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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기 전에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도시 크라쿠프 (Krakow), 하지만 내게만 낯설었을 뿐 이미 이곳은 수백 년 동안 폴란드의 수도였고, 폴란드 최고의 관광지로서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 크라쿠프가 우리에게 낯설지만 그들은 이미 익숙하듯, 중의학은 이미 유럽인들에게 익숙하고 한국 한의학은 오히려 낯설다. 한의학 세계화 사업은 매우 늦은 감이 있고, 몇몇 한의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이 글은 읽는 누구도 이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 크라쿠프까지 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작은 경험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정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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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회는 독일에 있으면서 유럽 내의 한의학 관련 모임에 대한 정보를 얻고, 관련된 사람들과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에 즉흥적으로 참가 신청을 하게 되었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학회 연자 구성이나 내용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의 학술 발표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오랜만에 발표에 대한 부담 없이 단순 참석만 하는 학회였기 때문에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다. 본 학회는 폴란드중의학회 (Polish Society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로 유럽 내에 활동하는 중의사들과 유럽에서 중의학을 배워 임상에서 적용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폴란드중의학회 www.tcm-kongres.krakow.pl


학회는 첫날 기조강연과 중의학과 근거중심의학, 임상에서 중의학, 예방에서 중의학 3개의 세션으로 나눠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논문 발표를 통한 연구자라기보다는 임상에서 진료 및 교육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라 평소 알던 사람들이 없었기에, 오히려 새로운 마음으로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1641년, 이곳 야기엘로니안 대학 (Jagiellonian University) 졸업생인 Michal Piotr Boym이 중국에 선교사로 방문하여 명나라 마지막 황실에서 중국 의학 (Chinese medicine)을 배운 것이 유럽인 최초로 중국 의학의 지식을 유럽에 전파한 것으로 여겨진다. 1830년에 Jozef Domaszewski가 침술에 대한 논문을 제출한 것이 유럽에서 중국 의학에 관한 처음 10개의 논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번 학회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중의학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3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서 행사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럽중의학회 (European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Association, ETCMA)의 주요 인사들이 연자로 초청되어 강연을 하였고, 주로 폴란드에서 중의학을 배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어 영어-폴란드어 통역이 곁들여지기도 하였다. 유럽중의학회는 2001년 설립되어 유럽 내 19개국이 참여하고 있고, 14,000명 정도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마다 의료 시스템이 상이하고, 중의학이 교육 및 제도적으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가운데에도, 이들은 치료의 현장에 녹아들어 있고 이미 어느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중의학 세계화 공정은 임상의 진출과 국제교육 사업으로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이제는 중국 중의사가 아닌 푸른 눈의 서양인 중의사들과 함께 유럽의 중의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럽중의학회 http://www.etc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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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의사면서 이곳 폴란드에서 중의학을 공부한 Bartosz Chmielnicki의 “EBM in TCM research – problems and shadows”라는 발표에서 본인은 의사이고 주변 동료들에게 중의학을 사용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EBM은 중요하고 이를 위해 “www.evidencebasedacupuncture.org” 를 운영하여 현재의 의학적 근거 수준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중의학을 근거중심의학의 잣대로만 보면 본질적인 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다며, 학술교류 차원에서 요구하는 수준과 임상 실제에서 필요한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마지막 슬라이드에서 “I don’t believe in acupuncture, but I know it works.”라 하며, 침 치료는 종교와 같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말이 인상 깊었다.


전반적으로 이곳의 발표가 학술지를 통해 소개된 아주 정교한 연구들에 기반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현재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의학을 전공한 중국 중의사, 그리고 이들에게 혹은 중국에서 배워 유럽에서 중의학을 적용하고 있는 유럽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쉬는 시간에 유럽중의학회 핵심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간에 이곳에 중성약을 공급하는 베이징 동인당의 부사장을 보고 그와 인사를 나누러 가는 모습을 보니, 이곳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역시 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에게 중국의 중의학은 그들의 모태가 되고,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2018년 세계침구학회 (World Federation of Acupuncture-Moxibustion Societies, WFAS)는 파리에서 개최되고, 이곳에서 침술이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 8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행사 “World Acupuncture Day”를 진행한다고 한다. 올해는 일본 츠쿠바에서, 내년은 한국의 대구에서 세계침구학회가 개최된다. 중국 침구사들이 중심이 된 전 세계 침구 의료 시스템 속에서 한국의 침구 의학은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고민된다.
2016 세계침구학회 http://wfasjapan2016.org


유럽 내 한의학 연구에 초점을 맞춘다면, 내년 3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되는 European Society of Integrative Medicine & International Congress of Complementary Medicine Research가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독일 로텐부르그에서 개최되는 중의학 학회는 내년에 이미 48주년을 맞이한다. 만일 유럽 내에 한의학 진출을 생각하는 임상 한의사라면, 내년 5월에 개최되는 로텐부르그 학회에서 한 번쯤 그들의 눈에 비친 한의학은 어떤 모습일지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10th ECIM & 12th ICCMR Congress https://www.ecim-iccmr.org/2017
독일 로텐부르그 중의학 학회 http://www.tcm-kongress.de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옛 수도로서 중세 유럽의 모습이 잘 간직된 곳 중의 하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에도 독일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폭격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도시의 올드타운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그들을 위한 레스토랑과 바가 즐비하다. 주변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비엘리츠카 (Wieliczka) 소금 광산이 있어 갱도의 길이만 300k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와 역사적 의미에 유네스코에 지정되기도 하였다. 학회장은 시내 호텔과 근처 공자학원에서 진행되었지만, 학회 만찬은 버스를 대절해서 이곳 소금광산을 방문하고 그 안의 레스토랑에서 진행되어 매우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학회장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많은 교류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독일 뮌헨의 침구사로 활동하는 Sarah Theiss를 통해, 독일의 침구사의 여러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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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은 근처 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아우슈비츠 (폴란드어로 오쉬비엥침 Oswiecim)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이곳에서만 15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처형한 가스실과 시신 소각장 등을 보존하고 있어 역사의 비극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둘러보는 동안 내내 많은 이들의 얼굴에 애잔함이 가득했고, 이곳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목소리에도 깊은 슬픔이 녹아 있는 듯하다. 이미 겨울이 되어버린 이곳에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둘러 보는 내내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이곳에서 안타깝게 생명을 다한 이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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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머무는 동안 역사적 실타래를 함께하고 있는 폴란드 크라쿠프 및 오쉬비엥침을 방문하면서 시대의 아픔은 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아픔이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임을 다시 한 번 가슴속에 새겨본다.



© KMCRIC 학회 참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