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교수의 한국의 건강문화

나의 전공은 한의학 중에서도 예방 한의학이다.

옛날 사람들의 건강법.
의료 이전에 불로장생, 무병장수를 꿈꾸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건강문화-양생.
최첨단 의료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이지만 현대인들에게 옛날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끊임없는 몸 관찰을 통해 알아낸 ‘몸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바탕으로 한 ‘몸을 위로하는 방법’이 더더욱 절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건강문화연구센터에서는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내재된 건강지향적 요소를 발굴하고 콘텐츠화하여 보급하는 일을 한다. 사실 티테라피도 우리의 전통 다도(茶道), 다례(茶禮) 문화와 몸에 좋은 것을 끓여 마시는 우리의 주전자 문화를 현대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한국식 약선을 재정리하고 있으며 우리 조상들의 풍류 사상과 조선의 유학자들이 평생을 바쳐 몰두한 수양법 등을 재해석해서 현대인들을 위한 스트레스 케어법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학력]
-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박사학위 취득 (한의학)

[경력]
- 현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 현 건강문화연구소 소장
- 전 티테라피(카페+한의원+건강문화교실) 대표이사

[저서]
- 2011 『한의사의 다방』

이상재
이상재

최첨단 의료기술이 발전해가고 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선조들의 끊임없는 관찰로 알아낸 방법을 통해 몸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제가 운영하는 건강문화연구센터에서는 한국전통문화에 내재된 건강지향적 요소를 발굴하고 콘텐츠화하여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프로필 바로가기

국화차

 

LSJ07-01.png


이미 꽃은 지고 세상은 온통 낙엽으로 물들어 추운 겨울을 나기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정리하는  시기가 왔다. 바로 이때 피는 꽃이 국화다. 국화는 가장 늦게 피고 가장 늦게 져서 피어 있는 시간이 길다. 그래서일까 옛사람들은 국화를 연년익수불로약(延年益壽不老藥: 수명을 늘려주고 늙지 않게 하는 약)으로 여겼다. 국화가 필 즈음이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


국화를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의 고뇌와 방황을 거쳐 이제는 그것을 담담히 관조하는 자리에 서 있는 중년의 모습을 국화의 이미지와 닮았다고 했다. 봄날 소쩍새의 울음과 여름날 천둥번개를 이겨내고 무서리가 내리는 늦은 가을이 되어서야 피어나는 이미지가 누님의 원숙한 아름다움과 같다고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기억이다.


국화는 그런 꽃이다.  


기운을 중시하는 한의학적 관점에서 이 청초한 이미지는 그대로 국화의 약효로 이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일상의 번잡한 생각으로 닳아 오른 머리와 얼굴의 열을 식혀주고, 흥분을 가라앉혀 준다. 일과 시간에 쫓겨 하루하루를 사는 우리에게 초조함과 조급증 대신에 느긋함을 선사해 줄 수 있는 것이 국화차 한잔이다. <동의보감>에는 감국(甘菊)이라고 하여 간의 열을 식혀주는 작용이 있다고 되어 있다. '간(肝)의 열'은 옛날 사람들의 말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스트레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울화가 치민다’, '간에 불(열)이 난다', 혹은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 선비들의 국화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조선 시대 강희안의 <양화소록>이라는 책에도 국화를 매화, 대나무, 연꽃과 함께 일품(一品)에 올렸다. 꽃과 나무를 기르는 방법을 쓴 이 책에서 “꽃을 기르는 것은 마음과 뜻을 굳건히 하고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을 기르는 데 있다.”라고 하면서 국화를 기르는 멋진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조그만 그릇에 물을 담아 뿌리 근처에 놓고 좁고 길게 오린 창호지에 자신의 뜻을 적어 끈 모양으로 꼬아서 한쪽은 국화 뿌리에 감아 놓고 한쪽 끝은 물그릇에 담가 두어 자신의 뜻이 종이에 적셔진 물을 따라 국화에 배이게 하는 방법이다. 국화와 어울리는 유유자적한 선비의 모습이다.


국화의 덕이 우리에게 필요해서일까? 언제부턴가 우리 곁에 국화가 많아졌다. 거리의 조경에 국화 화분이 많아졌고, 언제부턴가 전통찻집에 국화차가 메뉴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뿐인가. 해마다 이맘때면(10월 말-11월 중순) 전국은 국화축제로 떠들썩하다. 창원의 가고파 국화축제, 익산 천만 송이 국화축제, 고창 국화축제, 함평의 국향대전, 안동 봉정사 국화 대향연 등 어림잡아도 수십 곳에서 국화축제가 열린다. 형형색색의 꽃 모양과 은은한 향이 눈과 코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국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최근에는 차로도 유명해졌다. 국화차를 만들어 파는 곳이 많아져서 시중에서 구하기도 쉬워졌다. 국화축제를 하는 곳에서도 의례히 국화차를 판매한다. 국화차, 들국화차, 구절초차 등은 모두 국화를 기본으로 한 차들이다. 시중이 국화차는 모양이 약간씩 다르지만 대부분 노란 소국으로 만들어졌다. 나도 국화차를 만들면서 궁금한 점이 많이 생겼다. 차로 만들 수 있는 국화는 어떤 것일까? 우리가 꽃가게에서 흔히 보는 노란 소국으로도 차를 만들 수 있을까? 무엇보다 <동의보감>에 나와 있는 ‘감국(甘菊)’은 어떤 국화인지가 궁금했다. <동의보감>에 감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국화의 종류가 매우 많은데 오직 홑꽃잎(單葉)이면서 작고 누르며 잎은 진한 풀빛이고 작으며 엷다. 늦은 가을에 꽃이 피는 것이 진짜이다. 야국(野菊)은 의국(薏菊)이라고도 하는데 감국은 달고 야국은 쓰다. 감국은 오래 살게 하고 야국은 기운을 깎아내린다.


일반적으로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송이가 작고 향이 진하며 쓴맛이 나는 들국화를 야국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감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동의보감>에 감국은 홑꽃잎이라고 되어 있지만 요즘 한의원에서 쓰는 감국은 모두 겹꽃잎 국화다. 시중의 국화차도 홑꽃잎이 아니고 겹꽃잎이다. 요즘의 감국은 꽃잎의 모양보다는 그 의미에 충실하여 쓴맛이 덜하고 단맛이 나는 국화로 보는 것으로 통일된 듯하다. 그럼에도 국화 품종을 연구하는 농업기술센터 연구원의 말에 의하면 문헌에 나오는 감국이 지금도 우리나라 해안지방에 자생하고 있고 일반 들국화보다는 약간 크면서 꽃잎을 뜯어 씹어보면 단맛이 난다고 했다. 현재 다양한 방법으로 감국의 품종을 개발 중이라고 했다. 합천에서 진짜 감국을 가지고 국화차 만들기를 시도했던 분의 말로는 꽃잎이 향과 맛은 괜찮은데 홑겹이라 차를 우릴 때 모양이 예쁘지가 않고 단맛이 나서 벌레가 많아 만들기를 포기하고 지금은 안동에서 구해온 국화품종으로 차를 만들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시중의 국화차는 모두 안동 봉정사에서 왔다고 하는 옥국, 동국, 금국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품종으로 거의 통일된 듯하다.


LSJ07-02.png


이 국화차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봉정사로 향했다. 안동 봉정사 가는 길에 노랗게 덮인 국화밭을 만났다. 사진으로만 봤던 프로방스의 라벤더밭에 견줄만하다고 생각했다. 산 중턱을 노랗게 덮은 국화밭은 장관이었다. 국화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들린 만휴라는 찻집 주인장으로부터 안동 국화와 국화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안동의 국화차는 돈수 스님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국화차 이야기에 봉정사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국화 품종에서부터 끓는 물에 데쳐서 국화차를 만드는 방법까지 모두 스님이 전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곳에서 나오는 국화차 브랜드인 금국, 가을신선, 황국 등이 스님의 가르침으로 탄생했다고 한다. 국화차 패키지에 스님이 그린 그림도 담겨있다. 안동의 국화차 산업은 날로 번성 중이었다. 국화차 재배농가가 늘고 국화차를 만드는 농원도 늘고 있는듯했다. 안동뿐 아니고 고창, 합천, 하동 등에서 나오는 국화차도 안동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여러 가지 궁금증이 풀렸다. 그러고 보니 국화차가 시중에 나온 것도 10여 년이고 그 만드는 방법도 예전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증보산림경제(1766)>, <규합총서(1809)>, <임원경제지(1827)>, <조선요리제법(1917)>, <한국요리백과사전(1976)> 등에 국화차 만드는 법이 나오지만, 지금의 방법과는 많이 다르고 차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국화차를 만들어낸 스님이 새삼 위대해 보였다.


LSJ07-03.png

국화는 꼭 오후 3시에 마시는 차다.
지구도 제일 뜨거워지고 내 몸도 뜨거워지는 시간 오후 3시.
생각과 고민으로 상기된 내 머리와 눈을 식혀주기에 좋은 차가 바로 국화차다. 

눈이 뻑뻑하고 얼굴이 상기될 때
국화 5송이를 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잠시 후
국화꽃이 노랗게 피어오른다.

노오란 국화차 한 모금
그리고 눈으로 달아오른 몸과 마음의 열기도
국화차 한 모금과 함께 가라앉는다는 상상을 해 보자.

국화차를 마신다는 것은 곧 명상이다.
또 한 모금에 창밖을 내다보는 이미지가 국화차와 어울리는 모습이다.

이 계절, 국화차 한잔과 함께 내 몸과 마음에 노오란 가을을 선물하기를 바란다.

 


ⓒ 이상재 교수의 한국의 건강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