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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7년 봄에 8체질의학에 입문했다. 나를 8체질로 이끈 동문 1년 선배는, 동국한방병원 침구과에서 1996년 1월 29일에 만든 「8체질 침법 정리집」이라는 제목으로 제본된 얇은 자료집을 한 권 주었다. 2000년이 저물 때까지 이것보다 더 수준이 높은 자료는 만나지 못했다. 젊은 한의사들을 중심으로 체질침에 대한 관심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이보다 좀 더 나은 자료들이 있었겠지만, 그것들은 개개인의 진료실에 숨겨져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짐작한다. 나이 먹은 선배들이 비방을 감춰두듯이 말이다. 8체질론과 체질침 공부는 무척 흥미롭고 또 재미있었지만, 그에 따른 갈증을 해소해 줄 자료를 만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2001년 4월에 도메인 Onestep8.com을 등록하고, 5월에 누구에게나 공개된 8체질게시판을 열었다. 나와 같은 어려움에 직면한 동료들이 분명히 있을 거로 생각했다. ‘자료의 공개와 공유’ 이것이 Onestep8.com을 열던 나의 초심이다. 2002년 3월에는 서버를 옮기면서 한의사와 한의대 학생만을 위한 커뮤니티로 개편했다. Onestep8.com 개설자란 타이틀을 갖게 되니 각지에서 자료들이 도착했다. 커뮤니티의 게시판에도 내 메일함에도 많은 자료가 쌓여갔다. 나는 그 자료들을 선별해서 다시 가공하고 정리해서 회원들에게 공개했다.

2002년 9월부터 12월까지 신탄진에 있는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의무실에 근무하면서 사원 기숙사에서 살았다. 방에는 TV가 없었다. 이 4개월이 8체질의학에 입문한 후 가장 집약적으로 공부하고 자료를 정리한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면서 8체질의학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권도원 선생은 체질침과 관련한 논문을 몇 편 발표하고 대중을 위한 잡지에 기고하고 강연을 했지만, 자신의 학문체계를 정리한 저술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 7일에 이런 자료집을 혼자 제작해서 친한 동료들에게 돌렸다. 전체 237쪽 분량이다.

책은 권력이다

나는 권력의 실체나 권력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글을 쓸 때도 ‘권력’을 넣어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2007년 7월에 주석원이 『8체질의학의 원리』를 펴냈다. 이 책이 나를 자극하였으므로, 우선 ‘주석원이 지은 『8체질의학의 원리』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A4 54쪽짜리 긴 소감문을 썼다. 그것을 주원장한의원과 통나무출판사 그리고 권도원 선생에게 보냈다. 그러다가 2009년이 되어 어떤 계기로 ‘책이 권력’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내가 주석원의 책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했던 것도 그의 책이 권력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입문하고 11년간 자료를 모았다. 책을 써야 한다는 의지를 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8체질론과 8체질의학에서 쓰이는 기본적인 용어와 개념을 해설하는 책이라는 콘셉트로 기획안을 만들었다. 의학책이라면 막연하게 행림서원이라는 생각을 오래 품고 있었다. 그래서 2009년 3월 25일에 등기우편으로 종로 5가 행림서원의 이갑섭 사장에게 기획안을 보냈다. 그랬더니 이갑섭 사장이 4월 1일 당일 특급 우편으로 만나자고 답신했다. 4월 9일 오후 3시에 행림서원을 방문하여 뒷골목에 있는 커피숍에서 이갑섭 사장을 만났다.

1) 8체질론 관련 전문 서적의 출간 필요성, 2) 이갑섭 사장이 권도원 선생을 방문하여 책 출간을 권유했으나 응답받지 못한 일, 3) 기존에 나온 8체질론 관련 책들에 대한 의견 교환, 4) 행림출판이 추진하고 있는 한국한의학연구원과 연계한 사업에 대한 소개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로 계약서 교환, 원고 작성 등의 일들이 별 탈 없이 진행되어 최종 원고를 5월 26일에 CD로 전달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5월 18일, 최종 원고를 건네기 전에 권도원 선생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내가 준비한 원고가 있고, 행림서원과의 작업 사항, 출판 예정 시기에 대한 내용까지, 제선한의원의 부원장이던 김창근에게 전달해서 권도원 선생께도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제선한의원과 행림서원의료기의 불화 운운하면서 권도원 선생이 출판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 너무 낙담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에게 권도원 선생은 신(神) 이었다. 그렇게 돌연 출판 작업이 중단되었고 6월, 7월, 8월, 9월 여러 생각과 여러 시도, 많은 좌절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기간에도 나를 지배한 화두는 ‘책은 권력이다.’였다.

지기지인 지인치인

내가 8체질론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알아서 그것을 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깨달음의 원천은 권도원 선생의 말씀인 ‘지체질이지천명(知體質而知天命)’이다. 이 구절을 내가 이해한 대로 표현한 셈이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라면, 모름지기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람에 대해 알아야 비로소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지기지인(知己知人) 지인치인(知人治人)’이다.

내가 흥미 있는 과제를 공부하고 궁리하고 이해하고 소화하고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그 글들이 모이면 책으로 엮는 일은, 그 과제가 체질론과 체질의학이라면 언제든지 내게 재미있고 흥겨운 일이다. 내가 책을 내려는 것은 이런 나의 체질론적 삶의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4개월간 반복해서 생각해도 결론이 다르지 않았다. 원고를 출력해서 권도원 선생의 댁으로 보냈다. 권도원 선생이 내 근무처로 전화를 직접 하셨다. “한번 만납시다.” 2009년 10월 6일 오후 1시에 제선한의원으로 갔고 근처 한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은 된장찌개를 드시고 나는 갈비탕을 먹었다.

권도원 선생은 내가 서문을 부탁하자 완곡하게 거절했다. 2007년에 김용옥 선생이 주석원을 대신해서 와서 서문을 부탁했지만, 그때도 거절했다고 했다. “창근이도 책을 낼 생각인가 본데” 거기에도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 2007년에 허경구 전 의원을 만났을 때, 권도원 선생이 『8체질건강법』에 서문을 써준 일을 크게 후회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선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출판을 반대한 장본인은 결국 권도원 선생이라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선생의 저작 중에서 인용된 것이 많은 ‘제1부 ECM 200 Items’ 원고를 승인해 주셨다. 하지만 권도원 선생으로서는 아마도 마지못한 승인이었을 것이다. 권도원 선생은 2007년에 내 소감문을 읽고, 안덕균 전 경희한의대 교수와 허경구 전 의원 앞에서 나를 “지금까지 만나고 알고 있던 한의사 중에서 8체질론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가했었다니 말이다. 인정은 했지만, 책을 내는 것은 막고 싶은 이중적인 태도 말이다. 정작 창시자인 자신에게는 책이라는 권력이 없지 않은가.

『한의신문』 제1687호 신간 소개 2009. 12. 3.

북디자이너 노승우

책은 2009년 11월 20일에 나왔다. 책을 제선한의원에도 보내고, 미국에 있는 권도원 선생의 차남인 권우준 씨에게도 보냈다. 12월 2일에 권도원 선생이 책을 잘 받았다며 전화를 하시고 “책을 잘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권우준 씨의 평은 “오랜 준비와 정성이 충분히 보이는 책”이었다.

이강재 엮음, 『학습 8체질의학』 행림서원 2009. 11. 20.

표지 디자인 전순원 / 본문 디자인 노승우

책 편집을 맡았던 북디자이너 노승우 씨와는 서로 동갑인데, 8체질 책 작업이 처음이라 서툰 점도 많았고 거기에 욕심이 자꾸 생겨서 너무 까칠하게 대했다. 이후에 다른 책 일로 또 충돌이 생겼는데 화해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모두 내 탓이다. 깊이 반성한다. 이 책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쓴 것은 노승우 씨에게 이곳을 통해서 이렇게 사과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 이강재 원장과 떠나는 8체질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