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승남
[Wassup Hopkins!]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의사학교실에서 방문학자로서 한국 한의학을 토대로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칼럼을 통해 연구와 관련된 내용 뿐 아니라, 볼티모어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한의사 이태형 프로필

AAHM 2015

 

지난 4월 30일부터 5월 3일까지, 예일 대학이 있는 뉴헤이븐에서는 제88회 미국의사학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Medicine; AAHM)가 개최되었습니다. 저는 작년 시카고에서의 학회에 이어 두 번째로 이 학회에 참석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AAHM은 존스홉킨스 의사학교실 구성원들에게는 반드시 참석해야 할 학회로 여겨집니다. AAHM의 공식 저널이 존스홉킨스 의사학교실에서 발간하는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AAHM과 존스홉킨스 의사학교실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다수의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이 학회에 참석하였으며, 저 또한 한국에 귀국하기 전에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학회에 참여했습니다.


학회의 첫날은 간단한 리셉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학회장에 모여 반가운 얼굴들도 확인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저를 소개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학회가 미국의사학회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관련 연구자의 비중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동아시아 의학 관련 별도의 세션이 구성된 만큼 저 또한 평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연구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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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회는 총 45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AAHM은 미국 내 가장 큰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는 의사학회인 만큼 다양한 주제의 발표들을 각 세션에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Epidemic Disease, Arabic Medicine, Tropical Medicine, Colonial Medicine, Hunger and Nutrition, Medical Technology, Modern Medical Paradigm, Medicine in Translation, Ethics, Medicalization,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Asian Pharmaceutical Research, Public Health, Surgery, Big Data, Genetic Theories, Bacteriology, Health Policies, Race, Pharmacy in Eurasia, Medical Education, Professionalization, Visualization of Medical Knowledge 등 다양한 주제들이 논의되었습니다. 본래 미국 의사학계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어 온 주제들 외에도 Asian Medicine, Arabic Medicine 등과 같이 다양한 지역을 아우르는 세션을 구성하려는 노력이 엿보였으며, Medical Technology, Genetic Theories 등과 같이 의사학을 통해 보다 최근의 상황을 다루고자 하는 노력도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Big Data 등의 방법을 의사학 연구에 적용해 보려는 새로운 시도도 재미있었습니다.


여러 세션 가운데 특히 흥미로웠던 세션은 ‘Roundtable on Vernacularizing Medicine’이었습니다. ‘vernacularization’이라는 개념은 ‘자국어로 옮기다’, ‘지방어로 고치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특정 지식 혹은 술기가 다양한 공간 혹은 시간의 변화를 따라 어떻게 전달되고 변화해가는지를 추적하려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이 개념은 언어학 분야에서 언어의 변화과정을 논의할 때 사용되는 것이었지만, 사학 분야, 특히 문화사 (Cultural History) 분야에서 이 개념을 차용하여 분석의 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 세션에서는 5명의 각기 다른 분야를 다루는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다양한 의학적 지식이 어떻게 ‘vernacularize’하게 되었으며, 이들 개념의 변화를 ‘vernacularization’이라는 공통된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를 함께 논하였습니다.


존스홉킨스대학의 Mary Fissell은 17세기 영국의 Nicholas Culpeper라는 치유자를 소개하였으며, 위스콘신-매디슨대학의 Pablo Gomez는 17세기 서아프리카의 Ardra라는 제국의 노예였던 Bernardo de Saavedra의 치유 기술을 추적하였습니다. 또한 듀크대학의 Nicole Elizabeth Barnes는 20세기 초 중국에 존재하였던 전통적 방식의 조산사들이 새롭게 도입된 세균설에 기초한 교육을 받은 조산사들에 의해 받았던 비판과, 이로 인해 변화하는 중국 내 출산 문화의 변화를 다루었습니다. 트렌트대학의 Jake Walsh Morrissey는 중세시대 영국의 도미니칸 수도회 수도사였던 Henry Daniel이 라틴 의학을 어떻게 새롭게 변화시켰는지를 소개하였습니다. 펜실베니아대학의 Projit Bihari Mukharji는 20세기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서양의학의 치료기술들이 어떻게 변화하여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위 세션은 다섯 명의 연자들이 한 시간 반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의학사 전반에 걸친 공통된 이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먼저 의학 지식의 전파와 활용은 특정한 시간 속 각 지역의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고정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각각의 ‘process’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 공통된 의견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다 깊숙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맥락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universal knowledge나 standardization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연자들의 발표를 들으며 ‘vernacularization’ 개념을 제 연구 분야인 20세기 한의학 현대화 과정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지 생각해보았습니다. 20세기 초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서양의학으로 인해 새로운 의학적 역학관계를 구축해야 했던 한의학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도 국가 의료체계 내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거쳐왔습니다. 또한 전통의학 현대화 과정 가운데 중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미국 및 유럽의 국가들과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보다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서양의학, 한의학 혹은 중국 중의학, 한국 한의학, 일본 캄포의학과 같은 고정된 관점에서 각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들이 주고받는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각각의 특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이번 AAHM은 공식적인 홉킨스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행사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홉킨스 의사학교실은 AAHM 학회를 마지막으로 봄학기의 공식 일정을 마무리하며, 이후 여름 방학 동안에는 각자 개인 연구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저는 이번 여름 방학 동안 한국에 귀국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 학회를 통해 홉킨스 구성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바쁜 학회 일정 가운데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의사학교실 Director인 Randall Packard 교수님은 뉴헤이븐은 피자로 유명한 도시이기 때문에 홉킨스 구성원들끼리 ‘Frank Pepe Pizza Napletano’라는 곳으로 피자 성지순례를 떠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곳의 피자 가운데 ‘white clam pizza’는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메뉴라고 합니다. 높은 위도로 인해 마침 활짝 만개했던 벚꽃과 함께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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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AAHM은 동아시아 의학 분야에 대해서도 별도의 세션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영어권, 그중에서도 미국의 동아시아 의학자들과 교류하는 데 있어서 AAHM 학회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세션으로는 ‘Emergence of Modern Medical Paradigms in an Evolving China’, ‘Asian Pharmaceutical Research’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세션에서 동아시아 관련 논의가 오갔습니다. 특히 오클라호마 대학의 Miriam Gross 교수님과 듀크 대학의 Nicole Elizabeth Barnes 교수님과 함께 나누었던 논의가 즐거웠습니다. Miriam Gross 교수님은 중국의 문화혁명이라는 특수한 기간에 형성된 ‘의사’ 개념들을 분석하였는데, 서양의학과 중의학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의학 전문가가 정부 주도로 형성되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감사했던 것은 앞으로의 제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시고자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동아시아 관련 연구는 여전히 비중이 큰 편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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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학회였습니다. 미국에 와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연구 방법이 공유되었을 때 아무리 특수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공통된 학문의 장 속에서 함께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연구자들과 함께 학문적 교류를 할 때 더 많은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한의학을 전공했다는 특수성이 때로는 저 자신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더욱 넓은 학문적 담론 속에서 한의학의 특수성을 바라볼 경우 더 많은 학문적 공헌을 할 가능성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을 확보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 한의사 이태형의 Wassup Hopk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