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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중순,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 김정곤 회장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 “지금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에서 한국한의학연구원(한의연)을 다른 출연연이나 국립 부산대로 합병하려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으니 학장님이 좀 나서셔야겠다.”고 한다.

한의연은 1993년 한약분쟁을 겪으면서 한의계의 염원으로 탄생한 국가와 한의계의 귀중한 자산이다. 1992년 한의협 기획이사 시절 ‘국립한의학연구소 설립계획서’를 복지부에 제출한 적이 있었고, 그에 앞서 1981년 지도교수셨던 문준전 교수님께서는 경희대에 한의학연구소를 설립하려 하시다가 누명을 쓰고 대학에서 해직당하셨고, 이어 나도 조교직에서 쫓겨났었다. 그리고 1994년 한국한의학연구소 초대 소장 선임 면접에 문 교수님을 모시고 과천 복지부로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소장은 경희대 교수이어야 한다는 당시 분위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나는 ‘한의신문’에 “정기존내 사불가간(正氣存內 邪不可干)”이라는 제목의 글로 그러한 처사의 부당함을 피력했었다. 그에 대해 일부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들로부터 “같은 대학교수로서 너무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그런 사연을 가진 나로서 한의연의 피합병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며칠 후 김정곤 회장을 대동하고 청와대 비서실을 방문하였다.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한의연은 국민의 여망을 받아 우리 정부에서 어렵게 설립한 귀중한 자산이다. 지금 와서 아직 규모도 작고 역사가 짧은 한의연을 다른 출연연과 단순 비교하여 그 결과로써 합병을 시킨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적지 않은 손실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지하게 듣고 나서 비서실장은 “잘 알았다. 바로 교과부로 가서 차관을 만나 보시라.”고 하였다. 청와대를 나와 김정곤 회장과 함께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있는 교과부의 김창경 차관과 면담하였다. 김 차관은 웃으면서 첫 인사말로 “학장님, 경희대에서 가져 가시렵니까?”라고 하였다. 순간 ‘아, 그런 말들이 오가기는 했었구나.’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차관님, 초면에 농담이 과하십니다.”라 받았고,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그런 후에 다행히 한의연의 병합 이슈는 수그러들었다.

그런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했던 것은 한의연이 교과부 산하 출연연 기관 평가에서 3년 연속 “미흡 C”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청와대와 교과부의 방문으로 위기를 넘겼으나 문제는 그다음 해 기관 평가에서도 또 “미흡 C” 평가를 받았다.

2011년 3월 학장직에서 물러나자, 주변에서 나에게 한의연 원장으로 가라는 권고가 여러 차례 있었다. 심지어 김기옥 원장도 자신의 후임 원장으로 내가 왔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점차 마음속에는 ‘한의연 원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자라고 있었다.

그해 8월 17일 오후, 한의연 원장을 선임하는 교과부 산하 기초기술연구회 이사회가 서초동 외교센터에서 열렸다. 최종 3배수로 선정된 후보자들 가운데 마지막 순서로 이사회 면접을 마치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한의연의 마천 행정부장으로부터 선임 축하 전화가 왔다. 그 길로 문교수님 한의원에 가서 선임 결과를 말씀드렸고 “17년의 恨을 풀었다.”고 하면서 같이 기뻐하였다.

행복한 연구원 문화 조성

 잔디 운동장

2011년 8월 19일, 한의연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신임 원장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업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시급했던 것은 전임 원장이 시작했던 원내 토목공사의 마무리였다. 한번 결정이 내려지면 그 결과는 적어도 수년에서 수십 년을 간다. 마무리 공사 계획을 보니 새로 지은 한의표준센터 건물 앞 넓은 공간이 주차장으로 되어 있었다. 원내에서 가장 넓으면서도 평평한 공간을 시커먼 아스팔트 주차장으로 마감한다는 것은 정말 아니다 싶어 그 공간을 잔디 운동장으로 변경하였다. 흑색에서 녹색으로. 연구원들의 눈과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고, 나아가 거기에서는 한의연과 한의계가 주최하는 각종 체육 활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다.

 무창포 연찬회

취임 두 달 후인 10월 20~21일 1박 2일로 무창포에서 전 직원 연찬회가 열렸다. 당시 한의연은 기관 평가에서 4년 연속 미흡 평가를 받아 패배감, 열등감,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쇄신해 내겠다는 생각으로 6분짜리 “Facing the Giants” 동영상을 준비했다. 먼저 그 동영상 감상을 마치고 이어 연단에서 발언을 시작하였다. 신임 원장을 바라보는 전 직원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받으면서 순간 울컥하여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인사말과 앞으로의 포부를 차분하게 풀어 나갔다. 다행히 나의 간절했던 심정이 진솔하게 전달되었던 것 같다. 연찬회를 마치고 주요 보직자들과 함께 출입구에서 전 직원들과 포옹하였다. 전체 연구원들과 소통을 위한 첫 출발이었다. 서로 기대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2006년 Alex Kendrick 극본, 감독, 주연으로 미국 크리스천 고교 미식 축구부의 좌절과 두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한의연의 당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온고창신(溫故創新) 벽화

원내 뒷산 중턱에 새로이 들어선 동물 실험동은 폭이 45미터나 되는 회색 알루미늄 벽 대형 구조물이다. 본관 건물과 비스듬히 마주하고 있는 이 거대한 회색 벽은 마치 무채색의 폭력과도 같았다. 원장실에서 그 회색 괴물을 내다보면서 이를 오히려 한의연의 상징 조형물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경희대 미대 박종해 학장과 그의 제자인 박영균 교수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청했다.

박 교수는 1989년 경희대학교 문리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과 청년 정신의 상징인 일명 팔뚝 ‘청년(靑年)’을 제작했던 화가이다. 마침 그가 대전에서 학생들과 집단 벽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박 교수와 공동으로 밑그림 디자인을 하고 약 3주간 그의 지도 학생들이 참여하여 벽화를 완성하였다. 작품 제목은 ‘온고창신(溫故創新)’. 태초(太初)에서 단군 신화로 삼국시대 고려청자를 거쳐 허준과 이제마로, 마무리는 이중나선 구조로 엮었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 전통을 현대 생명과학과 융합하여 새로운 미래 의학을 창출한다는 의미이다.

경희대학교 문리대의 ‘청년’ 벽화

한의연 동물 실험동의 ‘온고창신’ 벽화

 도시락 간담회

원장 취임 후 바로 시작한 소통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도시락 간담회’였다. 점심시간에 연구원의 허리에 해당하는 10여 명의 선임연구원과 함께 도시락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이다. 2011년 11번, 2012년 6번, 2013년에는 9번 등 3년간 지속해서 진행하였다. 연구원 전반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신상 발언 등 가리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처음에는 30분도 지루하고 뻘쭘하다 싶었는데, 나중에는 2시간 반이 지나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원장이 새로 와서 형식적으로 한 번 해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구원들을 향한 진심이 전달되었던 것 같다. 연구원의 발전 방향에서부터 심지어 자신들이 ‘책임연구원 (Principal Investigator, PI)의 노예’라는 등 충격적인 고백까지 나왔다. 이 간담회에서 오간 대화는 모두 기록해 이슈별로 액션 플랜을 만들어 실행 과정과 결과를 체크해 나갔다.

주로 선임연구원들을 대상으로 3년간 ‘도시락 간담회’ 진행

 소속 Lab 이동

도시락 간담회에서 나온 이야기 가운데 내내 마음에 걸린 것은 자신들이 ‘PI의 노예’라는 고백이었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70여 명의 선임연구원들에게 내 개인 메일로 자신들이 원하는 1, 2, 3차 Lab을 적어 보내도록 했다. 그 결과 11명이 3차 지망에도 자신이 속한 랩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만 따로 연락하여 “가고 싶은 랩과 PI를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랩의 PI에게 “ㅇㅇㅇ 연구원이 오고 싶어 하는데 받아주겠나?”라고 물어보았다. PI들이 선임연구원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입하겠노라고 답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이 당시 속해 있던 랩의 PI들에게 “선배들이 후배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원하는 랩으로 보내주도록 하자.”고 요청하였다. 내심 염려되었으나 PI들이 순순히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즉시 10명의 랩 이동을 실시하였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1명의 선임연구원에게는 “일단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때가 11월 말이었다. 주변 보직자들이 마음 졸리면서 진행 상황을 지켜보다가 무난히 마무리되자, 모두 나에게 “너무 고생 많으셨다.”고 한다. 나로 인해 연구자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진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게 나는 조금씩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생일 축하 모임

매달 생일 축하 모임을 하였다. 생일은 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념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기념하고 축하해 주는 것은 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이다. 나에게는 WHO 근무 시절 사무처로부터 받았던 생일 축하의 고마움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도시락과 함께 생일 축하 케이크를 나누면서 편하게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대화를 나누었다. 연구원 각자는 존중받아야 할 주체이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야 한다.

 Inter-lab Seminar

출연연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연구자 사이의 칸막이를 허물기 위한 ‘인터랩 세미나’는 원내에서의 공동 융합연구를 도모하는 기반이 된다. 3년간 모두 20차례 진행되었다. 다른 부서의 연구를 서로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고, 장비 문제를 포함하여 서로 협업하는 기회가 되었다. 상생하는 연구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었다.

 상향식(上向式) 보직자 선임

리더의 성공적인 경영은 인사(人事)와 재정(財政)에 달려 있다. 재임 3년간 두 차례 인사를 단행하였다. 취임하면서는 기존 보직자 교체 없이 그대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서서히 연구원 업무에 적응하면서 주요 보직자들에 대한 파악도 되었고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림을 추진하기 위한 인사를 취임 6개월 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보직자들은 원장의 비전을 공유해야 하고 같이 일하는 부서원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여야 한다. 특히 인사는 소통의 기반이다.

경영 행정 부문 보직자 인선을 위해서 해당 부서 비보직자들을 사전 예고 없이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아 익명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보직자들을 적어내도록 했다. 그러고는 다음날 바로 그들 의견을 반영하는 보직 인사를 시행하였다. 다행히 내가 마음에 둔 보직자들과 비보직자들이 추천했던 보직자들의 면면이 거의 일치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두 차례 인사에서 모두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그간 보직에 관련된 각종 투서와 불만을 일소하는 효과를 거뒀고, 보직자-비보직자 사이에 신뢰와 책임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내외부의 평가였다.

 문사연(問思筵)

‘KIOM 문사연(問思筵)’이라는 이름으로 연구원에서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사안들을 선정하여 공개 토론의 장을 펼쳤다. 논문 저작권 (authorship)이나 인센티브같이 다소 내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슈를 전 직원과 함께 합의안을 도출하려 노력했다. 덕분에 한의연의 정체성과 연구의 방향을 결정하는 온고창신(溫故創新)이라는 한의연 특유의 연구모델을 고안해 내는 성과도 거두었다.

 백북스 클럽

취임 이듬해인 2012년 1월부터 월례 독서 프로그램인 ‘백북스 클럽’을 진행하였다. 저자를 초청하여 강의를 듣고 문답하는 형식이었다. 어린 학생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독서해야 한다. 특히 연구자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 연구도 하여야 하지만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의 기회로서 독서 활동이 필요하다. 이는 경희한의대 학장 재직 시절에 시행했던 ‘독이고(讀而考)’라는 독서지도 프로그램과 맥을 같이 한다.

 문도(聞道)

‘문도(聞道)’라는 명사 초청 강연 시리즈를 진행하였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연자는 2013년 5월의 초청 강사였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강대희 학장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학장직을 연임하는 등 통찰과 추진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원장실에서 그는 한의연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상호 협력 관계를 제안하였다. 나의 마음을 읽는 듯했다. 그러나 실무 추진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당시 나는 그가 서울대 총장감 그 이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몇 년 후 그는 서울대 총장 최종 후보자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등산

매년 봄가을, 전 직원이 계룡산 등반을 하였다. 힘들게 산행하면서 땀을 흘리고 성취감을 공유하는 것은 동료의식을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에피소드로, 연구 부문의 한 보직자가 등산화나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은 채로 등산을 해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음 해에도 또 구두를 신고 등산을 왔길래 다음 날 바로 그를 보직에서 해임하였다.

보직자는 보편적 사고와 언행을 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남다르게 튀는 방식을 고집하면 그와 함께 지내는 부서원들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그에게 더 이상 부서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는 자신이 왜 등산대회 이후 갑자기 해임되었는지 이유를 알는지는 모르겠다. 정기 산행 외에도 산을 좋아하는 연구원들과 점심시간에 한의연 뒷산인 화봉산을 거의 매일 오르고 내렸다. 왕복 30분. 건강한 심신을 위해서이다.

© 최승훈 교수의 나의 세계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