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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에 마음이 설레서 기차에 올랐다. 급작스럽게 떠난 부산 여행. 그 도시의 지난 기억을 간직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국 최초의 조선소가 있던 곳

부산에 온 김에 가고 싶었던 곳을 차례로 떠올렸다. 시간을 정해두고 온 여행은 아니었지만, 원하는 모든 곳을 다 다녀올 수는 없으니 우선순위를 정했다. 리스트의 가장 위로 올라온 곳은 영도였다. 영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한 바다 사나이의 척박함. 왜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됐는지 궁금했다. 무작정 떠나온 여행은 이럴 때 참 좋다. 궁금한 이유를 찾아갈 수 있으니.

부산의 서쪽으로 길을 잡고 옮겨가다 다리를 건넌다. 그 유명한 영도다리다. 큰 배가 지나갈 때는 다리를 열어 길을 내준다고 해서 예부터 아주 유명했다. 육지의 건너편 영도의 머리맡은 조선업이 융성했던 지역이다.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바로 여기다. 100년 가까이 조선업으로 부산사람의 생을 이어주던 동네. 최근 SNS에 이 동네가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별명도 붙었다. ‘깡깡이 예술마을’. 왜 깡깡이인고 하니 쇠 두드리는 소리가 깡깡 요란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명이 보인다.

이 동네에 대해 기록을 찾다 보면 이곳이 한국 조선업의 시발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지금이야 조선업 하면 거제도를 떠올리게 되지만, 그 시초는 부산이었다. 부산항을 개항한 이후 일본의 어부들은 부산 근해까지 진출해 고기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영도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을에 남은 기록을 살피면 깡깡이 예술마을의 원래 지명인 대평동 일대는 바람을 피하거나 조업이 개시되는 걸 기다리던 대풍포였다고 한다. 영도에 배를 댄 일본의 어부들은 이곳에서 배를 수리하거나 식수를 공급받았기도 했다.

그런 배경은 자연스럽게 조선업의 태동으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1887년 일본 고베 출신의 다나카 와카지로라는 사람이 대평동에 자리를 잡고 ‘다나카 조선소’를 열었다. 다나카 조선소는 엔진을 단 목선을 처음으로 만들어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쥔다. 이후 다나카 조선소는 대양조선철공, 구일조선, 남양조선, 유진조선, 에스앤케이조선 등으로 주인에 따라 이름이 바뀌다가 지금은 우리조선이라는 회사로 명맥을 잇고 있다. 다나카 조선소의 등장 이후 영도 대평동 일대는 선박 수리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70~80년대 이쪽 일대에 사는 부산사람은 영도에 삶을 기대어 살았다. 손에 기름을 묻히며 먹었던 기름밥은 부산의 부흥을 이끌었다.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낙에게도 영도는 기회의 땅이었다. 허드렛일이지만 망치를 들고 배 아래에 덕지덕지 붙은 따개비 등의 어패류를 떼 내는 게 그네의 일이었다. 그 척박하고 고된 삶의 기억이 아직도 이 일대에 숱하게 남았다.

황량한 골목을 살린 예술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직도 이곳은 골목마다 기름 냄새와 비릿한 쇳가루 냄새가 코를 찌른다. 1980년대 이후 영도 대평동 일대의 호황은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1990년대를 관통하고 IMF를 지나면서 호황은 불황으로 바뀌었고 이 골목에 기대어 생을 살았던 사람도 줄줄이 떠나갔다. 요란해야 할 골목의 쇳소리와 그 쇳소리를 이기려는 사람의 목소리도 갈수록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황량해진 골목을 살린 건 예술이었다.

도시 재생이라는 개념이 부각하면서 영도 대평동 일대도 도시 재생의 대상지가 됐다. 부산을 먹여 살린 이 골목을 되살려보자! 그 구호 아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골목의 원형을 해치지 않되 곳곳에 예술 작품을 배치해 골목을 걸어 삶과 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진 현장을 찾아다니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척박한 자리에 그려진 벽화는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마냥 골목에 스며들었고, 온갖 조형물이 세워졌어도 신경 써서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튀지 않았다. 그게 성공 포인트였던 모양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은 골목을 누비며 작품을 찾아내고 이를 사진으로 담아서 다시 다른 사람의 발길을 불러왔다. SNS의 시대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옛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의 중요성을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다. 관할 지자체에서는 여기에 깡깡이안내센터를 세워 찾아온 이가 조금이라도 더 깡깡이 예술마을에 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안내센터를 나오면 바로 곁으로 ‘신기한 선박체험관’이 있고, 마주 선 작은 통통배를 타면 주말 하루 세 번씩 바다로 나가 해상 투어를 한다. 사전 예약을 한다면 40분에 걸쳐서 깡깡이 마을 투어도 해 준다. 이제 이곳은 조선업에 생을 의탁한 이가 하루를 사는 삶의 터전이자 영도를 대표하는 여행지로 변모했다.

안내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펼쳐 곳곳에 숨어 있는 작품을 찾아다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쇠를 자르고 이어 붙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평소 같았다면 시끄럽게 여겼을 이 소음마저 이곳에서는 유난히 정겹게 다가온다. 육지를 마주 보는 섬의 끄트머리 어딘가에서는 바람과 조류가 완성한 조형물을 만났다. 파도가 칠 때마다 톱니바퀴가 돌고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가 돌아 작품이 움직이도록 했다. 자연의 힘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생명이 부여되는 작품이다.

어느 골목에선가는 허름한 식당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유리창에 붙은 메뉴는 회무침, 청국장, 김치찌개 따위다. 이곳에서는 유별한 게 아닌 그런 음식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구미가 당겼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 소주 한잔할 수 있겠냐 물었다. 해가 꽤 낮게 깔려 느지막해진 시간에 들이닥친 손님의 등장에 주인은 적잖이 당황한 낌새다. 오늘따라 식재료가 다 소진돼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노라고, 미안한 기색을 띠며 말한다. 어쩌겠는가, 발길을 돌릴 수밖에.

곳곳을 걸어 다니다 대로변 쪽으로 나왔다.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이 그쪽에 있다. 길가를 따라 내려가던 중에 맞은편 아파트 저쪽 벽에 그려진 그림.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는 제목이 붙은 대형 그라피티 작품이다. 독일의 헨드릭 바이키르히가 그린 그 그림은 따개비를 떼던 우리의 어머니를 섬세하게 담고 있다. 하루에 고작 얼마라고 받기 위해 그 차가운 겨울 삭풍도 마다치 않고 배의 밑바닥을 망치로 두드리던 어머니.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낸 어머니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었다는 걸 상기하게 만든다. 그 커다란 그라피티를 눈앞에 두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머니라는 세 글자는 얼마나 감사한 존재를 표현하는 단어란 말인가.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그 벽화를 마주하고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잘 숙성한 회의 쫀듯한 감칠맛

이날의 여운은 영도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내내 가슴을 뭉클하게 물들였다. 아마도 바다 건너 저편을 빨갛게 물들이며 저물어 가는 석양의 기운도 한몫했으리라. 그러나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저녁에 만나기로 한 일행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보수동으로 오라고 했다. 영도에서 보수동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편리할 테지만, 유달리 그날따라 걷고 싶었다. 남포동을 지나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가로질러 낮은 언덕바지를 올랐다. 부산은 언제와도 생생한 삶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기왕이면 책방골목을 지나쳐 가고 싶었지만, 목적지는 다른 골목이었다. 사위가 어둑해져서야 목적지에 닿았고, 지인은 이미 길가에 서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부산의 선어회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부산에 왔다고 회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쯤이야 이제 많은 이가 알고 있지만, 이곳의 선어회만큼은 꼭 욕심낼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의 부연에 궁금증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가게의 이름은 용광횟집이다. 보기에 꽤 오랜 역사를 가진 듯 허름했다. 적산가옥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 1층 안쪽을 꽤 깊숙하게 사용하는 구조였다. 소극적으로 추정해도 이 가게의 역사를 30년쯤은 잡아야 온당한 처사가 아닐까 싶은 그런 집이다. 메뉴는 단출하다. 회를 크게 먹을 것인지, 중간 사이즈로 먹을 것인지. 다른 메뉴는 오징어통찜, 아귀찜, 동태탕 정도다.

횟감은 그날 배에서 올린 것을 그대로 손질해서 세 시간쯤 냉장고에 넣어 숙성한 것이다. 그날그날 접시에 담기는 종류가 다른데, 이날은 전어, 숭어, 광어가 올라갔다. 가을에는 역시 전어다. 활어로는 많이 먹어봤지만, 숙성한 전어는 처음이다. 이곳에서는 회를 먹을 때 미나리를 초고추장에 잔뜩 넣어 함께 먹는다고 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전어회를 잔뜩 집어 초고추장 묻은 미나리와 함께 담아 입에 밀어 넣는다. 아사삭 씹히는 미나리의 향기 뒤로 오독오독 전어가 씹힌다. 미나리의 향기가 아래로 깔리고 그 위에 전어의 고소한 맛이 짙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숙성한 회는 각각이 가진 특유의 맛을 더 뚜렷하게 드러냈다. 광어회는 그만의 진한 감칠맛과 향을 유감없이 혀 전체에 옮겨놓았다. 숭어회는 지금까지 먹어 본 중에 가장 깔끔한 맛을 자랑했다. 매번 혀에 올려놓고 씹을 때마다 미나리가 먼저 존재감을 드러내며 입안을 새롭게 만들어준다. 선어회의 매력은 역시 재료가 가진 장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는 것. 세 시간이라는 숙성시간은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 역시 최상으로 만들어주었다.

가게를 나오기 전 주인장이 회를 써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재료의 결을 따라 세심하게 넣는 칼질이 인상적이다. 마치 어린아이를 보듬어 달래는 듯한 인상이었다. 재료와 칼을 다루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손끝에 담은 저런 정성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오른다. 부산의 밤은 아름다운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을은 전어가 가장 맛있어지는 시기다. 산란 철이 지난 전어는 9월부터 다시 살을 찌우는데, 10월이면 기름이 충만해지면서 맛이 오른다. 전어는 등푸른생선에 속한다. DHA, EPA 등의 불포화 지방산이 풍부하고 콜레스테롤을 낮춰 동맥경화, 고혈압 등의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 비타민과 미네랄 성분도 풍부해 피로 회복에 좋고 피부미용에도 좋다. 전어의 미덕은 무엇보다 뼈째 씹어 먹는 생선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칼슘 섭취량이 많아져 갱년기 여성의 골다공증에 좋다. 전어의 단백질은 분해 과정에서 글루타민산과 핵산이 다량으로 생성돼 뇌와 간 기능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