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교수의 한국의 건강문화

나의 전공은 한의학 중에서도 예방 한의학이다.

옛날 사람들의 건강법.
의료 이전에 불로장생, 무병장수를 꿈꾸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건강문화-양생.
최첨단 의료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이지만 현대인들에게 옛날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끊임없는 몸 관찰을 통해 알아낸 ‘몸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바탕으로 한 ‘몸을 위로하는 방법’이 더더욱 절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건강문화연구센터에서는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내재된 건강지향적 요소를 발굴하고 콘텐츠화하여 보급하는 일을 한다. 사실 티테라피도 우리의 전통 다도(茶道), 다례(茶禮) 문화와 몸에 좋은 것을 끓여 마시는 우리의 주전자 문화를 현대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한국식 약선을 재정리하고 있으며 우리 조상들의 풍류 사상과 조선의 유학자들이 평생을 바쳐 몰두한 수양법 등을 재해석해서 현대인들을 위한 스트레스 케어법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학력]
-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박사학위 취득 (한의학)

[경력]
- 현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 현 건강문화연구소 소장
- 전 티테라피(카페+한의원+건강문화교실) 대표이사

[저서]
- 2011 『한의사의 다방』

이상재
이상재

최첨단 의료기술이 발전해가고 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선조들의 끊임없는 관찰로 알아낸 방법을 통해 몸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제가 운영하는 건강문화연구센터에서는 한국전통문화에 내재된 건강지향적 요소를 발굴하고 콘텐츠화하여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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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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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차는?


조선왕조실록에는 30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차가 나온다. 시기적으로는 중종 때 상지차와 오미자차가 처음 나온 이후에 영조, 정조, 순조 때 가장 많은 차가 등장한다. 차로 만들어진 재료로는 인삼, 황기, 석창포, 복령, 귤피, 계피, 생강, 오미자, 금은화, 목통, 송절, 소엽, 인동, 향유, 상지, 오가피, 연육, 산사, 길경, 죽여, 죽엽 등이 있다. 주로 한두 가지의 약재로 구성된 차가 많았으나 한약 처방을 차로 해서 마신 경우도 볼 수 있다.



인삼차


조선왕조실록의 다양한 차 중에서 가장 여러 번 등장하는 차는 인삼차다. 삼차(蔘茶, 參茶), 인삼차(人蔘茶, 人參茶)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현종 때부터 애용되기 시작하여 영조 때 가장 많이 쓰였다.


인용 1-올리브.jpg 환후가 날로 위중해지므로, 임금의 기품(氣稟)이 본디 청약(淸弱)하다 하여 삼다(蔘茶)를 쓰려 하였다. <영조 4년 11월 8일>


인용 1-올리브.jpg 동조의 환후는 담증(痰症)이 있음으로 인하여 원기(元氣)가 갑자기 가라앉은 것이었다. 인하여 삼다(蔘茶)를 달이도록 명하고, 잇달아 올리게 하였더니 차츰 조금 효과가 있었다. <영조 33년 2월 27일>


인삼차는 주로 몸이 약하다거나, 원기가 부족해졌다거나, 피곤하다거나, 맥이 약하거나 할 때 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임금의 임종 시에도 급박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인삼차를 복용하게 했던 것 같다. 현종, 숙종, 경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임금의 승하하기 몇 일 전부터 승하하는 날까지 기사에 인삼차가 등장한다.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구급의 목적으로 인삼차가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외국 사람들에게 알려진 한국의 대표 차도 인삼차다.
구글 트렌드에서 ‘Korean Tea’를 검색해보면 연관 검색어로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이 Ginseng Tea다.



인삼차 블렌딩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삼차는 인삼 단독으로도 쓰였지만 다른 재료와 혼합해서도 사용되었다. 삼귤차, 삼령차, 인삼황기차, 인삼석창포차, 사미차 등 이른바 인삼 블렌딩 차들이다. 이 중에 삼귤차는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차로 인삼과 귤피를 함께 넣어 끓인 차다. 삼령차는 인삼과 복령, 인삼황기차는 인삼과 황기, 인삼 석창포차는 인삼과 석창포, 사미차는 진피, 맥아, 인삼, 호두를 블렌딩한 차다.


인용 2-노랑.jpg 혜경궁께서 복용할 삼귤차를 달여 들이도록 명하고, 또 이유고(梨乳膏)를 달여 들이도록 명했다. 또 한 냥쭝의 인삼속미음을 달여 들이라고 명했다. <순조 18년 12월 15일>


인용 2-노랑.jpg “크게 보(補)가 될 효험으로는 지금 드시고 계시는 황기인삼차(黃茋人蔘茶)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으나, 만일 탕제(湯劑)를 겸해 드신다면 효험이 반드시 배로 나타날 것이다.” 고 해서, 마침내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지어 올린 것이다. <현종 10년 11월 2일>


인용 2-노랑.jpg “사탕원(砂糖元)을 들이자마자 또 사미차(四味茶)를 청하니 내일은 또 무슨 약과 무슨 차를 계청하려고 하는가. 의관(醫官) 중에 허준(許浚)은 실로 의술에 밝은 양의(良醫)인데 약을 쓰는 것이 경솔해 신중하지 못하다. 이러한 뜻을 알고서 처방하지 않아선 안 된다.” <선조 40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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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인삼 사랑, 한국의 보양 문화를 만들다


특히나 영조의 인삼 사랑은 유명하다.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장수(83세)한 영조는 인삼이 양기를 보해준다고 믿고 인삼차를 상복하였다. 그가 72세 때 1년 동안 복용한 인삼이 20근이 넘는다는 기록도 보인다.


인용 3-붉은.jpg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얻은 것은 인삼(人蔘)의 정기(精氣)인데, 1년간 진어(進御)한 것이 몇 근(斤) 정도인가?” 하니, 여러 의원(醫院)들이 말하기를, “거의 20여 근입니다.” 라고 하였다. <영조 41년 12월 29일>


요즘은 연예인이 뭐 한다고 하면 금방 유행이 되는 세상이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문화가 유행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영조가 자신이 받은 치료법을 사람들이 따라 하는 것을 걱정하는 대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인용 3-붉은.jpg “내가 접때 한 번 추석환(秋石丸)을 먹었는데 사방에서 모두 이를 본떴다. 심지어 고양이의 가죽이 담병(痰病)에 좋다는 말을 듣고 나에게 권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내가 한 번 취하면 고양이는 앞으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영조 16년 1월 25일>


영조가 인삼차를 즐겨 마신다는 소식은 민간으로 퍼져 크게 유행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삼을 복용하게 됨으로써 인삼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인삼가격이 폭등하기에 이르는데 18세기 후반 유만주의 일기 <흠영(欽英)>에 이런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용 3-붉은.jpg 인삼은 동방의 지금 세상에서 제일의 보배이다. 대개 지금 세상에서 그것이 사치스러운 것이 되었으니 값이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숙종 말년에 인삼 1냥(兩)이 3, 4냥에 불과했는데, 영조 초년에 이르러서는 인삼 1돈(錢)이 3, 4냥이어도 오히려 비싸다고 하지 않았다. 영조 대부터 어삼(御蔘) 이후에 임금이 쓰는 나삼(羅蔘) 1돈이 5, 60냥이고, 사대부 집에서 쓰는 약간 열등한 것으로 1돈에 16, 7냥이다. 매우 가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록 여항이라도 먹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이 변했음을 볼 수 있다.

세상 의원의 처방에는 반드시 인삼, 녹용, 계피, 부자가 나오니, 이는 즉 시체(時體)의 의원의 시체의 약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환자나 옆에서 보는 사람이 모두 그것을 약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의리(醫理)와 약리(藥理)가 일찍이 이 같은 적이 없었다. 인삼, 녹용, 계피, 부자를 마땅히 써야 할 환자와 쓰지 말아야 할 환자가 모두 함부로 사용하니 어찌 약체(藥體)를 이루겠는가? <김정선의 ‘조선 후기 내의원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의학 경향’에서 재인용>


조선 후기에 왕실에서 시작된 보양 문화는 민간으로 확산되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몸을 보하는’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삼용’, ‘인삼녹용’, ‘보약’이라는 말이 한약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보양식’이라는 말도 아주 흔한 말이 되었다. 사실 한약을 보약이라고 인식하는 것도 우리나라의 독특한 현상이다.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한약을 보약으로 인식하지 않는듯하다.



© 이상재 교수의 한국의 건강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