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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으로 가는 길, 경상북도로 넘어갔더니 느닷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설경을 맞이했다. 경북의 제1경이라는 진남교반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상북도 북쪽의 울타리

폭설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사위가 하얗게 변해 버렸다. 차가 미끄러질까 싶어 브레이크도 밟지 못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서 진남교반까지 갔다. 이미 그 일대는 내린 눈으로 인해 앞서 들어온 차량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간신히 차를 돌려 고모산성 뒤편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목적지는 고모산성이었으니까. 정말 간신히 그곳까지 갔다. 하지만 이쪽도 만만한 상황은 아니다. 좁은 산속 도로 저 앞쪽에는 트럭이 미끄러져 길을 가로로 막고 있었다. 뒤로는 줄줄이 차들이 연이어 따라 그 도로로 들어왔다. 어쩔 수 없다. 뒤의 차들과 범퍼를 거의 맞대다시피 해서 언덕바지 아래까지 후진으로 내려왔다. 어렵게 차를 길 아래쪽에 놓았다.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여기서 고모산성까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평소 같았으면 쉬이 올라갔다 올 수 있는 구간이다.

다른 이들은 고모산성에 오르는 걸 포기한 모양이다. 하얗게 쌓인 눈에 첫 발자국을 남기면서 산중 도로를 따라 걸었다. 아무도 없는 하얀 세상. 기분이 묘했다. 폭설이 내려서인지 평소와 달리 고모산성 인근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진남교반의 명성을 생각하면 이곳의 설경을 홀로 누릴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면 행운일 테다. 그 기쁨이 생각보다 크다.

진남교반은 ‘경북 8경’ 중 으뜸이라 불린다. 1933년 1월 대구일보사에서 경상북도의 명승지를 가리는 행사를 열었고, 경상북도 전역에 걸쳐 여덟 곳의 경관을 뽑았다. 그중 첫손에 꼽힌 곳이 바로 이곳, 문경의 진남교반이다. 문경은 경상북도 북쪽의 울타리가 되는 지역이다. 태백산에서 흘러온 산맥의 줄기가 대미산과 주흘산, 희양산으로 이어지면서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과거에는 이곳이 천혜의 요새와도 같아서 충북에서 넘어오는 적군을 방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지였다. 방어를 논하려면 시야의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진남교반은 물줄기를 타고 오가는 물동량과 사람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이 자리에 고모산성과 고부산성이 세워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얀 눈을 밟으며 고모산성이 있는 쪽으로 나아간다. 길목에 옛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고, 서낭당으로 사용하던 가옥도 말끔한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의 영화롭던 시대의 흔적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였다. 대지는 한없이 고요하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 복판에 서 있자니 괜스레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고모산성으로 향하는 뒷길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목 같았다.

마을의 흔적을 지나자 저 멀리 고모산성이 보인다. 능선을 따라 쭉 뻗어 올라간 산성은 하얀 설경과 어울려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뽀드득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한 걸음씩 다가간다. 순백의 이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니.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진다. 왜일까. 이유를 알 수 없다.

조선 말기 의병 항쟁의 아픈 기억

산성의 안팎은 진남교반 일대를 개발하면서 손을 많이 본 흔적이 보인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인 5세기경 신라가 계립령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남교반 일대는 교통의 요지다. 제법 험준한 일대의 산을 넘어가는 것보다는 영강의 줄기를 따라 나아가는 편이 훨씬 수월했으므로 보통은 이 길목을 따라서 이동했다.

이곳이 얼마나 험준한지는 깎아지른 듯 펼쳐지는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은 영강 바로 위로 3개의 교량이 나란히 놓여 있다. 자연지형을 길게 가로지르는 인공의 구조물임에도 위화감 없이 꽤 잘 어울린다. 산성을 따라 놓인 계단을 따라 가장 높은 지대로 오른다. 이 계단에도 역시 내가 첫 발자국을 남긴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저 아래로 보이는 진남교반의 설경이 더 잘 보인다. 때로는 가까이 다가가기보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이다. 여름이라면 이곳의 풍광이 이렇게 잘 보이지는 않았을 테다. 앙상하게 드러난 나뭇가지와 낙엽을 떨구고 텅 빈 수풀만이 이곳에 남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산성의 정상 부근까지 오르자 비로소 진남교반의 모든 것이 한눈에 담긴다. 영강이 휘돌아 나가는 저 아래에는 자연스레 형성된 모래사장이 있다. 과거에는 이곳이 경북과 충북 일대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피서지였다.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름이면 이곳을 찾는 피서객이 적지 않다. ‘경북 8경’ 중 제1경의 명성은 허투루 붙은 건 아닌 듯하다.

이 산성은 많은 피를 뿌린 장소다. 삼국시대에도 연이은 공방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지만, 그 뒤로도 이곳에서는 여러 차례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랬고, 동학농민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조선 말엽에는 의병의 항쟁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던 때였다. 운강 이강년 선생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1896년 2월 23일 향리에서 분연히 일어났다. 현재의 농암면 개바위에서 단발령에 앞장선 안동부 관찰사와 순검 2명을 처단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6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곳으로 진군했다. 그때의 고모산성은 지금은 함창읍 태봉리와 수안보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참선을 연결하는 주요 지점이었다. 그해 2월 27일 새벽, 일본군과 관군은 의병을 향한 기습을 단행했다. 6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변변한 훈련도 받지 못했던 의병은 중과부적이었다. 그 뒤 1907년 7월, 운강은 다시 고모산성에 방어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다. 그때는 일주일에 걸쳐 일본군 1개 소대를 괴멸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고모산성은 그런 비운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하얀 눈이 내리는 설경이 유독 슬프게 느껴졌던 건 아마도 이런 배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웅장한 산성이 자꾸만 마음을 울린다. 인적 드문 이 산성의 하얀 설경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앞날의 일을 알 수는 없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꾸만 그 산성을 돌아보며 눈에 담아두려 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은성광업소 광부들의 식사

문경에도 먹을거리는 많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옛 석탄박물관 일대를 다듬어 만든 복합문화공간 ‘에코랄라’ 곁에 광부들의 밥상을 주제로 한 식당이 있다. ‘광부의 행복밥상’이라는 곳이다.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콘셉트가 참 확실하다 싶었다. 광부가 먹는 밥상이야 뭐 특별한 게 있을까. 평범하디 평범한 찬이었겠지만, 이 집은 그 평범한 밥상에 광부의 이야기를 담아 특별한 무언가로 만들어냈다. 이 일대인 가은면은 은성광업소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모여 살던 동네다.

가게의 외관은 멀끔하다. 광부라는 단어와는 좀처럼 접점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다. 안쪽의 인테리어도 세련된 편이다. 그러나 인테리어의 콘셉트는 ‘광부’에 맞추어져 있다. 예전 문경을 먹여 살리던 광산인 ‘은성광업소’의 이름을 달고, 은성갱도라는 이름의 출입구를 통과해 안으로 입장하도록 했다. 한쪽에는 실제 광부가 입었던 복장과 장비가 놓여 있고, 갱도 안쪽 깊숙한 곳에서 안전을 위해 키우던 카나리아의 모형도 벽에 걸려 있다. 카나리아는 메탄과 일산화탄소에 민감해 가스에 노출될 상황이 되면 카나리아의 노랫소리가 멈춘다. 광부들은 그 카나리아를 믿고 지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던 것. 식당이지만, 광부란 직업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든 또 하나의 박물관이나 마찬가지다.

이 집의 메뉴는 크게 두 가지다. ‘광부의 행복밥상’과 ‘광부의 찌개밥상’. 광부의 행복밥상은 연탄두부와 숯불돼지고기, 전, 광부찌개, 광부도시락의 구성이고 광부의 찌개밥상은 여기에서 연탄두부와 광부도시락이 빠진다. 기왕이면 이 가게가 내놓는 모든 것을 맛보고 싶었다. 광부의 행복밥상을 시키고 기다리니 금세 한 상이 가득 차려진다.

상위를 빼곡하게 메운 음식 중에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건 연탄두부다. 까만 두부의 모습이 연탄을 꼭 빼닮았다. 까만색의 비결은 오징어 먹물이다. 맛은 평범한 두부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연탄의 모양새를 갖춰 두부를 빚어 지져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반찬이었다. 곁에 함께 나온 노란 감자는 광부의 안전을 책임졌던 카나리아를 연상시킨다. 광부찌개는 쉽게 말하면 섞어찌개다. 예전 광부의 아내는 도시락을 싸 보낼 때 냄비를 따로 챙겨서 보냈다고 한다. 광부들은 각자 싸 온 도시락 반찬을 모아서 냄비에 넣고 끓여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고. 광부에게서 직접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이렇게 식당에서 그럴듯한 밥상으로 재현되어 올라온다. 그것만으로도 한 번쯤은 이 집을 찾아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찬 바람 부는 날씨에 따끈한 국물이 몸을 노곤하게 만든다. 매일 탄가루를 마셔야 했던 광부들은 돼지고기를 자주 먹었다고 한다. 이제는 그네들이 먹던 돼지고기가 숯불에 구운 요리가 되어 입안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연탄두부는 간장에 찍어서 한 입, 김치를 올려서 또 한 입. 사근사근하게 씹히는 식감이 좋다. 전체적인 맛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즐길 만한 한 끼로는 충분했다.

광부의 하루를 버티게 해 주었던 밥상은 정말 행복한 밥상이었던 걸까. 매캐한 탄가루와 싸우며 살기 위해 먹었을 법한 밥상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벽에 걸린 한 문장을 보고서야 이해가 됐다.

‘오늘도 이렇게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래, 이렇게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소박한 밥상일지언정 그 한 끼의 밥상이 주는 행복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예전에는 오징어 자체를 즐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오징어 먹물만 따로 요리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오징어 먹물에는 글루타민산염, 뮤코다당류, 타우린, 안토시아닌, 멜라닌 성분이 풍부하다. 이는 뇌세포를 형성하고 면역력을 상승시키며 항산화 작용도 한다. 이외에도 혈액순환 개선 및 심혈관 계통 질환 예방에도 효능이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