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지혁
[미국 통합의료연구소]

한국 한의학의 보건의료적 가치를 동시대적, 세계적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혁신하고, 이와 관련하여 한의사들이 미래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의사 박지혁 프로필

Collaboration, 협력의 원리

 

미국은 원래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그 넓은 영토가 마치 각각 다른 나라처럼 주별로 서로 다른 법의 적용을 받기에 단순히 ‘미국에서는 이러하다’라고 하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일하고 있는 New York City는 진정 다양성의 천국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뉴욕시는 가히 세계의 수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도시에 전 세계가 극단적으로 집약되어 있다는 감흥을 줍니다. 지구 곳곳에서 온 여행객들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현지인들 또한 제각각의 글로벌한 경로를 통해 뉴욕시에 자리 잡고 살고 있습니다. 뉴욕시 안에서 전 세계 어느 나라든 만날 수 있으며, UN 본부 또한 맨하탄 미드타운 이스트 지역에 있습니다. 사실 제가 미국 진출을 결심한 이후 활동무대를 줄곧 뉴욕 지역으로 염두에 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다양성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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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알게 된 뉴욕의 다양성은 사고방식에 있어서 어떤 충격적인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도시 안에서는 그 누구도 서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다름이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미국땅임에도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닐 정도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출신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조율하며 뒤섞여 살고 있는 이 도시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오는 동안 상식이란 이름으로 당연시해왔던 저의 많은 고정관념들을 벗어 던지게 해주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잡종이 언제나 순종에 비해 우세하다는 이치입니다. 유전학에서 자가교배는 필연적으로 열성인자를 발현하게 된다는 바로 그 원리입니다. 사회적 협력에서 소위 열성인자의 발현을 피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정확히 인식하되 협력을 위해 필요한 지점이 있다면 그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다른 점들이 있다고 배척하다가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는 협력을 시작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질감이 강한 작은 사회에서는 다른 점이 유난스럽게 부각되고, 같은 점은 의무적이며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이질적이고 큰 사회에서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당연히 받아들일 일이고, 같은 점은 협력의 시작이 됩니다. 이를 적용하여 예를 들자면, 한의학에서 특징적인 체질이론은 다양한 인종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생명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한국의 한민족 내에서 사람마다 특징적인 패턴을 발견하는 방법론으로 작은 사회에서 발전되기 쉬운 사고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또한 한국의 의대와 한의대에서 교육하고 있는 학문적인 내용에서도, 의학이 갖는 많은 공통점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각자 다른 부분만을 중요시하거나 부각하는 것으로 학문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면, 이는 작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순수 혈통의 강조와 유사한 편협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 과학 분석을 사회학에 도입하여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같은 무리 내의 강한 연결과 무리들 간의 약한 연결이 존재하는데, 약한 연결이 많을수록 전체 네트워크는 급격하게 서로 가까워지고 또한 견고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마당발로 비유되는 허브(Hub)에 의하여 무리와 무리를 연결하는 지름길이 많을 때 가능해집니다. 항상 만나는 친한 사람들이나 배경이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 있을 경우 그 사회는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기 어렵고 또한 많은 외부적 충격에 취약하다는 의미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도 합니다. 이는 사회적 협력의 일반론에서 눈여겨볼 만한 과학적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일반적인 소도시를 지나가다 보면 의료기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러한 형태를 광범위하게 multidisciplinary center, 즉 다학제 센터 모델이라 부르는데, 예를 들어 내과 의사, 재활의학과 의사, 물리치료사, 카이로프락터, 아큐펑처리스트, 마사지 테라피스트 등 서로 다른 오너의 진료실이 한 건물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모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중 한 오너가 전체 공간을 리스하고 다른 의료인들이 각자의 공간을 서브리스하는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며, 요일마다 근무하는 의료인들이 다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통합의료 시스템 이전의 협력 단계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병원급의 동서협진 모델도 이와 유사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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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통합의료는 통합의학과 다른 의미의 개념입니다. 두 개념이 혼용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으나, 전문적인 관점에서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통합적인 의료(healthcare)가 다양한 의료직종들이 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최적의 팀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통합의학은 의학(medicine)의 한 사조로서 개별 환자를 중심으로 몸, 마음, 영혼을 모두 고려하는 전인적인 진료를 하되 근거기반 연구를 통하여 동서양의 치료방법론을 통합한다는 의미까지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의대와 한의대를 모두 졸업한 의사, 한의사 복수면허자가 두 면허를 모두 활용하는 진료를 혼자 로컬 의원급에서 실천한다면 통합의학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는 있되, 팀을 이루어 통합의료를 시행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현재 미국의 많은 종합병원에서는 의사(MD)를 디렉터로 하는 통합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하여 임상에서 적극적으로 통합의학 진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암센터는 대부분 정규 의료부서의 하나로 통합의학센터를 두고 있는데, 그중 텍사스 휴스턴 엠디앤더슨 암센터의 통합의학센터, 뉴욕시 맨하탄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의 통합의학센터, 보스톤 하버드 의대 연계 병원인 다나파버 암센터의 자킴센터, 이렇게 세 군데가 연구, 임상, 교육을 종합했을 때 통합암센터 분야에서 가장 활약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유명 암센터나 대학병원급이 아닌 지역 종합병원에도 통합의학센터가 설치된 경우를 의외로 자주 볼 수 있는데, 방문해 보면 주로 웰니스 센터의 컨셉이 많고 통증이나 불임 치료를 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센터들은 의사를 중심으로 하여 통합의학의 개념을 확고하게 실천하고 있고, 다른 의료직종들은 소통과 협력에 적극 협조하는 하나의 진료팀으로서 개별 환자를 위한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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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통합의료 시스템을 조율하고 소통하는 지휘자, 안내자 혹은 팀장의 디렉터 역할로는 사실 한국의 한의사 인력이 매우 적합합니다. 미국에는 통합적인 정규 의학 교육을 받은 한국의 한의사와 같은 의사직종이 없기 때문에, 통합의학센터에 의사 디렉터가 있음에도 다른 의료직종을 모두 이해하면서 환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전담하는 의료 코디네이터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요즘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 통합은 의학적 권위를 앞세운 일방적인 지시나 상명하달식의 통솔이 아닙니다. 통합은 다양한 의료서비스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단 한 명의 환자를 위한 맞춤 치료계획 수립에 통찰력을 발휘하는 소통의 방식입니다. 통합의학은 그 전체적인 통찰력에 대한 의학이고, 여러 의료직종이 이에 관여될 때 통합의료 시스템으로서 팀워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에 존재하는 통합의학센터와 같은 통합의료 시스템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는 디렉터 역할은, 현대 한의학의 통합의학적 교육을 수료한 한국 한의사의 포지셔닝으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한의사 박지혁의 미국 통합의료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