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지혁
[미국 통합의료연구소]

한국 한의학의 보건의료적 가치를 동시대적, 세계적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혁신하고, 이와 관련하여 한의사들이 미래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의사 박지혁 프로필

Context, 맥락의 이해

 

최근에 제 오피스 (한의원)가 위치한 Manhattan Upper East Side에서는 근처 갤러리들을 중심으로 ‘Asia Week New York’ 주간이 3월 10일부터 19일까지 열흘간 진행되었습니다. 총 50여 개 갤러리와 기관들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 중국, 일본, 한국, 인도, 히말라야 및 동남아시아로부터 유래한 유물과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시간을 내어 갤러리들을 둘러보면서, 저는 뉴욕 갤러리와 미국 문화예술계에서 바라보고 있는 아시아에 대한 시각과 이미지를 대략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은 한국에서 오래 살았던 저의 관점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느꼈습니다. 같은 예술품이라도 한국에서의 아시아 관련 전시와 미국에서의 아시아 관련 전시에 놓여있는 맥락이 서로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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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에서 출판된 통합의학 교과서에서 한의학과 관련 있어 보이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한의사의 대표적인 치료기술인 침 치료, 한약재를 비롯한 천연약물, 그리고 중의학 (TCM)의 이름으로 일부 이론적인 내용 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한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기초과목 및 임상 각 과의 내용이 완전히 해체되어 극히 일부만이 선택적으로 수록된 모습입니다. 특히 개별 질병의 증상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동아시아 유래의 요법들이 단순 나열 되어 있고, 천연물 유래 약물의 경우도 한약 복합처방보다는 개별 약재 위주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협소한 범주의 아시아 유물들을 뉴욕 갤러리 이곳저곳에서 낯설게 만나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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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Korean Medicine)은 한반도 지역이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한민족에 의하여 오랜 시간을 거쳐 발전되어 온 역사성 있는 의학이며, 현시대 대한민국 제도권 의료의 한 체계로서 정립되어 고유한 진료 면허권을 통해 응용되고 있는 의학 분야입니다. 사람을 건강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발전되어 온 한의학의 맥락 (context)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바뀌어 온 한의학의 임상적 환경을 모두 포괄합니다. 즉 한의 진료의 상황을 특징화하는 배경과 정보 등 모든 요소가 바로 한의학의 컨텍스트입니다. 그 요소들을 한의학의 특성에 맞추어 네 가지 정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공간적 배경’입니다. 넓게는 동아시아 한반도 지역의 기후와 지리, 대한민국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상황, 한국 국민과 사회적 문화적 성향 등에서부터 좁게는 한국의 의료계, 한의계, 한의과대학, 한방병원, 한의원 등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시대성’입니다. 한의학에는 널리 알려져 있는 <동의보감>을 비롯한 오랜 역사성을 가진 콘텐츠가 다른 의학체계에 비하여 매우 풍부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적 배경뿐 아니라, 의료기기 사용 등 현시대 한국의 의료현장에 적합한 한의 진료의 동시대성도 최근 특히 부각되고 있는 한의학의 중요한 맥락적 요소입니다. 셋째는 ‘중재적 활용’입니다. 한의학은 실용적인 의학체계로서 예방보건, 진단, 보존적 및 침습적 치료 등 한국의 의료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환자를 위한 진료, 주민을 위한 보건정책, 현지인을 위한 의료봉사 등 여러 상황에서 한의학의 콘텐츠는 보건의료적 중재 (intervention)로 활용되어 왔으며, 이를 지지하는 임상의학적 효능, 효과, 기전의 연구도 이 맥락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넷째는 ‘정체성’입니다. 한의학에서 강조되어 온 전인적, 환자중심적, 자연친화적, 예방적 특징들과 함께, 한의임상의 주체인 한의사 양성을 위한 한의과대학의 정규교육 내용, 한국의 법적 의료인으로서 의사직종의 하나인 한의사 면허권 등 한의학을 정의할 수 있는 정체적 요소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또한 한의학과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한의사와 다른 의료인들과의 관계 등 다양한 상황이 한의학의 맥락적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의학의 맥락은 매우 포괄적이고 다양합니다. 이러한 맥락을 분석하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특징 파악이 우선 중요하며, 맥락인지 (context-awareness)적 활용을 추구해야 합니다. 즉 분절화된 콘텐츠를 나열하기보다는, 맥락을 발견하고 이해하여 한의학 고유의 콘텐츠를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는 임상활용이 시대와 장소에 맞는 한의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내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해외에서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 많은 한의사들이 주로 한의학의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에 열중해 왔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정체성은 한의학의 맥락을 구성하는 분류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합적인 맥락 상황을 경시하고 정체성을 강조하는 콘텐츠만을 내세운다면, 과연 누구에게나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예컨대, 동의보감, 사암침법, 사상체질의학 등으로 분절된 콘텐츠들을 정체성으로 삼아 한의학의 세계화란 명목으로 해외에 이식하겠다는 발상으로는, 한의학이 현시대 각 나라의 사회적 배경과 의료체계라는 주요 맥락에 원만하게 수용되어 그 나라의 보건의료발전에 제대로 기여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세계 속의 한의학’을 추구하는 것이 맥락인지적 세계화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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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상호연결을 촉진함으로써 소통 (communication)을 위한 첫걸음이 됩니다. 미국 통합의학의 맥락과 한의학의 맥락을 분석하여 관점을 서로 공유하고 비교하면, 상호교류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특히 통합의학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것은, 한의학의 과학화, 현대화, 세계화를 위한 노력과 부합하는 일입니다. 서양의 의사들은 전인적이고 보존적인 진료방식을 탐구하면서 기존에는 비의료로 간주되던 각종 요법들과 함께 주로 중의학 유래 치료기술에서 유용할 만한 것들을 단순 정리하여 ‘대체의학 (Alternative Medicine)’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그 중 근거를 기반으로 과학화를 추구하여 ‘통합의학 (Integrative Medicine)’의 치료기술로서 침 치료나 일부 한약재 및 단순한 한약 처방들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적인 현대의 한의학이란 현재 미국 의학계에서 추구하는 통합의학의 방향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통합의학의 입장에서 한의학의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통합의료의 현장에서 한의학의 치료기술들을 단순 나열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료직역이 함께하는 통합의료 시스템 자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의학과 통합의학이 공유하는 컨셉과 치료기술을 중심으로 맥락적 이해를 통해 서로 잘 소통하게 되면, 사람을 건강하게 하려는 의료의 위대한 가치를 한의학 콘텐츠를 통하여 실현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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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미국 뉴욕에서는 한의사 해외진출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한의사들의 미주 협회가 ‘American Association of Korean Medicine (AAKM)’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습니다. AAKM은 미국과 캐나다 등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의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유래한 한의학 콘텐츠를 미주사회의 맥락에서 다양하게 적용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창립 과정의 토론에 참여하면서, 한의사가 미주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한의학의 고유한 정체성뿐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여러 맥락적 요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의료인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통합의료 시스템과 통합의학 콘텐츠에서 한의학과 관련된 맥락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역으로 한국 내 한의학의 과학화, 현대화, 세계화에 발전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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