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달의 수다(秀茶)

저는 한방내과 전문의로 한방순환신경내과를 전공했습니다. 한방순환신경내과는 신경계 질환과 순환기 질환 외에도 스트레스와 관련된 다양한 질환들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긴장을 하기는 쉬워도 의도적으로 이완을 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했던 차는 어느새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우연한 조합이지만, 차는 정신적인 이완을 도와주는 참 좋은 동반자였습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계획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입니다. 진료는 언제 올지 모를 환자분들이 어떤 말을 건넬지 모를 불확실한 상황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입니다. 자연히 진료를 하고 나면 마음이 지친 하루가 되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 차 한 잔 또는 쉬는 날의 차 한 잔은 많은 위로와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로 달래온 시간이 어느새 쌓이고 쌓여 차가 일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어디 진료뿐일까요. 세상에는 스트레스 받을 일이 너무 많고 그런 상황들 하나하나가 몸을 긴장시키고 마음을 팽팽하게 만듭니다. 진료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볍게는 단순히 두통이나 일시적인 답답한 기분을 느끼는 분들부터 숨을 못 쉴 정도의 큰 스트레스를 받으신 분들, 심지어 너무 큰 스트레스가 오랜 시간 낫지 않는 흉터처럼 되어 늘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긴장은 쉽고 이완은 어렵습니다. 또 사람마다 이완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 다르고 효과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차는 그런 이완의 요령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취미입니다.

치료와는 다른 위로로, 차와 함께하면서 느꼈던 일상의 이야기들이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 시대에 지쳐가고 있을 또 다른 분들에게 작은 위안과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학력]
•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 동 대학원 한의학 석사
• 한방내과 전문의

[경력]
• 현 세종 산돌한의원 진료원장
• 전 공군교육사령부 항공의무전대 한방과장
• 전 원광대학교 광주한방병원 일반수련의 및 전문수련의 과정

제준태
제준태

열두 달의 수다는 매월 한 종류의 차를 소개합니다. 일상에서 접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가 취미 생활입니다. 특히 차는 즐기는 과정에서 약리 효과와 심리적인 효과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우울, 피로, 짜증,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좋습니다. 차로 전하는 작은 위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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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즐기는 마음, 우전과 중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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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봄이 오고 있습니다. 3월 말에 이미 평년보다 이른 벚꽃 소식으로 벌써 봄기운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햇차가 나오기에는 아직 살짝 이른 시기인데요. 한국에서 햇차는 대개 4월 20일 곡우 전후부터 생산됩니다. 차를 수확 시기에 따라 구분할 때는 24절기 중 4월 초의 청명, 4월 20일경의 곡우를 기준으로 청명 전에 나오는 차는 명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나오는 차는 우전이라고 부릅니다. 또 그해의 잎을 처음 딴 것은 첫물차, 그다음으로 수확한 것은 두물차 하는 식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찻잎의 크기에 따라 작설이나 세작, 중작, 대작 등으로도 구분하지만 수확 시기에 따른 구분과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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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후실에서 만난 차, 우전 +

봄에 난 새순을 하나하나 손으로 따서 만든 순천의 우전입니다. 새순만으로 만든 작고 가는 찻잎으로 우려내면 원래의 찻잎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찻잎이 단정하고 예쁩니다. 풋풋하면서도 은은하고 달콤함과 향긋함 사이로 구수한 향기도 함께 지나갑니다. 산뜻한 느낌은 4월의 이슬 같고 은은한 구수한 맛과 단맛은 숭늉을 연상시킵니다.



한국은 차를 재배하기에는 상당히 북쪽 끝에 있는 편이라서 청명 전에 새순을 보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명전은 거의 보기 힘들고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생산되는 차들은 24절기가 아닌 그 나라 방식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대개 명전이란 이름이 붙어 있으면 중국 남부지역에서 생산된 차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엔 한국도 온난화의 영향으로 찻잎의 첫 수확 시기가 빨라지고 있는 편이고, 차나무에도 조생종이 있어서 좀 더 빨리 수확할 수 있는 품종도 있습니다. 반대로 간혹 판매자에 따라선 곡우 이전이 아닌 4월에 나온 차는 모두 우전이라고 하는 예도 있습니다. 조금 미묘한 부분들이 있는 거죠.


어쨌든 말이 길어졌지만, 우전은 한국 녹차 중에서도 새순을 손으로 딴 최상품들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격대 역시 높은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직접 차나무에서 찻잎을 한 번 따보면 가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된 노동에 비해 생각만큼 양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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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차, 보성덖음우전 +

보성에서 나온 녹차입니다. 은은하면서도 산뜻하고 달콤한 느낌이 있습니다. 우전보다 좀 더 세작의 풍미에 가깝게 느껴지며 끝부분의 산뜻함과 상쾌함이 도드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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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향산방, 백운옥판차 +

강진에서 나온 녹차입니다. 이한영 선생의 후손이 직접 만드는 차로 깔끔한 물처럼 느껴지면서도 향긋하고 숭늉 같은 편안함을 담고 있습니다.



역시 햇녹차는 4월이 아닌 5월이 본격적인 시즌이기 마련이라, 작년의 녹차를 꺼내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수확하는 녹차인 우전이 4월 20일 이전 생산이라곤 하지만 햇차는 찻잎을 따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공하고 제품화해 포장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4월 말이 아닌 5월로 넘어가야 본격적으로 시장에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차에 있어선 4월이 해넘이 달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연말연시부터 4월까지 많은 차 브랜드에서 재고를 할인해서 파는 이벤트도 많이 열립니다.


요즘엔 포장 기술이 발전해서 잘 포장된 녹차는 몇 년이 지나도 맛과 향을 유지하는 때도 많습니다. 대개 각 국가의 법률이나 차 관련 협회들, 브랜드에 따라서 유통기한이 정해지는데 한국 녹차는 대개 2~3년을, 일본 녹차는 1년, 그 외 국가는 국가에 따라 2~4년 정도까지를 상미기한으로 보고 있습니다. 잘 포장된 브랜드의 경우엔 상미기한을 단순히 생산일로부터 정해지는 판매 마감기한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포장이 잘 유지된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개봉한 찻잎은 공기, 수분, 햇빛 등을 만나면서 점점 품질이 열화되기 시작합니다. 따로 포장기를 이용해서 공기를 차단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변화기도 합니다. 4월의 찻자리는 해를 넘긴 찻잎 중 포장을 개봉했던 차들을 하나씩 맛보고 상태를 점검하는 시기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선 도로 밀봉을 하거나 혹은 그대로 보관하기도 하고 맛이나 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차나 변질된 차는 폐기하기도 합니다. 새해 햇차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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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포도(Ippodo), 데키로(Tekiro) +

일본의 녹차 중에서도 새순이 돋을 때 햇빛을 가리고 기른 찻잎으로 만든 녹차입니다. 차광재배한 녹차 특유의 분내와 오묘한 향기가 와닿고 이내 센차의 산뜻한 맛과 부드러운 맛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가부세차에 속하는 차로 개인적으로 더 높은 등급인 교쿠로 보다 더 취향에 잘 맞는 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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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계명차, 덖음세작 +

하동에서 나온 녹차입니다.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전형적인 세작의 맛을 갖고 있습니다. 세작에서 바라는 차의 맛이 가장 충실하게 담겨 있는 듯한 맛으로 은은하게 깔리는 감칠맛과 단맛에 봄날의 새싹 같은 연한 풋내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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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피시아, 서호용정 +

중국 남부 저장성에서 나오는 유명한 녹차입니다. 덖음차 특유의 부드러움과 구수함, 향긋한 단맛과 함께 은은한 꽃향기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향기와 화사함, 귤 향처럼 느껴지는 달콤하고 약간의 상큼하기까지 한 향기가 매력적입니다.



녹차의 최대 미덕은 그 싱그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녹차라고 해도 맛과 향은 모두 다 다릅니다. 한국 녹차는 대부분이 덖음 녹차로 상당히 많은 녹차에서 특유의 구수한 맛이 잘 살아 있습니다. 아마도 숭늉에 익숙한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서 그렇게 발전한 것이리라 짐작해 봅니다. 일본에는 일본인 취향의 녹차가 중국에는 중국인 취향의 녹차가 있습니다.


한국 녹차에서는 그런 구수함 속에서도 싱그러운 풋풋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전은 구수하고 은은한 단맛이 있다면 세작은 풋풋한 녹차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맛이 더 뚜렷합니다. 중작으로 넘어가면 구수한 맛보다는 녹차의 풋풋함과 맛이 최대로 또렷해집니다. 부드러운 맛을 선호할수록 더 어린잎인 우전 쪽으로, 풋풋하고 산뜻한 분명한 차 맛을 원한다면 더 많이 자란 세작, 중작 쪽으로 취향에 맞춰 고르시면 됩니다. 최고급품인 우전이라고 해서 정답인 것은 아닙니다. 세작이나 중작을 선호하는 분 중에선 우전은 맛이 심심해서 별로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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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다원, 중작 +

최근에 제가 차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후배가 제주에서 사 온 녹차입니다. 자기가 마셔보니 이 집은 우전보다 중작이 더 맛이 좋았다며 중작을 선물로 안겨 주고 갔습니다. 구수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잎 크기는 중작이지만 세작 이상으로 부드러운 풍미가 찻잎을 딸 때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느낄 수 있는 맛이었습니다.



차는 기호식품이고 취향입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거나 귀하거나 비싸게 취급되는 차라고 해서 나에게도 꼭 좋은 것이란 법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차든지 누군가에게는 사랑받고 있다는 겁니다. 때론 더 부드러워서 혹은 더 선명해서, 혹은 쓴맛이나 떫은맛이 분명해서, 혹은 향기가 좋아서, 혹은 맛이 편안해서. 각자 자신의 색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남들처럼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태되어 버리는 붉은 여왕의 시대입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힘들게 일하고, 공부하는 시대기도 합니다.


최소한 차를 마실 때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마실 때 좋은 차, 내가 느끼기에 마음에 드는 차가 최고의 차입니다. 녹차 역시 그렇습니다. 우전도, 세작도, 중작도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취향이 다릅니다. 우전이 비싸고 귀하게 취급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차가 우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 차가 좋다고 해서 그 차에 대한 감상이 별로인데도 억지로 좋은 점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노력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원래 차는 워낙에 다양하고 차를 즐기는 사람들의 취향도 다양한 법이니까요. 그래서 우전이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입니다. 그저 잘 즐겼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가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시간. 차는 그래서 힘들고 어긋난 듯한 일상 속에서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취향대로 즐길 수 있어서 좋습니다. 어떤 취미가 이렇게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한국 녹차가 가진 편안함 속에서 오늘도 ‘그래도 괜찮아.’라는 위안이 담긴 하루를 보냅니다.



© 제준태 원장의 열두 달의 수다(秀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