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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이 보일 무렵, 주변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온통 “힘들다”라는 것뿐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이에게도, 자영업을 하는 이에게도 좀처럼 희망 섞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새로운 해에는 모두에게 희망이 깃들기를, 오후의 강릉에서 빌었다.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어도 바다 저편에 드리운 빛깔은 따스했던 버스정류장 앞이었다.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

겨울은 이미 절정의 시기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동해안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강릉 촬영 스케줄에 가족과 함께 다녀오는 길이었다. 꽤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떠나지 못한 미안함에 일을 핑계 삼아 바람이라도 쐴 겸 나왔다. 강릉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길에 딸이 말했다. “아빠, 근처에 BTS 버스정류장이 있데.” 평소 혼자였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곳이다. 유독 BTS를 좋아하는 딸의 말이기에 귀를 쫑긋했다. 그저 딸이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향호해변으로 운전대를 돌린 이유였다.

강릉에서 속초까지 이어지는 여느 해변이 그렇듯, 이곳 역시 모래사장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옆으로 소나무밭이 있고, 해안가와 솔밭 사이에 버스정류장이 놓였다. BTS가 이곳에서 앨범 재킷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세트를 지어서 찍고 이내 허물었는데, 그곳으로 BTS의 팬들이 알음알음 찾아오자, 강릉시가 다시 복원해 놓았단다. BTS의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기념이기도 했다. 이게 현명한 판단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강릉시 입장에서는 썩 나쁘지 않은 결정인 듯하다. 이 정류장까지 BTS 팬이 찾아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주차가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댈 만한 곳은 있었다. 아예 택시를 타고 오는 이도 보였다. 향호해변이 다른 곳에 비해 그리 번화한 곳도 아니고 편의시설이 많지도 않은데 여기를 왔다는 건 결국 이 버스정류장 덕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소나무밭 쪽으로 줄을 섰다. 수가 많지는 않았다. 대략 10명 남짓. 많을 때는 15명 이상이 모이기도 했지만, 정류장에 앉아 사진을 찍고 나면 곁으로 빠져준다.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그럼에도 좀처럼 줄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그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이 정류장이 진짜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 유명해진 게 아닐까, 했다. 주변의 벤치는 BTS 팬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칠해 두어 이곳이 성지임을 실감케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길래 딸에게 물었다. “여긴 버스가 잘 안 오네?” “아빠?” 두 눈에 담긴 감정이 보였다. 순간 온몸의 숨구멍에 전기가 찌릿하고 돌았다. 한심하다는 눈빛이었다. ‘아, 여긴 버스가 안 오는구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똑같은 시선으로 쳐다볼 것 같아서.

새로운 날을 기다리는 곳

줄을 선 이는 상당수가 외국인이었다. 개중에는 인천공항에서 강릉 오는 버스를 타고 곧장 여기로 달려왔다는 사람도 있다. 놀라울 따름인데 이해가 가는 상황. 그럴 수 있다. 그들에게 이곳은 꼭 한 번 와 보고 싶은 곳이었을 테다. 앞에 선 여자를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한 모양이다. 남자친구와 같이 온 모양이다. 둘의 대화를 들어 보니 중국어다. 그런데 본토 사람 같지는 않다. 대만 쪽도 아니다. 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가 궁금한데 괜히 두 사람의 흥을 깰까, 싶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속으로만 ‘말레이시아인가?’ 생각해 볼 따름. 한 팀씩 사진을 찍고 사라질 때마다 콩닥거리는지 줄의 앞뒤 반응이 달라진다. 곁에 선 딸아이도 마찬가지다. 두 눈에 온통 하트가 뿅뿅이다. 조금 전 나를 쳐다보던 그 감정은 녹아서 사라진 지 오래다.

시청 담당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배려심이 남다른 사람인 듯했다. 아니면 그 사람도 아미 (BTS 팬클럽) 거나. 혼자 온 사람도 휴대폰을 올려두고 셀프로 촬영할 수 있도록 거치대를 만들어 두었다. 구태여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찍어주세요.”라고 부탁하거나 뒤에 있는 사람이 구태여 “찍어 드릴까요?”라고 멋쩍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타이머를 10초로 맞춰놓고 잽싸게 뛰어 들어가서 앉아 포즈를 취하면 그만이다.

우리 차례가 왔다. 딸내미가 신나게 뛰어간다. 저 모습을 보려고 기다렸다.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저 모습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고 출발부터 들떠있던 녀석에게는 이 순간이 절정일 테다. 사진을 찍어주려고 하는데 뒤로 오렌지빛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해는 등 뒤에 높이 늘어선 태백산맥 뒤로 지지만 그 빛깔은 앞쪽으로도 번진다. 아름다웠다. 동해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저 노을과 저 미소를 보니 내 기분도 한결 나아지는 것만 같다. 지난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조여오는 듯했던 불안과 우울이 조금씩 물러가는 게 느껴진다. 해가 바뀐다고 갑자기 모든 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저 풍경에서 희망이라는 걸 품어본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으니,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내가 긍정의 힘을 믿으면 그 힘이 가져올 미래. 딸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잠시 방향을 틀었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버스 정류장은 어쩌면 희망을 기다리는 곳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목수가 굽는 바비큐

이번 강릉 일정은 사실 촬영이 목적이었다. 친구가 “너에게 꼭 소개해 주고 싶다.”라며 데리고 간 곳이 있었다. 오대산의 소금강으로 들어가는 길목, 산속에 자리한 펜션인데 여기서 바비큐를 굽고 있다는 거였다. 지난해 3월 목수로 일하던 네 남자가 이곳을 발견하고 눌러 앉은 거였는데, 여기서 바비큐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했다. 바비큐를 구울 훈연통도 직접 만들었다. 시간을 내어 그들을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순박할 수가 없었다. 각자의 사연이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서 열심히 해 보자고 시작한 일. ‘그릴웍스’라는 상호도 냈다. 그네가 도와달라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니까, 목수가 구워낸 바비큐를 촬영해 주는 일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던 거다.

지금까지 네다섯 번을 오가며 촬영했다. 이전까지는 행사에 참여도 할 겸, 행사를 기록할 겸 다녀왔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고 제대로 찍어보고 싶다길래 장비 몇 개를 주섬주섬 챙겨온 터였다. 몇 번을 봐서 이제는 저 바비큐가 어떻게 나오는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다 완성한 결과물을 어떻게 준비해서 손님에게 내는지는 보지 못했다. 생물을 훈연통에 넣고 10시간. 중간에 꺼내서 꿀을 바르거나 다른 소스를 더해서 다시 몇 시간. 그것만 해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다 구워진 고기를 자르고 짓이겨서 손님 테이블에 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바비큐를 만든 경력만 놓고 보면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연습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는 잘 보인다. 잘 훈연한 고기의 표면 둘레에 나타나는 붉은 빛의 스모크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오랫동안 은근한 열로 가둔 육즙도 칼질 후에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플레터로 받아서 먹기만 할 때는 몰랐던 바비큐의 진면모였다.

지금까지 여러 번 그릴웍스의 바비큐를 먹었지만, 매번 고심하고 고민해서 변화를 주는 모습을 여실히 느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따로 구분해 플레이팅을 내기도 하고 커다란 새우를 함께 구워서 곁들이기도 한다. 닭고기를 따로 내는 때도 있었다. 직업 특성상 전국 곳곳에 있는 바비큐 전문점을 여럿 다녀봤는데, 맛만 놓고 생각해도 이곳이 개중 가장 앞자리에 둘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 브리스킷이든 립이든 포슬포슬한 육질이 훌륭하다. 여기서 함께 일하고 있는 인원 중 한 명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쿠바로 건너가 현지 음식과 남미 특유의 타코를 공부하고 오기도 했다. 플레이팅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는 건 그의 힘이 크다.

여태 강릉 여행에서 바닷가에 늘어선 음식점만 다녀왔다면, 사천항과 주문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금강 초입의 이곳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음식은 경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정성이다. 목수들이 마음을 다해서 구워내는 바비큐가 강릉의 새로운 별미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물씬 드는 곳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랑을 받는 쇠고기는 맛도 좋지만,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이다. 이는 어린이의 성장을 돕는 데 아주 유용하다. 또한 칼륨이 많아 나트륨 배출을 촉진하므로 자연스레 고혈압을 예방한다. 칼슘과 인이 많다는 건 뼈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레티놀이 풍부해 세포 재생을 촉진하기도 하고 엽산 함유량도 많아 중추신경계 활성화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