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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햇살이 떨어지는 주말, 커다란 나무와 그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경북 성주의 성밖숲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마을을 지키는 비보림(裨補林)

이름에서부터 대략적인 위치를 알 것 같았다. 매우 직관적인 명칭이다. 적어도 시내 한복판은 아닐 테니까. 별달리 알려진 게 없는 성주에서 성밖숲은 대표적인 여행지로 자리하고 있다. 성주 여행을 생각하고 있는 이라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이름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성주로 진입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정표 역시 성밖숲이다.

이 숲은 그만큼 독특한 경관을 보여준다. 짧게는 300년, 최대 500년 이상 된 왕버들 59주가 이천의 강변으로 늘어서 있다. 전체 면적이 1만5,000제곱미터 (약 4,500평) 정도인데, 성주읍이라는 고장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는 공원으로 기능한다. 가보지 않은 채 흔한 숲이나 공원을 떠올렸다면 오산이다. 버드나무라는 수종은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그만큼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데, 수분이 많은 탓에 쉬이 썩는다고 알려져 있다. 500년이라는 수령이 놀라운 이유다. 그만큼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나무들은 생김새가 범상치 않다. 어느 것 하나도 비슷한 것 없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20미터는 족히 넘을 법한 키에 가지를 쭉쭉 뻗었고, 몸통은 그 오랜 세월을 지나며 비틀려 올라갔다. 그런 나무가 59주다. 멀리서 봐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숲일 수밖에 없다.

이 숲의 역사를 조금 뒤져보면 그 역사는 무려 13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산지>와 <성산지>에 따르면 이 숲은 성주읍의 지세를 북돋기 위해 지관의 조언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성주의 서문밖 마을에는 어린아이들이 까닭 없이 자꾸만 죽어 나갔다. 당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의 지형을 살피던 지관은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 게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려면 그 중간에 숲을 조성해야 한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던 것. 그래서 성주읍성의 서문밖 이천의 강변에 숲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곳에 심어진 것이 버드나무가 아니라 밤나무였다. 그러니까 성밖숲은 원래 밤나무숲이었던 셈이다. 이후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을 치르고 나자 마을의 기강이 급격히 무너졌다.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강이 해이해졌다.’, ‘민심이 흉흉해졌다.’라는 문구로 보아 마을 사람들의 생사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야 어쨌든 마을 사람들은 밤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왕버들을 다시 심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왕버들은 무려 500년이라는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희소성을 인정받아 1999년에는 이 숲이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이의 휴식처가 된 숲

이 숲에 도착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숲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시국에서도 나무 아래 사람들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가족끼리 나와서 쏟아지는 오후 햇살 아래 텐트를 치고 앉아 주말을 즐기거나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산책을 하면서 온전히 숲속에서 흐르는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나의 공간이지만, 나무 아래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흐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좋았던지 멀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작년부터 이어지는 이 길고 지루한 방역 전쟁 속에 만난 저 풍경은 귀하고 소중할 따름이다.

성밖숲은 왕버들 군락과 함께 유명한 것이 보랏빛 맥문동의 꽃이다. 여름이 끝자락을 향해서 갈 때쯤이면 나무 아래로 수도 없이 많은 맥문동꽃이 피어난다. 그런데 아쉽게도 올해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 풍경을 보고자 시기를 맞추어 왔건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숲 자체가 워낙 훌륭해서 그 아쉬움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나무는 한 그루 한 그루가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이 나무는 이렇구나, 저 나무는 이렇구나. 그저 한가롭게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기만 했다면 알지 못했을 모습이 보면 볼수록 보인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되는 건 그래서다. 하늘을 향해 넓게 팔을 벌린 모습에 매료돼 한참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는다. 길게 늘어져 마치 기다란 용마루처럼 보이는 다른 나무의 가지는 그 자체로 마치 용이 춤을 추는 것만 같다. 그 곁으로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커피를 손에 든 채 천천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강변 방향으로 자리를 옮기면 숲과 사람이 하나인 듯한 착각이 드는 풍광도 마주한다. 커다란 나무를 카메라의 뷰파인더 안으로 모두 담아놓으면 그 아래 앉아 소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작디작다. 그 프레임 하나가 완벽한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시선을 조금만 옮기면 또 다른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한없이 자꾸만 셔터를 누르게 된다. 잠시 벤치에 앉아 사 들고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나도 그 풍경 안으로 잠시 들어가기로 했다. 머리 위로는 어느새 완연한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고,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느릿하게 흘러간다. 이 아름다운 나무는 햇살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고, 그 아래 앉아 아무 말 없이 음악을 듣는다. Rhys Lewis의 ‘Seasons’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아주 잠깐 맛본 꿀처럼 달콤한 주말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성주의 토속음식

서울로 돌아오기 전, 뭐든 먹고 출발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이미 해는 하늘 위에서 내려와 오후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더 늦으면 아예 저녁을 못 먹을 수도 있으니 서두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성주에서 먹어보려고 했던 음식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검색창을 열었더니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띈다. 등겨장. 낯선 이름이다. 장류의 일종인 듯한데 이걸 어떻게 먹는다는 건지 당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고방찬 남경식당’이라는 곳이었다.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뒤라 가게는 한가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큼지막하게 식당에 대한 소개가 걸려있다. ‘1980년대부터 성주 시장길의 한식을 지켜온 오랜 가게 남경식당’. 잘 찾아왔구나 싶은 생각이 밀려든다. 문제는 등겨장이다.

“예전에는 먹을 게 없어서 보리등겨로 장을 담가 먹었어요. 여름에 아궁이 불에 그 반죽을 서서히 익히면서 건조하고 발효시키는 거죠. 그러면 겨울이나 이듬해 봄에 먹을 수 있어요. 이게 소금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데다 영양소도 풍부해서 몸에 아주 좋아요. 성주 토속음식이니까 한 번 드셔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주인아주머니의 설명이 정겹다. 음식은 사람을 닮는다. 순하고 정갈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내주는 음식 역시 순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돼지불고기를 시켰는데 간장에 잘 재어서 구운 그 맛이 순했다. 모나지 않은 맛. 그럼에도 밥에 잘 어울린다. 등겨장은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편이 아니다. 잠시 기다리면 보리 특유의 단맛이 뒤에서 살아난다. 그저 먹는 행위에만 집중한다면 느끼기 어려울 만큼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가 사라지는 기분. 맛이 순하다는 게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반적인 음식의 평은 아주 단순하게 튀어나왔다.

“좋은데?”

짭짤한 쌈장에 비해 순한 등겨장은 의외로 밥맛을 살린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우고 다시 한 그릇을 주문하게 만들었다. 성주의 맛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인접해 있는 합천이나 고령의 맛과는 전혀 다른 깊이가 있는 순한 맛. 기분 좋게 두 그릇을 비우고 일어난다.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그 고장의 맛을 찾아냈다는 뿌듯함이 문을 열고 나오는 발길에 가득했다. 이번 여행도 참 좋았네. 기분이 좋아 웃음이 났다.

보리의 등겨로 만든 등겨장은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혈당 조절에 효과가 있어 당뇨병을 앓는 환자에게 권할 만하다. 보리는 쌀보다 식이섬유가 3배 이상 많다. 수용성 식이섬유인 베타글루칸 (β-glucan)이 다른 곡물에 비해서도 월등하다. 이 성분은 소화를 돕고 천천히 흡수되는 성질이 있어 혈당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을 막는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