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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약속이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후손인 지인이 류 선생의 기제사에 같이 다녀오자고 했던 것이. 6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러 갔다. 한 집안의 기제사는 외부인에게 열려 있었고, 준비부터 끝맺음까지 모든 과정이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3일간의 준비

약속을 한 이후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제안을 건넨 지인도 바빴고, 타이밍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코로나19 시국까지 겹치면서 누군가와 사람이 모이는 곳을 간다는 것도 꺼려졌다. 2년에 걸친 코로나19 시국이 잦아들면서 올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일가가 다시 모인다고 했다. 이번에는 꼭 가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5월 말부터 밀려드는 일정을 하나씩 쳐내며 간신히 스케줄을 확정 지었다. 안산에서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함께할 일행을 태워 다시 안동으로 향하는 길. 다소 빡빡했지만, 그간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기대가 차올랐다.

서애 선생의 기제사에 참석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 제사상에 오르는 과자 때문이었다. ‘중개(仲介)’라고 부르는 조선시대의 유밀과다. 서애 선생이 생전에 그 과자를 좋아하셨고, 그래서 제사상에 올라간다고 했다. 조선시대의 과자를 만드는 과정부터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는데, 출발 직전에 연락이 왔다.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서 중개를 만들기로 했다고. 그 과자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기에 이번에도 못 가는 건가 싶었지만, 강행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다. 과자도 과자지만 제사 자체가 흔히 접할 게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예전 같으면 하회마을 가는 길도 제법 험했을 테다. 지금처럼 도로가 잘 정비되기 전에는 안동 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8~9시간은 각오해야 했다는 추억담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참 좋아졌다. 서울에서 출발해도 3시 반, 쉬엄쉬엄 내려가면 5시간이면 족하다. 종일 이어진 촬영을 마치고 밤 운전을 해서 내려가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 밤늦은 시간에 하회마을에 들어섰다. 종손께서는 그 늦은 시간까지 잠을 미루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쿨하게, “여기서 자면 돼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이날이 제사를 준비하는 이틀째 날이다. 오전부터 우리가 묵었던 민박 옆 충효당이 시끌시끌했다. 이미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아 전을 부치고 떡을 빚고 있었다. 하회마을을 몇 번 다녀와서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시끌벅적할 만큼 사람 사는 풍경을 보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수백 년을 이어온 류씨 집안의 종갓집에서. 이런 경험도 신선했다. 제사상에 오를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촬영하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아, 예전에도 이런 풍경이었겠구나. 입은 옷은 달라지고 사람들의 머리 스타일이며 말투도 예전과는 다르겠지만 이 분주한 모습이 예전 하회마을의 분위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다.

외부인에게도 열린 서애 선생의 제사

하회마을이라고 하면 한국의 전통적인 풍경을 가장 잘 간직한 마을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건 비단 한국인들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다. 이미 세계적으로도 이 마을은 잘 알려져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기까지 하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회마을을 찾은 것도 여기가 한국을 대표하는 민속 마을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류씨 집안의 종갓집인 충효당에도 들렀다가 갔다. 충효당은 그만큼 하회마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마을 자체도 아름답다. 낙동강이 감입곡류로 크게 휘어 돌아가는 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터는 고르고 물이 휘돌아 나가며 그 밖으로 산이 감싸고 있어 사람이 살기에 이만큼 좋은 자리도 흔치 않다. 이 마을이 앉은 자리를 한눈에 담고 싶다면 부용대에 오르면 된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 풍광이 눈 앞에 펼쳐지는 자리가 부용대다. 그곳에서 보는 하회마을은 풍요로운 조선의 모습을 그림처럼 드러내 놓는다.

이번에는 목적이 다르니, 부용대에서 보는 하회마을은 개인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제사가 진행되는 일련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상에 오를 음식의 준비가 끝나면 몇 시간의 쉴 틈이 생긴다. 그리고 사위가 어두워지는 저녁 8시쯤이 되면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갓집인 충효당이 다시 분주해진다. 남자들은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여자들은 주방에서 상에 오를 고임을 준비한다. 창고 안에 넣어두었던 상을 꺼내 닦고, 어른들은 제문을 써서 고이 잘 접어 둔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 싶었더니 회의가 소집됐다. 집안의 모든 남자가 안쪽에 모여 앉아 제사를 어떻게 지낼 것인지를 논한다. 이 자리에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다. 흘러나오는 소리로 어떤 얘기가 오가는지 짐작할 뿐이다.

류씨 집안의 제사지만, 서애 류성룡 선생의 기제사는 외부인에게도 열려 있다. 우리가 제사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날 제사를 지낸다는 걸 알고 있던 사람들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2년 만에 집안 일가친척이 모두 모인 제사여서 마당 안쪽까지 발을 디디기는 어렵다. 제사가 시작되기 직전, 마당에 도열한 후손의 수만 어림잡아 40~50명. 제사상 앞에 줄지어 선 이만 10여 명이 훌쩍 넘는다.

유명한 조선의 인물이라고 해서 제사 자체가 여느 집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강신부터 초헌, 아헌, 종헌으로 이어지는 순서. 메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는 계반삽시라든가 첨작을 하는 일련의 행위는 대동소이하다. 제사의 형식은 기본만 지키면 된다는 걸 다시 느낀다.

하회마을의 진가

형식보다는 분위기였다. 흰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늘어선 수많은 후손이 순서에 맞춰 예를 갖추는 모습이 장관 중 장관이다. 중국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제사의 문화. 한국식으로 스며든 그 문화의 정점을 만나는 느낌이다. 엄숙하지만 공기가 너무 무겁지 않다. 도리어 후손들이 서애 선생에게 가진 존경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듯했다. 제사가 진행되는 일련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쩌면 하회마을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한 하회마을의 진가는 마을의 주요한 행사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 이런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조선 문화의 정수를 어디에서 또 볼 수 있을까. 일부러 찾아보려고 해도 이제는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제사가 다른 집안과 다른 면이 없는 건 아니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제사상의 중심을 차지하는 ‘적’이다. 적은 고기를 양념해서 구운 음식을 지칭하는데, 보통은 소고기, 닭고기, 구운 생선이 올라간다. 그런데 서애 선생의 제사상에는 무려 13종의 생선과 고기를 켜켜이 쌓아서 준비한다. 무엇보다 생선의 종류가 무척 많다. 북어, 고등어, 상어, 방어, 가자미, 가오리, 문어, 소고기, 닭 등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외에 잡과편까지 더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동여맨다. 이를 류씨 집안에서는 ‘도적’이라고 부른다. 북어 위에 말린 문어 다리와 말린 홍합을 꿰어 따로 올리는 것도 이색적이다.

과일은 사과, 배, 참회, 수박, 포도, 앵두, 잣 등 11종을 준비했다. 그리고 중요한 다른 한 가지는 바로 탕. 일반적인 제사상에는 많아야 3탕이 오르지만 서애 선생의 상에는 5종의 탕을 올린다. 이는 서애 선생이 영의정 출신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과거에는 황제의 제사상에 9탕, 임금의 상에 7탕, 영의정의 상에는 5탕을 올렸다고 한다. 탕은 적과 같은 다른 음식과 달리 일일이 따로 끓여야 한다는 점에서 무척 번거롭다. 그래서 5탕을 올린다는 건 그만큼 그의 지위가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면모다.

500년을 이어온 유밀과

류씨 집안이 이 제사를 위해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역시 ‘중개’다. 이 과자는 꿀을 넣어 만드는 유밀과다. 과거에는 밀가루가 매우 귀했다. 더구나 반죽에 더하는 꿀 역시 귀한 몸. 귀하고 귀한 재료를 더해 구워내는 과자였던 셈이다. 원래는 궁중음식인 ‘중박계(中博桂)’인데, 궁중에서 이것을 드신 서애 선생이 집에서 만들어 먹었고, 그것을 ‘중개’라 불렀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이는 왕이 내리지 않는 이상 아무나 먹기 어려웠을 거라는 게 함께 제사에 참여했던 음식문화 전문가의 설명도 있었다. 류씨 일가의 설명으로는 서애 선생이 생전에 이 과자를 좋아했다는 것을 안 선조가 그의 별세 이후 “제사에 중개를 제수로 올리라”라고 전해 왔다고. 또 강릉부에서 그의 장례에 쓰라고 중개 77개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고도 했다.

이런 중개는 재료도 고급이지만, 반죽부터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밀가루에 막걸리를 더해 반죽을 시작하는데, 한참을 치대다가 꿀을 더한다. 이렇게 하면 반죽이 훨씬 단단해지는데, 반죽을 치대는 사람이 온 힘을 다해야만 간신히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대대로 류씨 집안의 종부는 제삿날 중개의 반죽을 치다가 기운을 다 빼버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금의 종부는 집안의 어른을 졸라 반죽기를 샀는데, 이마저도 꿀이 들어가니 반죽이 너무 단단해져서 도리어 기계가 고장이 나버렸다며 웃는다.

어렵게 만든 중개 반죽은 직사각형으로 길게 잘라서 기름에 지져낸다. 중개가 완성되면 제기 위에 중개 80개를 20단으로 쌓는다. 마지막에는 제일 큰 중개 2개를 덮어 정사각형 모양으로 마무리한다. 이렇게 만든 중개는 제사상의 가장 앞줄 정중앙에 진설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제사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상으로는 약 30분 남짓. 그리고 나면 제사를 찾아온 일반인을 불러 제사상을 보여주고 간단히 설명도 해 준다. 음복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함께한다. 기다렸던 중개를 맛볼 시간. 한입 베어 물었다. 지금의 과자에 비하면 바삭하기보다 쫀듯하게 반죽이 떨어지는 느낌. 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밀가루의 맛도 꽤 느껴진다. 입안에 퍼지는 건 담백하고도 단 특유의 맛이다. 이는 밀가루가 가진 단맛도 있지만, 마지막 반죽에 더한 꿀의 힘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 매력적인 맛이다. 오묘하다. 왜 서애 선생이 이 과자를 좋아했는지 알 것도 같다.

자정에 시작한 제사가 끝나고 음복까지 마치니 이미 시간은 새벽 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3일에 걸쳐 온 집안과 마을이 합심해서 준비한 제사가 끝이 났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나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땅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한국의 문화를 온전히 지켜본 느낌. 제사라는 행위가 이 시대에는 귀찮은 연례행사처럼 여겨지지만, 한 번이라도 서애 선생의 제사를 본 사람이라면 이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듯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꼭 한 번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제사를 참관해 보라고 당부하고 싶은 이유다.

꿀은 성질이 따뜻하다. 비·위장을 보해서 기운을 북돋아 주고 몸 안의 기를 조화롭게 만들어 오장을 편안하게 한다. 피부에도 좋아서 얼굴을 젊게 유지해 준다고도 한다. 해독 작용과 살균 작용이 있어 오래 놔둬도 잘 썩지 않는다. 또 통증 완화, 피로 회복, 간장 보호 등의 효능이 있다. 신경 안정 작용에 탁월하여 평소 잘 놀라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불면증, 신경과민, 정서불안 등에도 효과가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