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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에는 전체 서클인 ‘경희문학회’에 들어갔다. 경희문학회에 온 한의대 동기가 둘이 더 있어서, 회장단이던 국문과 선배들도 놀랐던 일이다. 한의대 소속으로는 고전독서회에 가입을 했고, 새벽에 학교에 가서 선배들이 가르쳐 주는 <논어>를 읽었다.

그러다가 예과 2학년이 되어 뒤늦게 한의대 봉사 서클인 ‘청록회’에 들어갔다. 여름방학에 지리산 아래 남원시 산내면으로 여름 봉사를 갔다. 나는 선발대에 자원했고 봉사부장인 본과 2학년 형과 예과 1학년 후배와 셋이서 먼저 남원읍으로 갔다. 당시에는 봉사지에서 사용할 비품과 물건을 기차 화물을 통해 부쳤다. 남원 보건소에 가서 차량 협조를 받아서 남원역에서 물품을 찾아서 싣고 봉사 장소인 산내초등학교로 날랐다. 여름에는 교실에서 자고 식사도 학생들이 스스로 만든다. 대기실과 진료실을 꾸미고 봉사단이 자는 교실에는 방충망을 친다. 수돗가 한편에 솥을 걸고, 동네 청년들이 경운기로 땔감도 가져다준다. 함양장에 가서 회원들이 먹을 양식거리도 샀다. 여기까지가 선발대의 임무다.

1983년 7월 산내 초등학교 청록회 의료봉사

봉사지의 일과가 끝나면 매일 교실에 빙 둘러앉아 평가회를 연다. 진료를 맡은 선배들은 임상 케이스를 보고하고 지도 교수님이 감상과 평가를 한다. 하급생들은 자신들이 맡았던 일에 대해 소감을 말한다. 졸업한 선배가 가지고 온 복숭아를 먹자고 하나씩 옆으로 전달하는데, 저기 멀리 반대편에 앉은 여자 동기가 복숭아를 만진 것도 아니면서 큰 소리로 “벌써 간지럽기 시작한다.”라는 것이다. 응? 그건 좀 오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의외로 자기도 복숭아 알레르기(Allergie)가 있다면서 공감하는 회원이 몇이 더 있었다.

이 타임에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오스카 작품상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을 떠올린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극 중에서 배우 이정은이 맡은 국문광이라는 캐릭터 말이다. 복숭아 알레르기는 영화의 진행에서 아주 중요한 모티브다. 이 내용이 국내외 관객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는 것은 복숭아에 대한 알레르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름 봉사는 즐겁고 보람 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해의 겨울 봉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나는 추위에 두려움이 있다. 12월에 태어났는데 추위에 몹시 취약하다. 무의촌 산골이니 더 추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겨울에 입을 마땅한 외투가 없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할지 고민이 되고 괜히 창피스러울 것 같아서 지레 포기했다.

살면서 두려운 것이 또 있다. 매운 것이다. 6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체질식을 제대로 하면서 지나온 지난 20여 년은 더 심하다. 일례로, 빨강 포장지에 위압적인 검정 한자(漢字)로 이름을 적은 국가대표라면 격인 그 라면을 먹지 못한다. 매운 음식은 먹을 때와 나갈 때 두 번 고통을 준다. 보통은 후자의 고통이 더 심하다. 내게 매운 음식은 먹는 즐거움이기는커녕 차라리 고문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갑골문(甲骨文)은 한자의 기원에 대해 알려준다. 갑골이란 귀갑수골(龜甲獸骨)의 약칭으로, 갑골문은 거북의 배딱지와 짐승 특히 소의 어깨뼈에 새겨진 글자이다. 상(商 B.C. 1600~1046) 나라의 후기인 은허(殷墟) 시기에 사용되었던 문자로서 최초의 한자 원형(原型)이다. 한자는 갑골문에서 금문(金文)으로 이어지는데, 금문은 주(周 B.C.1046~256) 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상형문자로 청동기에 제작되거나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그런데 갑골문과 금문으로 남겨진 글자 중에, 글자가 만들어진 원리에 대한 해석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매울 신(辛)도 그런 문자다. 아래 그림은 매울 신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매울 신 갑골문은 17개의 형태가 발견되었고, 금문은 65개가 발견되었다. 아래의 그림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된 것도 있다는 뜻이다. 학자마다 의견이 제각각인데, 기존의 해석은 형벌용 칼이나 꽃의 씨방을 형상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맵다’는 의미와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매울 신의 변천

미리 밝히는데 나의 해석이 무리일 수도 있다. 나는 갑골문 연구자들이 한자의 기원이 상형(象形)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간과했다고 생각한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듯이 설 립(立)은 사람이 땅 위에 서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간단하고 쉽게, 이 글자를 거꾸로 뒤집으면 매울 신이 된다. 가로지른 어떤 물건에 사람이 거꾸로 매달린 모양이다. 그러니까 매울 신은 상형에 지사(指事)가 추가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몽골 유목민에게, 배신자는 거꾸로 매달아서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사람이 오랜 시간 거꾸로 매달렸을 때 느낄 수 있는 고통이 신(辛)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즉 신(辛)이라는 글자의 출발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김장철이 지나간다. 김장을 도와주고 온 환자분이 들어오면 나는 재채기가 나온다. 내 코는 귀신이다. 재채기는 매운 것에 대한 나의 알레르기 반응이다. 늘 겪는 일인데도 우선 내가 먼저 속으로 놀라고, “김장하고 오셨군요?” 하면 그 사실을 맞추는 나를 보고 환자분도 놀란다. 매운 것을 먹으면 딸꾹질을 한다는 분이 있다. 또 TV에 나오는, 누가 매운 것을 먹는 장면을 보기만 해도 땀이 난다는 분도 있다. 증상은 다르지만 모두 알레르기 반응이다.

얼굴 한쪽과 귀가 빨갛게 퉁퉁 붓고 열이 화끈화끈 난다고 왔다. 젊은 여성이다. 목과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가렵다. 동네 피부과에 가니 원인을 모르겠다고 해서 종합병원에 예약했다는 분도 30대의 여성이다. 온몸에 돌아가면서 두드러기가 돋는데 양약은 먹을 때뿐이고 도무지 나을 방도를 모르겠다는, 학생을 데리고 온 엄마의 하소연이다.

큰 병원에 가면 복잡한 알레르기 검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검사 결과지에 의심되는 항목이 몇 종류 찍힐 것이다. 보통은 집먼지진드기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약국에서 몇 개월 분의 두툼한 약 봉투를 받아안을 것이다.

원인은 각각 제주도 산 한라봉과 동네 치킨집의 닭튀김과 엄마가 정성을 들여 구워준 고등어구이인데 말이다. 확대경으로 보면 무섭게 생기기는 했지만, 집먼지진드기는 아무 죄가 없다. 체질의학을 하는 임상의의 제1과제는 체질감별이다. 체질이 감별되면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과 체질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위의 두 여성은 토양체질이고 두드러기를 가진 학생은 목양체질이다. 세 명 모두 알레르기 증상이었다.

체질이란 주제를 미리 상정하지 않았고 체질이란 개념이 체화되어 있지 않다면, 설령 한의사가 진찰했다고 해도 저 환자들의 호소 뒤에 숨은 한라봉과 닭튀김과 고등어를 찾아내는 일은 쉬운 판단 과제는 아니다.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을 이해하려고 하면 보안 시스템을 떠올리면 비슷하다. 위험을 감지하고 경보를 발령하며 조치가 필요하면 출동이다. 면역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위의 3단계가 자동으로 차례로 실행될 것이다. 먹은 것이 원인이라면 출동은 먹는 행위의 중지이다. 하지만 먹을 것을 앞에 둔 사람이 이것을 스스로 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체질에 적합하지 않은 음식물의 ‘섭취 금지’를 선언하고, 더 적극적인 조치로 체질침을 시술할 ‘8체질 보안관’이 출동해야만 한다.

© 이강재 원장과 떠나는 8체질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