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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은 ‘억울한’ 땅이다. 역사로 보나 품에 안고 있는 것들을 보나 할 얘기가 참 많은 곳인데, ‘논산=육군훈련소’의 이미지가 좀처럼 떠나지를 않는다.

억울한 땅, 논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논산 이야기만 나오면 어느새 남자들 사이에서는 훈련소 시절의 이야기로 뜨거워진다. 여자들이라고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입대하는 친구 배웅한 이야기부터 남자친구 군대 보낸 이야기로 흘러 버린다. 도입에서 꺼낸 ‘논산’이라는 지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두의 기억은 논산으로 군대 가던 그때 그 시절로 마무리되기에 십상이다. 논산이 원래부터 군으로 점철되던 곳도 아닌데, 군대 얘기를 빼면 할 얘기가 없는 땅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만큼 육군훈련소의 임팩트가 강해서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논산에도 갈 만한 여행지가 없지는 않을 텐데, 먹거리가 없는 게 아닐 텐데, 좀처럼 육군훈련소의 기억을 상쇄할 만한 강렬함이 부족해서일 테다. 실제로 논산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크게 두 부류로 갈린다. 한쪽은 “정말 뭐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다른 한쪽은 “살아보면 추천할 만한 곳이 꽤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논산에 관심이 생긴 것은 그래서였다. 정말 이야기할 만한 게 없는 곳일까. 혹여 보석처럼 숨어 있어 논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거론할 만한 건 없는 걸까.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까지 논산을 아예 가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친구가 입대할 때도 가 봤고, 우연한 기회에 두어 번 다녀온 적이 있다. 관촉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고, 그곳에 갓 쓴 커다란 미륵불이 투박한 매력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눈여겨보던 중에 점 찍어 두었던 곳이 생겼다. 돈암서원이다. 서원이라고 하면 유생이 공부하는 곳. 딱히 특별한 것이 없을 법한 이 서원이 2년 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19년 7월 6일의 일인데, 당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등 다른 8개의 서원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직접 가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다면 돈암서원 역시 그만한 가치가 있을 테고, 논산을 이야기하면서 첫손으로 꼽을 만한 여행지가 될 만한 것일 테다.

그로부터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는 돈암서원의 존재 정도는 아는 이가 꽤 될 법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바람일 뿐,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돈암서원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더니,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멋지던데, 그게 어디에 있는 거야? 이름 보니까 우리 동네에 있는 곳인 것 같던데.” 그 지인은 서울 돈암동 사시는 분이다. 돈암서원이니까 당연히 돈암동에 있을 거로 생각했던 듯하다. 현실은 이렇다.

충남의 인재를 양성하던 예학의 산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돈암서원의 이름부터 알아보자. 원래 돈암이라는 것은 논산 연산면 임리에 있는 바위를 일컫는 이름이다. 서원의 편액에는 달아날 둔(遁)에 바위 암(巖) 자를 쓰고 있지만, 이 바위의 이름에는 돼지 돈에 바위 암 자를 쓴다. 숲에 박혀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돼지를 닮았다 해서 붙었다. 이 마을에서 돈암이 워낙 유명하니 그 근처에 사원을 세우고 추후에 왕이 사액하면서 ‘돈암(遯巖)’이라는 이름을 내린 것이다. 처음에는 1634년(인조 12년) 기호학파의 거두 사계 김장생 선생을 배향(配享)해 건립했다. 이후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여기에 ‘돈암’이라는 명칭이 하사된 것은 1660년(헌종 1년)의 일이다.

서원이라는 게 흔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유명한 서원이 있다뿐이지 생각만큼 그 수가 많지 않다. 원래 1871년(고종 8년)까지만 해도 전국 곳곳에 650여 개에 달하는 서원이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을 내리면서 대다수가 사라졌다. 오직 47개의 서원만 남겨두었는데, 돈암서원은 그때 살아남은 서원 중 하나다. 그만큼 인재를 많이 양성했고, 서원의 본보기라 할 만큼 예학의 산실로 여겨진 덕이었다.

돈암서원은 그 입지부터가 범상치 않다. 고정산 줄기의 중간쯤에 자리해 있고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있으며 바로 근처에 연산천이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처음에는 현재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후에 이곳으로 옮겨온 모양이다. 서원은 전체적인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담장 밖에 지어진 산앙루(山仰樓)가 이곳을 찾은 이를 압도한다. 서원의 정면을 가로막고 선 2층의 누각으로 그 크기가 꽤 크다. 예전에는 유생들이 이곳 2층에 올라 멀리 뻗어 나가는 벌판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웠을 법하다.

담장 안쪽은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한 인재를 키워낸 곳답게 자못 무게감이 느껴진다. 건물마다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며 철저히 유생의 양성에 맞춰 그 기능에 충실하도록 구조를 짜놓았다. 분명히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사찰과 대별되는 구석이 있다. 서원의 가장 안쪽에는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위패를 모신 숭례사(崇禮祠)가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앞은 내삼문이 굳건히 지키고 섰다. 담장 너머로 슬쩍 들여다볼 뿐 감히 그 안으로 발을 들일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만큼 엄숙한 분위기가 넘친다.

담장 밖의 백미가 산앙루라면, 담장 안쪽의 백미는 응도당(凝道堂)이다. 이곳은 유생을 위한 강당이다. 마루가 넓어 십수 명의 유생이 나란히 앉아 학문을 논했을 만하다. 그 그림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진다. 건축물 자체에서 위엄이 느껴지는 게 아주 인상적이다. 조선의 주요한 건축이 대체로 그랬듯이, 응도당 역시 ‘의례’와 ‘주자대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법도에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서원 전체에서 그 기능과 분위기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이곳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서원 안에는 장판각(藏板閣) 등의 중요한 건축물이 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서원에 상주하고 있는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곁들여 구경해도 좋겠다. 서원이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겠지만, 막상 그 안으로 발을 디뎌서 눈으로 살펴보면 이곳을 찾아볼 이유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결론, 돈암서원은 논산을 대표할 여행지로 손색이 없었다. 다만 그 존재를 아직 모르는 이가 많을 뿐.

 

젓갈의 집산지 강경의 푸짐한 한 상

논산을 찾았으니 무언가 먹기는 해야 할 텐데,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처음에는 무조건 강경으로 가야 한다. 강경은 오래전부터 젓갈의 집산지로 명성이 자자하던 곳이다. 논산은 물산이 풍부한 전라도를 바로 이웃하고 있는 지역이다. 과거 전라도의 질 좋은 진상품은 논산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다. 물산의 이동 과정에 금강은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이 강줄기를 타고 젓갈의 재료와 젓갈 장수가 강경포구로 모였다. 자연스레 젓갈 하면 강경이 단연 으뜸이라고 말할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 명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물론 젓갈의 재료 중 일부는 수입산이 많아졌지만, 가공된 젓갈은 이곳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유통된다.

워낙 젓갈이 유명하니 강경읍내의 식당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젓갈정식’ 혹은 ‘젓갈백반’이다. 그중에서도 이름 높은 집이 몇 곳 있는데, 그런 식당은 믿고 들어가 볼만하다. 이번에 찾아간 집은 2인 기준으로 젓갈 열 가지를 가득 깔아준다. 조기, 갈치, 청어알, 오징어, 굴, 가리비, 새우, 명란, 낙지가 각각 잘 익은 젓갈이 되어 상 위에 올랐다. 여기에 3명이면 열다섯 가지, 네 명 이상이면 스무 가지의 젓갈이 올라온다. 아가미젓, 씨앗젓갈, 토하젓, 조개젓, 비빔낙지, 멍게젓, 꼴두기젓, 비빔오징어 등이 그 목록이다. 하나하나 이름을 듣고 보니 여기는 무조건 네 명 이상이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이 물씬 든다. 진짜 귀하고 맛있는 것들은 모두 4인 이상일 때 상에 오르니 말이다.

원래 이 밥상은 젓갈백반이라 불렀다. 그런데 젓갈 이외에도 황태무침, 호박고지, 콩자반, 깻잎, 고등어, 칠게무침도 깔려서 한 상이 그득하니 젓갈정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운데는 큼지막한 시골된장국이 차지했는데, 이것만 해도 구수한 맛에 밥 두 공기는 후딱 사라진다. 심지어 갖가지 젓갈이 종류별로 더해졌는데, 과연 공깃밥 하나가 충분하겠는가 말이다. 뚝딱하면 자꾸만 사라지니 세 공기 이상도 너끈하게 비우고도 남는다.

예전에는 젓갈백반을 찾아오는 이가 많아 주말이면 온종일 밖으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린 뒤로 그 발길도 뚝 끊겼다. 젓갈 가게들도 한산함을 견디다 못해 임시로 문을 닫았는지 ‘휴무’를 내 건 모습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논산에 이렇게 맛있는 먹거리가 있다는 걸 더 널리 알려서 더 많은 이가 찾아오도록 해야 하는데 말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이 계절에 젓갈백반 든든하게 먹고 잘 익은 논산 딸기를 한입 베어 물면 그만한 행복이 없는데 말이다. 시절이 안타깝다. 논산이 이토록 좋은 곳인데.

가리비는 칼슘이 풍부해 뼈를 튼튼하게 할 뿐 아니라 DHA 성분이 많아 두뇌 발달을 촉진한다. 따라서 기억력 향상과 치매 예방에 도움을 준다. 또한 가리비의 아미노산 성분은 간 기능 강화 및 간의 해독 작용에 효과적이다. 다량으로 함유된 철분은 빈혈 증상 개선에 좋은 효과가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