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CRIC

한성일보 1950년 4월 29일 자에 실린 행림서원의 광고가 있다. ‘의서계의 왕전(王殿)’이라니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이라는 뜻이 아닌가. 지금이나 옛날이나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의 허풍은 알아줘야 한다. 그다음에 나오는 ‘행림서원 동일보조로 재발족!’이라는 문구를 저 광고를 처음 볼 때는 별 의미 없이 흘렸다. 발족이란 어떤 조직체가 새로 만들어진 것인데, 재발족이라니 다시 출발한다는 뜻이다.

다음 줄에 주소가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2가 21의 29이다. 괄호 안에는 ‘여의대 넘어서 혜화동 버스정류장 앞’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여의대는 혜화동에 있던 서울여자의과대학이다. 나는 행림서원이 안국동 157번지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으니, ‘안국동에서 명륜동으로 옮겨서 새로 영업한다는 광고로구나.’ 하고 넘겼다. 안국동과 명륜동은 직선거리로는 그리 멀지는 않은데, 중간에 창덕궁과 종묘가 막고 있어서 영 먼 동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니 말이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지난 5편의 글에서 행림서원의 전신이 자성당 서점인 것을 알았다. 1933년 경성시가도 중에서 광화문 지역 부분에 자성당 서점과 행림서원의 주소지를 찍어보니 주소를 글로만 보는 것보다 한눈에 이해하기가 쉽다.

자성당 서점과 행림서원의 주소 표시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주소로는 서로 다르지만, ① 경운동 91, ③ 관훈동 112, ④ 안국동 157, ⑥ 재동 112-1, ⑦ 경운동 96-2가 거의 같은 동네로 느껴질 정도로 몰려 있고, 상대적으로 ② 광화문통 38은 좀 외따로 있다. 예전에 육조거리였던 이곳은 행정지명이 1914년 4월 1일에 광화문통으로 바뀌었다. 1927년 12월 25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자성당 서점 광고 를 보면 광화문통에서 자성당 서점은 순사 교습소 앞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찰관 교육기관으로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인 ‘조선총독부 경찰관 강습소’가 있었고 지방에는 ‘순사 교습소’가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것은 경기도 순사 교습소이다.

이렇게 보면 명륜동 2가는 자성당 서점과 행림서원이 있던 원래 근거지에서 멀리 벗어난 느낌인 것이다.

이태호 바람

행파 선생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관훈동 130번지에, 장녀는 광화문통 38번지에 출생 신고가 되었고, 차남은 광화문통 37번지에, 차녀는 안국동 157번지에 출생 신고를 하였다. 자녀들의 출생 신고지가 마치 영업장소를 따라다닌 것 같다.

선생은 아마도 해방 후 정부가 천일염전 민간개발을 허용했을 무렵에, 고향인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내려갔을 거로 추정한다. 물론 서울 집은 그대로 두었고 행림서원에는 비서도 있고 직원도 있었다. 고향의 간척지 등 바다와 가까운 땅을 매입하고 염전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흐른 뒤에는 천일염을 생산했다.

선생의 손녀인 평민사 이정옥 대표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동네에서는 소금을 만드는데 좋은 바람이 불면 “이태호 바람이 분다.”라고 했다니, 당시 우정면 지역에서 행파 선생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장남인 이성모는 1949년에 우정면 운평리 출신인 송영산과 결혼한다. 이성모는 부친을 도와 염전을 관리하고 있었다. 장녀인 인옥, 장남인 갑섭, 2녀인 정옥의 출생 신고지가 모두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이다. 이정옥 대표의 출생 신고일이 1953년 1월 1일이니 이성모의 가족은 한국전쟁 중에 쭉 우정면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후에 3녀 현옥, 4녀 신옥, 차남 을섭의 출생 신고지는 모두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162번지이다. 한국전쟁 후에 안국동으로 이주한 것이다.

재발족

2편에서 밝힌 것처럼, 행파 선생은 석천리에 있던 시기에 중풍이 생긴다. 하지만 이때는 병세가 그리 중하지는 않았다. 질병을 돌보아 준 박병곤 선생에게 2,500매나 되는 고금실험방 원고를 직접 보여주었다고 하니 말이다. 행파 선생은 염전업의 호황기가 점차 시들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우정면 시기에 행파 선생은 출판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소금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행림서원은 1945년에 최규헌의 『소아의방』을 내고, 1949년에 전원배가 번역한 헤겔의 『논리학』을 출판할 때까지 기록이 없다. 그리고 1950년에 이봉희의 『천일제염공업』을 펴냈다. 이 책의 광고가 3월 11일 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그리고 이어서 한성일보 1950년 4월 29일 자에서 행림서원의 재발족을 알린다.

행파 선생은 아들 가족은 우정면에 두고 서울로 올라와 행림서원의 안국동 시대를 접고 새롭게 명륜동 시대를 여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런데 두 달 후의 일이라도 인간이 어찌 그것을 미리 알 수 있겠는가. 서울에서 멀지도 않은 38선을 넘는 한국전쟁이 터진다. 선생은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전쟁 중에 서울에 있던 부친을 위해 장남 이성모가 화성에서 서울까지 자전거에 쌀을 싣고 그 길을 다녔다고 한다.

선생이 1959년에 나온 『사암도인침구요결』 서언에 남긴 바에 의하면, 중풍이 1953년에 재발한다. 이번에는 팔다리가 마비되는 중증이다. 이후에는 거의 누워서 지냈다. 며느리 송영산이 긴 병시중을 했다.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으로 삶이 뒤틀리고 꿈이 좌절된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렇게 한국전쟁이 행파 선생의 ‘행림서원 재발족’ 꿈을 포탄처럼 날려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 행림서원은 원래 근거지로 복귀한다.

© 이강재 원장과 떠나는 8체질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