 끝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 마지막 현장은 미국이다. COVID-19 팬데믹을 겪으면서 특이하다고 할 만한 변화로 Amazon을 위시한 e-commerce 시장에 한약제제가 대거 진출하였다. 현재 약 500개 처방에 해당하는 1,600여 한약제제가 유통되고 있다. 그중에 간담실화상염증(肝膽實火上炎證)/간경습열하주증(肝經濕熱下注證)에 사용되는 용담사간탕(龍膽瀉肝湯)은 무려 29종의 한약제품이 아마존에 공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약제제가 약이 아닌 건강보조식품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다. 한의사의 전망과 기대와는 무관하게 생산자와 소비자의 요구가 주도한 미국 내 한약 시장의 변화이다. 아무튼 한약제제는 유효하고 안전하며 저렴하고 편이해야 한다는 의료의 기본 요건을 대체로 충족시키고 있다.


COVID-19이라고 하는 전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첨단 IT기업을 만나 미국에서 한약이 급속하게 확장 보급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한의학 세계화의 마감을 예고하고 있다. 침은 이미 미국 내 주류 의학의 한 부분이 되어 세계화의 과정을 마쳤다. 한의학 세계화의 성공적 마무리는 양의학과 더불어 통합의학으로서 전 인류를 위한 의료의 한 축이 되는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한의학의 세계화’는 나의 비전이었다. 한의학을 온 인류와 함께 공유하도록 추동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그를 향한 기회들이 나에게 주어졌고 나는 때로 길을 만들어 가면서 최선을 다했다. 영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저술, 수차례에 걸친 해외 대학 방문 교수 근무, 한의대와 한의연에서의 세계화 작업, 무엇보다도 WHO에 근무하면서 일궈낸 전통의학 표준 용어와 전통의학의 ICD-11 진입, 국제 표준 경혈 위치 제정, 전통의학 임상진료지침 개발 등 한의학의 세계화에 빛나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 세계화의 끝을 보면서 무한한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


이제는 허준을 꿈꾸던 한의대 입학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세계화의 마무리가 될 미국에서의 한의 진료를 시동하고 있다.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 세계의 의학 중심 보스턴에서 한의학이 지닌 가치를 환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누려고 한다.


끝으로 한의학의 세계화를 향한 내 삶의 궤적과 생각을 정리해서 KMCRIC에 소개할 기회를 열어준 이향숙 센터장과 신지영 박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최승훈 교수의 나의 세계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