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승남
[Wassup Hopkins!]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의사학교실에서 방문학자로서 한국 한의학을 토대로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칼럼을 통해 연구와 관련된 내용 뿐 아니라, 볼티모어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한의사 이태형 프로필

한의과대학 혹은 의과대학에서 의사학이라는 학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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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한의과대학 혹은 의과대학에서 의사학을 배우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실 이 질문은 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한의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사학 전공자이기도 한 저는 한의학과 의사학의 관계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민은 비단 저 뿐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근 하버드 의대 출신 MD이면서,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의사학교실 소속의 Jeremy Greene 교수님이 저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한 “Making the Case for History in Medical Education” 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간되어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은 본 논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실 의과대학에서 의사학이라는 학문의 위치는 마이너리티에 속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도 모든 의과대학에 의사학교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2008년에 이루어졌던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Medicine 조사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 174개의 의과대학 가운데 98개의 대학에서는 의사학과 관련된 과목이 없었으며, 51개의 대학은 어느 정도 의사학과 관련된 언급이 있었지만 제대로 과목이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의사학이라는 학문이 의과대학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학문으로 여겨지는 것은 의사학이 임상의학 교육과 큰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학은 종종 과거의 의학을 다루는 것이지, 현대 의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본래 의사학이 실용적인 지식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구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청진기를 발명했던 프랑스의 의사 René Laennec은 본인의 논문을 통해 실제 임상과 히포크라테스 이론 간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의사학은 단순히 임상적 활용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더 다양한 학문적 가치를 염두에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일의 의과대학에서는 의사학을 의학 지식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려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의사학은 단순히 의학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 사학 흐름과도 연계되었으며, 연구의 범주가 확장되어 과거 의사들의 논쟁은 물론 당대에 살아있는 의사들까지도 포함하여 더욱 다양한 주제를 연구 대상에 포함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임상의들의 의사학에 대한 태도는 급격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연 과학에 기초한 의학 지식의 구축이 중요한 흐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비롯된 실험실 과학은 자연 철학에 바탕을 둔 의학 지식을 몰아내었으며, 주로 독일의 의학 모델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경우에도 의사학을 임상의학과 구분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창설한 교수단은 의사학 교육과 관련하여 역설적인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John Shaw Billings, William H. Welch, 그리고 William Osler는 독일의 근대과학적 의학 모델을 미국에서 재현하고자 하였지만, 동시에 의학을 다시금 인간적인 관점에서 교육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의사학 교육을 통해 환원적, 전문적, 상업적, 분획적 의학 흐름을 완충시키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열망 끝에 William Welch는 1929년 영어권 최초의 의사학교실인 the Institute for the History of Medicine을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 창설하게 됩니다. 이후 존스홉킨스 의사학교실은 1932년부터 1947년까지 Henry Sigerist의 책임하에 운영되었는데, 그는 사회적인 관점을 통해 의사들의 역할을 넓히는데 의사학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1939년 Henry Sigerist의 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존스홉킨스를 포함한 몇몇 의과대학을 제외하고는 의사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1966년 Lester King은 의사학 분야의 문제점으로 의사학 교육이 임상적으로 더 나은 의사를 양성하는데 공헌한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응하여 의사학 분야에서는 의사학의 의의에 대한 여러 주장에 제기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전문성(professionalism)”과 관련된 사항을 대표적인 것으로 뽑을 수 있습니다. 의사학 연구자들은 모범이 되는 의사들의 행적과 그들의 연대 등을 연구함으로써 과거를 기리는 연구(nostalgic professionalism)를 하기도 하였고, 혹은 공공의료의 전통, 사회적 정의 등을 추적하면서 의사들의 사회적 책무 등을 탐구하는 연구(activist professionalism)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보다 기능적인 관점에서 전문성이 연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의사학 교육이 의사들로 하여금 더 인본주의적 치료 기술과 전문적 업무 수행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단순히 전문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이론(social theory)”과의 관련성 속에서 의사학의 의의를 찾으려는 관점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의과대학 학생들이 현대 사회를 둘러싼 사회 이론과도 지적으로 관계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본 논문의 저자들은 현재에 가능한 의사학의 의의를 다섯 가지 핵심 주제로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들은 아래의 분석을 통해 의사학적 분석이 분자생물학이나 약리학 등과 마찬가지로 질병에 대한 개념과 치료적 효용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간에 따른 질병의 변화: 단순히 질병의 정의와 진단 방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질병에 내재한 개인 및 사회와 관련한 다양한 요소들의 변화까지도 포함한 연구를 수행한다.

② 의학은 역사의 산물: 의학적 지식, 기술, 진료 방식은 특정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체계 내에서 형성되는 것. 역사는 의학 지식의 생산과 확산에 비판적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③ 건강 불평등의 지속: 의학 교육 및 연구, 그리고 임상 실제는 각각의 인구가 처한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취약함을 가지고 있다. 의사학은 인종, 민족, 성별,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의료적 차별에 대한 핵심적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④ 끊임없이 변화하는 건강관리 체계: 의료인의 역할 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기관, 그리고 임상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의사학은 현재의 구조를 밝히고 이들의 한계와 개선을 위한 전망을 제공한다.

⑤ 의학 연구와 임상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찰: 의사학은 윤리적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힘에 대해 밝힘으로써 의료 윤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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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과대학에서의 의사학 교육은 의과대학에서의 의사학 교육과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한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근대 사회 속에서 지니는 의의에 특수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 자연 과학에 기초한 근대의학이 전근대와의 구별을 통해 새로운 의학 흐름을 형성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의학은 근대 이전의 의학지식을 여전히 임상적 근거로써 활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의과대학에서 의사학 연구라 함은 전통적 지식체계를 비판적으로 분석 고찰함으로써 이를 현대적으로 활용하도록 연계하는 역할까지도 포함합니다. 실제로 현재 한의과대학에서 교육되고 있는 “각가학설”이라는 과목을 살펴보면 과거에 각 의가에 의한 의론들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고, 또 어떻게 변화해 갔으며, 현대 한의 임상에서는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까지도 논의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의학의 임상 근거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한의학의 학문적 특성과 현대 의학적 의의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한의학과 양방 의학의 관계 역시 여전히 배타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따라서 한의학계 안에서 의사학의 의의는 전통적 지식체계를 고찰하는 측면에만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한의학의 현대 의학적 의의와 한의학의 양방 의학과의 관계에 대해 보다 발전적인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두 의학 체계를 의사학적 연구 방식을 통해 비교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의학 흐름 속에 존재하는 “전환점”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각 의학체계가 지니고 있는 학문적 특성을 더욱 잘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바람직한 관계 맺음을 추구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한의과대학 안에서 의사학 교육이 지향해야 할 지점은 한의학이라는 학문적 특성으로 인한 측면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선 논문에서 소개해 드렸던 시간에 다른 질병의 변화, 역사적 산물로서의 의학, 건강 불평등의 지속, 변화하는 건강관리체계, 의료 윤리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두고 연구를 이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처음 홉킨스 의사학교실에 도착하고 나서 당황했던 부분 중에 하나는 제가 한의과대학에서 주로 고민하였던 의서의 현대적 활용과 같은 측면에 이곳 연구자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의사학이라는 학문은 반드시 임상과의 관련성만을 목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이 자체로서 하나의 전문성을 확보해 온 하나의 학문 분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곳에서의 연구가 임상과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의 연구 방식을 통해 한의학을 연구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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