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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는 합천의 얼굴이다. 그만큼 국내외에 잘 알려진 관광지다. 해인사를 들렀다면, 꼭 걸어볼 길도 있다. ‘소리길’이라 이름 붙은 코스다.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길

소리길을 처음 갔던 건 2013년경이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있었던 성철 스님 관련 행사를 취재하러 갔던 길에 선배 기자들과 잠시 걸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계곡을 걷는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자연히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최근에 와서야 소리길이라는 곳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제 와 보니 소리길은 꼭 한번 걷고 싶은 마음이 일게 하는 곳이었다.

떠나기 전 소리길에 대해 자료를 살폈다. 이 길은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을 맞아 복원한 홍류동 계곡의 옛길이다. 소리길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계곡이 가진 생명력 때문이다. 걷는 내내 계곡 곳곳에서 온갖 자연의 소리가 함께한다. 물 흐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위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 같은 게 귀를 즐겁게 하는 식이다. 자연이 연주하는 소리의 오케스트라 협연이 펼쳐지는 곳이 소리길이다.

소리길의 백미는 홍류동이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이 계곡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가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난가을 합천 여행을 생각했던 이유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좀처럼 어디론가 떠나기 쉽지 않았고, 결국 가을이 다 가도록 소리길을 가지 못했다.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마음이 있다면 기회가 오기 마련. 생각지 않게 겨울에 이 길을 걸어볼 기회가 생겼다. 합천 전역에 대한 취재차 합천에 며칠간 머무르며 여기저기를 둘러볼 일이 생겼는데, 합천의 주요 관광지인 소리길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취재 첫날부터 소리길을 찾았다. 비록 아름다운 가을의 색이 계곡을 수놓은 계절은 아니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숨겨진 절경이 그곳에 있었다.

해인사는 합천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가야산을 경계로 거창과 성주를 이웃한 모양새다. 그래서 합천 여행 중에 해인사를 보려면 부러 시간을 내어 이동해야 한다. 소리길은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목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기 전, 해인사를 오르려면 반드시 이 길을 거쳐야만 했을 것이다. 총 길이는 7.3킬로미터. 4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가장 아래 각사교부터 가장 위의 영산교와 해인사 구간까지 이어진다. 각사교의 건너편은 근래 합천에서 가장 각광 받는 ‘대장경 테마파크’다. 이곳에서 시작해 제일 위의 해인사까지 걸어서 올라가는데, 그 사이에 가야산 19경 중 16경이 이 길 위에 놓여 있다.

얼음 아래에서 들려오는 겨울의 소리

일정상 전체 코스를 다 걸을 수는 없었다. 이미 해는 가야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시간대였다. 그래서 소리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홍류동 계곡 구간만 걷기로 했다. 농산교를 지나 길상암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합천은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이라고 했다. 합천이라는 지대를 지리산에서 뻗어 나온 산맥이 에워싸고 있는 분지 지형이어서 서쪽에서 몰려오는 눈구름이 좀처럼 지리산을 넘지 못하는 탓이다. 기온이 내려가면 춥기는 해도 눈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곳. 하지만, 이곳에 며칠 전부터 눈이 내렸다고 했다. 계곡은 곳곳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었다. 눈 내린 홍류동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행운. 알록달록한 가을보다 더 귀한 풍경이니 말이다.

계곡 아래는 꽁꽁 얼어 있었다. 예년과 달리 유난히 한파가 심했던 겨울답게 물 흐르는 모습을 찾기 어려울 만큼 전체가 하얗게 언 모습이다. 그 모습도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홍류동의 백미는 가을”이라던 이야기를 정정해 주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 길을 찾아온 이로 북적였을 길이기에 인적 드문 풍경이 그만큼 더 좋았다. 홍류동 계곡은 마치 “나의 진가를 온전히 보려면 가을이 아닌 겨울에 오라”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색색의 물감이 빠진 그 골짜기는 수묵담채화가 되어 눈에 담겼다.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경. 가만히 계곡을 감상하고 있자니 온갖 소리가 귀에 날아와 닿는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다. 둔탁하게 “뚝” 하는 소리가 나더니, 몇 걸음 움직이면 얼음 아래로 “쪼르륵” 흐르는 소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홍류동 계곡의 겨울 소리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다리 위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면 하얗게 얼어붙은 계곡물이 기기묘묘한 무늬를 그리고 있다. 마치 하얀 화선지에 옅은 먹물을 툭툭 던져 놓은 것만 같다. 그린 이도 예상하지 못한 우연의 결과가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걸까. 작가를 알 수 없는 계곡의 작품을 집에 가져다 걸어두고 싶었다.

길을 걷다 보면 껍질이 벗겨진 채 속이 드러난 소나무를 보게 된다. 그 속살에는 칼로 그어서 만든 상처가 수십 개씩 나 있다. 송진을 얻기 위해 인간이 낸 상처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한 송진 채취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송진은 의약품이나 화학약품의 재료가 됐다.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소나무는 이런 식으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보고 있자면 마음이 짠해지는 광경이다. 이 상처 아래에 안내판이 만들어져 있는데, “한 번 훼손된 자연은 회복이 어렵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문장에 더 상처가 안쓰럽게 보인다.

해인사 사하촌 최고의 밥상

대략 1.5킬로미터에 달하는 홍류동 계곡 구간은 길상암이 머리 위 저편에 앉아 있는 지점에서 끝난다. 그 위로도 길은 이어지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어느덧 사위도 제법 어두워졌고, 더 늦기 전에 식당을 찾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큰 절이 다 그렇지만, 해인사도 그 아래에 사하촌이 형성돼 있다. 과거 절집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촌락이다. 예전에는 사찰의 행사를 도와주거나 사찰의 살림을 도우며 살았지만, 요즘은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객을 상대로 식당을 해서 생을 유지한다. 마곡사니, 불국사니 법주사 같은 큰 절 마다 절 바로 아래에 큰 사하촌이 있는 이유다. 해인사의 사하촌 역시 마찬가지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해인사는 합천에서도 제법 외진 곳이었다. 절을 찾아온 이는 식사할 곳을 찾아야만 했고, 자연스레 식당들이 번성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해인사를 다녀갔음에도 좀처럼 인상적인 식당은 만나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합천군청에서 추천해 준 삼일식당을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삼일식당은 사하촌에서도 허름한 외관을 갖춘 노포에 속한다.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에 만들어 놓았을 법한 취급 메뉴가 주방으로 연결된 창에 지금도 그대로 붙어 있다. “어라”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정감 어린 옛 모습이다. 이 집에서 첫손에 꼽는 음식은 ‘송이버섯국 정식’이다. 예년 같으면 9월부터 시작해 12월 말이면 일찌감치 다 팔리고 없을 송이버섯인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찾는 이가 줄어들면서 1월 말까지 남아 있었다.

송이버섯이야 더 말할 게 뭐 있을까. 그 자체로 최고급 식재료인데. 정식이라고 했으니 찬이 많이 깔리겠구나 싶었는데, 한정식 못지않게 한 상 그득 차려졌다. 찬만 서른 가지다. 여기에 딸려 나온 된장찌개까지. 갓 지은 밥과 송이버섯국이 더해지니 이 산골짜기에서 받은 상차림이라고 하기 송구할 만큼 최고급 밥상이 완성됐다.

주인공인 송이버섯국부터 먹어보지 않을 수 없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지 않아도 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그윽하다. 버섯에서 뽑아낸 향기가 국물에 오롯이 농축된 것 같은 그 맛이란. 밥을 뜨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한 끼만 먹고 가는 게 안타까울 만큼 식탐이 일었다. 상을 가득 메운 찬은 또 어떤가. 합천 안팎에서 구한 온갖 나물이 특히 입에 맞았지만, 유자를 넣어서 절인 연근과 도라지는 송이버섯의 향과 대비를 이루며 입안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상을 가득 채우고도 넘칠 만큼 빼곡했던 밥상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송이버섯국은 비우는 게 아쉬워서 마지막까지 국물을 아끼고 아껴가며 먹었다. 배를 두드리며 나오는 길에 “요즘 보기 드물게 맛있는 밥상을 받았다.”라며 덕담을 건넸더니, 주인 할머니가 어디선가 커다란 봉지를 꺼내 한 줌 쥐어 건넨다. 누룽지를 튀겨 설탕 뿌린 것이라며 디저트 삼으란다. 세상에나,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튀긴 누룽지인지. 해인사 아래에 갈 만한 식당 없더라는 말은 쏙 들어갔다. 오히려 일행에게 사과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제 저 송이버섯을 먹으려면 9월까지는 기다려야 할 텐데, 몸이 달아서 어쩌나. 이번 가을에 합천을 꼭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일능이, 이송이, 삼표고라는 말이 있다. 상품으로 치면 순서가 그렇게 된다는 뜻인데, 귀한 정도나 맛과 향을 두고 생각하자면 일송이라고 해도 어긋남은 없을 듯하다. 그만큼 귀하고 귀한 식재료다. 송이버섯은 비타민 D가 풍부하다. 그윽한 향만큼이나 많아서 고단백, 저칼로리 식품 중에서도 마니아가 많다. 콜레스테롤을 줄여 성인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알파글루칸 (α‑glucan), 베타글루칸 (β-glucan)이라는 다당체의 일종도 포함돼 있어 체내 면역력을 높이고 바이러스의 침입이나 알레르기 반응을 예방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