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CRIC

피는 물보다 진하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집안 생활도구가 몽땅 흉기로 돌변하여 피를 한 양동이씩 쏟아 내었다. 좋은 기운을 받고 살아도 힘이 달리는데 어찌나 잔인하고 끔찍하던지 심장은 후들거리고 온몸은 떨린다. 전쟁, 범죄영화도 마찬가지라 무서워 혼자 딴생각을 해본다. ‘영화에서 쓰는 피는 돼지피? 아님 케첩일까?’

피는 케첩보다는 묽고 고추장보다는 안 맵고 물보다는 3배나 진하다. 팔뚝 정맥에서 혈액을 뽑아서 항응고제가 들어있는 시험관에 가만히 세워두면 두 개의 층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검붉게 보이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 무거운 혈액 세포들은 밑으로 가라앉는다. 위층에는 혈장이라는 노랗게 말간 액체가 뜬다. 간장처럼 혈장 속에는 간에서 합성된 알부민이 들어있어서 혈압과 체액균형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혈청글로불린 단백질은 항체생산에 관여하고 피브리노겐은 상처가 났을 때 피를 응고시킨다. 그밖에 홀몬, 항체, 효소, 나트륨, 염소, 칼륨, 칼슘, 요오드와 같은 무기질과 아미노산, 포도당, 지방, 콜레스테롤, 요소, 요산과 같은 유기질 및 노폐물이 섞여 있다.

혈액세포 삼총사-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피 성분 중에서 가라앉은 건더기 혈구 성분은 약 45% 정도인데 피 한 방울 속에는 약 3억 개의 적혈구가 있다. 피가 붉게 보이는 것은 모두 이 적혈구 때문이다. 적혈구 속에는 산소를 운반하는 혈색소인 헤모글로빈이 3억 개나 들어있다. 한 개의 헤모글로빈은 4개의 산소 분자와 결합하니 적혈구 하나는 무려 산소 12억 분자를 운반한다. 물 100mL에는 산소가 5mL가 녹아있지만 같은 액체라도 피 속에는 헤모글로빈이 있어 산소의 결합 능력이 40배나 높다. 대단 기특.

성인의 몸에 4-5g의 철분이 들어있다. 몸속에 5센티 길이의 쇠못이 들어있는 셈. 철분은 대부분 소장 점막에서 흡수되어 55%는 적혈구의 헤모글로빈 안에 들어 있고 나머지는 장점막 세포, 간, 비장, 골수에 저장된다.

철분이 부족하면 헤모글로빈을 만들기 어려워지고 적혈구 수와 크기가 줄어들어 빈혈 증상이 나타난다. 아래 눈꺼풀 안쪽을 살펴보면 핏기가 없고 손톱이 꺼지고 숨이 차고 맥이 빨라지고 손발이 저리거나 두통, 현기증, 저혈압 증상이 나타난다. 여자들은 특히 과다 월경. 임신, 출산으로 인해 철분 부족이 생기기 쉬워 옛날에는 무쇠솥의 누룽지를 박박 긁어서 철분을 보충했었다.

출혈이나 빈혈에 다른 사람의 혈액세포를 수혈받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장기이식과 마찬가지로 고마운 일이다. 백혈구는 1일, 혈소판이 2주를 생존하나, 혈구는 4개월이나 오래 살며 혈액형만 맞춰주면 거부반응 없이 헌혈을 할 수 있다. 적혈구가 핏속을 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 같은 축복!

백혈구는 몸속의 군대나 경찰의 임무를 맡고 있다. 보통 때는 피 한 방울에 30-60만 개 정도이다가 외부에서 박테리아 등 침입자가 들어오면 재빨리 숫자를 늘려 출동하여 제거 작전을 수행한다. 수명은 기껏해야 하루 정도. 

백혈구 중의 가장 많은 과립구는 세포 알갱이 속에 공격 무기를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백혈구는 대식세포로서 침입자들을 큰 덩치로 잡아먹고 정보를 림프구에 알려서 면역시스템을 가동시킨다. 림프구는 면역시스템의 중요한 임무를 맡은 작은 거인들이다.
 
혈소판은 가장 작은 혈액세포지만 다쳐서 상처가 나면 재빨리 손상된 혈관 벽에 달라붙어 엉켜서 출혈을 멎게 해준다. 동시에 혈액 속의 혈액응고 인자들을 끌어모아 덩어리를 만들어 확실하게 지혈을 마무리한다. 이후에는 손상된 혈관을 수리하고 보수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킨다. 백혈병이나 재생 불량성 빈혈, 비장종대에 혈소판감소증이 생기면 자주 멍이 들고 지혈이 되지 않아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 혈소판 수혈은 이들에게 생명줄이다. 요즘은 혈소판 성분만 골라서도 헌혈할 수가 있으니 부담이 없다.

피는 무서운 것도 혐오물질도 아니다. 본질은 생명이고 사랑이다. 살면서 다치고 까지고 피 흘리고 아기 낳고 월경할 때마다 위험에 봉착한다면 인간이 어찌 살아남았으랴. 피를 보면 목숨이란 몸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세포들의 헌신과 연대와 노력 덕분임을 새삼 깨닫는다. 귀하고 소중하다. 정신 우월적인 태도나 몸에 대한 무시와 천대는 옳지 않다. 피들의 찐한 사랑에 좋은 식습관, 삼시 세끼로 보답해야 예의가 아닐까?

© 이유명호 원장의 애무하면 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