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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아 한라산을 향해 달렸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을 지나 초원지대를 거쳐 눈 앞에 펼쳐진 숲. 제주의 자연이 숨겨둔 아름다움이 펼쳐졌다.

한라산이 숨겨둔 비경

제주를 온전히 즐기려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는 시점이 제격이다. 관광객에 치이고 높은 물가에 치이는 시기가 지나면 한적한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이들은 여름이 지나야 진짜 휴가를 즐긴다.

제주도의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그럼에도 아직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 많다. 그런 곳을 찾을 때면 동행한 이들에게서 “제주에 이런 데가 있어?”라는 소리를 듣곤 하는데, 대체로 오름이 그런 곳인 경우가 많다. 오름, 하면 둥글둥글한 모양새를 연상하게 된다. 사실 그런 오름은 제주도 곳곳에 산재한 360개의 오름 중 일부일 뿐, 산처럼 보이는 제주도 안의 모든 지형이 다 오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오름의 정체를 따져보자면 작은 화산체다. 사전에서는 한라산 기슭에 분포한 소형 화산체라고 정의한다. 기생화산, 측화산, 화산쇄설구, 분석구 따위의 단어가 따라붙는데, 쉽게 말하면 화산이 터지면서 날린 용암 등의 물질이 분화구를 중심으로 쌓인 것이다.

근래 오름을 향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오름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적잖게 늘었다. 물론 개중에는 일반인의 발길을 허락한 곳도 있지만, 진입이 통제된 곳도 꽤 있다. 오름은 아직도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지 않다. 갈 때마다 서로 다른 오름의 매력을 만나곤 하는데, 이번 제주여행에서 만난 이승악오름도 그랬다. 처음 이름을 듣고 떠올렸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곳이다. 현지 사람들은 이승악오름을 이승이오름, 이슥이오름이라고도 부른다.

이승악오름을 알게 된 건 서귀포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지인 덕분이었다. 남원읍 바닷가에서 ‘시류객잔’이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젊은 사진작가 김병준 씨. 그는 매일 아침 6시면 손님들과 함께 이승악오름에 올라 함께 산책을 즐기고 사진을 찍어준다. 추억을 남기는 이 독특한 아침 산책이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면서 이제는 아침 산책을 기대하며 찾아오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중이다. 이야기를 듣고 이승악오름을 찾아봤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이승악오름의 정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있다 한들 너무나 빈약했다. 김병준 작가는 “가보면 안다. 한라산이 숨겨두고 있는 비경.”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의 곁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밤을 흘려보내는 동안 머릿속은 이승악오름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추억이 깃든 사려니숲

늦게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눈이 반짝 떠졌다. 아침 5시 30분.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더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밖에는 오름에 같이 갈 투숙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새에 카메라를 챙기고 길을 나선다. 차 두 대에 10여 명이 나눠 타고 한라산을 향해 달렸다. 내비게이션의 안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의 골목을 따라 구불구불 질주한다. 아직은 살풋 잠이 덜 깬 마을 사이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법한 작은 도로를 따라 5분가량 더 올라가니 마침내 목적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이곳까지 15분쯤 걸렸을까.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이승악오름이 있었다.

“이승악오름은 사려니숲의 일부이기도 해요. 사려니숲을 가본 분은 아마 비슷한 인상을 받으실 수도 있을 거예요. 삼나무 길이 정말 예뻐요. 특히 아침에 숲 사이로 햇살이 내려올 때 빛내림이 아름답습니다.”

기대를 더하는 김병준 작가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길 앞쪽으로 걸어가던 일행이 감탄을 내뱉는다. “우와!” 길 초입부터 빛내림의 향연이다. 여기저기에서 나뭇가지를 피해 빛이 쏟아진다. 굳이 이른 아침을 택한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원시림에 가까운 이 숲은 수십 년간 간직했던 매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사람의 때가 많이 묻지 않았기에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이다. 일본의 숲, 그중에서도 공들여 잘 가꿔놓은 자연 그대로의 산림에서나 느꼈던 원시적인 향기다.

길을 따라 걷는 코스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눈앞에 거대한 삼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섰다. 아침 산책의 절정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숲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대가는 충분했다. 홀린 듯한 표정으로 숲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서 김병준 작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랫동안 만나오던 연인에게 이곳에서 프러포즈를 했다고 털어놨다. 수년 동안 함께 세계를 여행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연인이었다. 그 여행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삼나무 사이마다 걸어두고 둘만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렇게 평생의 여정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고 부연한다. 그의 표정은 충만한 행복으로 가득했고, 이토록 푸르른 숲속을 함께 걷던 모두가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하는 달콤함에 흠뻑 젖었다.

애월에서 만난 스페인의 맛

이번에는 한라산을 넘어 애월로 향한다. 지인이 추천한 스페인 요리를 맛보기 위함이다. ‘제주도에서 스페인 요리?’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제주도니까 가능한 스페인 요리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페인 요리라면 아무래도 ‘파에야(paella)’가 대표적일 것이다. 고기나 해산물, 채소 같은 고명을 넣고 끓여서 만든 스페인식 솥밥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스페인에 쌀이 처음 전해진 중세시대부터 해 먹던 음식이라고 하는데, 정작 ‘파에야’라는 이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붙었다고 전한다. 어원을 따져보면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지방의 언어로 팬이나 냄비를 의미하는 프랑스의 고어 ‘파엘르(paelle)’에서 유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라틴어로는 파엘라(patella), 이탈리아어는 ‘파델라(padella)’, 스페인 고어로는 ‘파디야(padilla)라고 부르는데, 모두 발음이 유사하다.

마침 식당의 이름부터 ‘더빠에야’다.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으로 하자면 ‘더파에야’라고 써야겠지만, 그쯤은 눈감아 주자. 앉은 자리에서 애월의 바다가 너르게 눈에 들어온다. 자리가 기가 막히다. 함께한 일행이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해서 파스타, 파에야 등을 주문했다. 주방이 바삐 움직이더니 하나씩 음식을 만들어낸다. 셰프의 손놀림이 무척 빠르다.

특이하게 눈에 띄는 점은 이곳의 음식은 딱새우를 잘 활용한다는 것. 초여름에 맛있는 딱새우지만, 가을에 해당하는 9월과 10월에도 감칠맛이 오르는 종이다. 껍질이 단단해서 처음에는 먹기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먹는 법을 알고 나면 껍질 속에 감춰진 살의 단맛에 매료되고 마는 식재료다. 제주의 바다에서 잡아 올린 딱새우가 파스타와 파에야를 모두 장식했다. 크림 파스타는 딱새우와 궁합이 좋다. 좀처럼 실패하기 어려운 메뉴여서 제주에서도 딱새우 파스타를 취급하는 집이 많다. 그런데 파에야는 어떨지 궁금했다.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에 차이가 나는지라 딱새우의 단맛을 잘 살릴 수 있을까 싶었다.

파에야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다. 잘 익은 쌀의 단맛 뒤로 사르르 스며든 사프란의 향기. 알아채기 쉽지 않은 그 향이 입안에서 살그머니 퍼진다. 딱새우의 살이 품은 단맛과 사프란의 수줍은 듯 아련한 향기가 이토록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곁에 올려진 홍합과 전복은 씹는 재미를 더한다. 파에야의 진가는 팬에 눌어붙은 밥이다. 양념이 잘 배어 있는 누룽지가 팬에서 떨어져 나와 오도독 씹힌다. 파에야의 양념이 짙게 농축된 맛으로 인상적인 마무리를 완성했다. 제주의 스페인 요리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해 질 무렵, 스페인 틴토 강에 쏟아지던 찬란한 햇살을 닮은 한 상이다. 제주를 수시로 그리워하게 될 이유가 또 늘었다.

최근 딱새우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원이름은 가시발새우. 껍질을 벗기기 힘들지만 그만큼 농후한 맛과 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혹자는 딱새우를 꽃게와 새우와 랍스터를 합친 맛이라고 표현한다. 제주를 포함한 남해안에서만 잡히는 이 새우는 타우린이 풍부하고 노인성 치매 예방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껍질에 포함된 키틴 (chitin) 성분은 콜레스테롤을 배출하는 기능이 있어 동맥경화나 고혈압 등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새우의 붉은색에는 아스타잔틴 (astaxanthin)이라는 항산화 물질이 들어 있어 노화 방지에 도움을 준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