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

진월인, 순우의, 편작의 형은 환자의 안색을 보고 병을 알았다고 한다. 아차산의 전설에서 맹인 점쟁이 홍계관은 상자 속에 임신한 쥐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맞혔다고 한다.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나 공주, 왕자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허구다. 하지만 과장이나 와전은 있더라도 완전한 날조는 아니라면?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과학과 상상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진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본다.
[학력]
서울대학교 학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사/석사

[경력]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 인턴/레지던트 (한방내과 전문의)
국제인증수유상담가
대한모유수유한의학회 교육이사
베이비뉴스 칼럼니스트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

김나희
김나희

신화와 전설이 허공에서 창조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실존했던 상황에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나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그 사실이 무엇이었을지 탐색해 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고 해주시면 더없는 칭찬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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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설 속 명의의 비밀은 4색각?! (부제: 뻥은 맞지만 구라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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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명의들은 대체로 미병(未病)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월인(秦越人)은 제 환후의 무증상 단계의 질병을 알아보았고, 순우의(淳于意)는 피부의 오색으로 질병을 진단하였다고 한다. 편작(扁鵲)은 자신의 큰형은 환자의 병이 나타나기도 전에, 둘째 형은 병이 나타난 초기에 치료하여 환자들은 중병을 미리 치료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하였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들에 혹시 숨어 있는 진실이 있다면? 과장은 있지만, 날조는 아니라면? 투시력이야 말도 안 되지만, 안색의 미묘한 변화를 남들보다 미리 알아차리는 망진(望診)은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원추세포의 종류가 색 민감도의 핵심


우리 망막의 원추세포 (원뿔세포)는 대체로 3종류다. 빨강~녹색의 빛에 반응하는 세포 (적원추세포), 청록~파랑 사이의 빛에 반응하는 세포 (녹원추세포), 파랑~보라 사이의 빛에 반응하는 세포 (청원추세포)다. 대부분의 사람은 적원추, 녹원추, 청원추의 3원추를 갖고 있어 3색각이다. 원추세포 1종류가 결핍되면 2색각이라고 하는데, 흔히 말하는 색맹이다. 예를 들어 적원추나 녹원추가 없으면 적록색맹이고 청원추가 없으면 황청색맹이 된다. 개, 고양이 등 대부분의 포유류는 2색각이므로 3색각인 영장류 기준에서는 색맹이다.


한 종류의 원추세포는 100가지 정도의 색을 구분할 수 있다. 두 종류의 원추세포의 결합으로는 100*100, 즉 만 개의 색을 구분할 수 있다. 세 종류는 100만 가지로 늘어난다. 색을 자세히 구분하는 연습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100만 가지의 색을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각적 초능력이 가능할까?


전색맹 (완전색맹)보다 부분색맹이 세상을 다채롭게 보고, 2색각인 부분색맹보다 3색각인 일반인이 더 다채롭게 본다. 그렇다면 원추세포 종류가 더 많으면 어떨까? 구분 능력이 지수적으로 증가하므로 원추세포가 4종류라면 무려 1억 가지의 색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원추세포가 사람보다 많은 곤충이나 새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 눈에 세상이 얼마나 풍성하고 강렬하게 보일지 짐작할 수가 없다.


이론상으로는 인간에게도 4색각이 존재할 수 있다. 4색각 사람에게는 아마 보통 사람보다 세상이 더 총천연색으로 보일 것이고, 안색의 극히 미묘한 변화도 뚜렷하게 느껴질 것이다. 전설상의 진월인, 순우의, 편작 형들이 실존할 가능성이 있다!


신경학자 가브리엘 조던 (Dr. Gabriele Jordan)은 이 이론상의 가능성을 찾아 무려 20년간 4색각자를 찾아다녔다. 결국, 2010년 영국 북부에서 4색각 테스트를 완벽하게 통과한 여성을 발견했다. ‘cDa29’라는 코드로만 알려진 이 여성의 직업은 마침 의사다. (얼굴만 보고 병세를 맞춘다는 명의로 지역에서 소문이 자자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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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간의 연구 끝에 2010년 최초로 4색각자를 발견한 가브리엘 조던 박사

사진 출처: https://www.ncl.ac.uk/psychology/people/profile/gabrielejordan.html



4색각자는 실제로 안색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cDa29는 익명으로 남아 있지만, 2012년에 새로이 4색각자로 밝혀진 콘세타 안티코 (Concetta Antico)라는 여성은 자신을 공개하고 4색각자의 눈에 비치는 세상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안티코의 직업은 마침 화가다! (사실, 화가라서 타고난 4색각을 계속 민감하게 훈련했을 수도 있다. 다른 적성을 갖고 있었다면 그냥 평범한 색감을 가진 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안티코도 색깔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자극이 많은 쇼핑몰 같은 곳은 가기 힘들다고 한다. 색에 민감한 것이 힘들어서 색을 멀리하고 흑백 톤의 단조로운 배경에서 일하고 있는 4색각자도 가능하겠다.)


보통 사람들이 나뭇잎 하나에서 3~4가지의 초록을 볼 때 안티코의 눈에는 500가지의 초록이 구분되어 보인다. 보통 사람들이 나름 빨간색 옷과 구두를 매치했다고 하면, 안티코의 눈에는 영 안 어울리는 다른 색 옷과 구두가 보인다. 그리고 아픈 사람을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딸이 아플 때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서 초록빛의 누런색이거나 희끄무레한 연보라색이 되어 초기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남들은 안색이 변한 것을 알지 못할 때, 안티코는 약간 홍조가 띠거나 회색이 되는 변화를 알아차린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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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코의 그림이 훨씬 풍성하고 다채롭고 사실적으로 느껴진다면 당신도 바로 4색각일 수 있습니다. 4색각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 연구자 가브리엘 조던 박사에게 연락해 보세요.

사진 출처: https://concettaantico.com/the-artist/


안티코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우리는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적록색맹인 사람에게 3색각 (보통 사람)이 ‘적색과 녹색이란 게 있는데, 그게 우리 눈엔 다르게 보여’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적록색맹은 짐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안티코와 같은 4색각들이 모여서 안티코의 그림을 감상하면 “아휴, 3색각들이 그린 단조롭고 색감 엉망인 그림을 보다가 이제야 자연의 색을 제대로 표현한 그림을 보네!”라고 그들끼리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3색각들에게는 안티코의 (아마도 오색찬란할) 그림과 다른 3색각 화가들의 그림이 뭐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안티코의 홈페이지 ( https://concettaantico.com )에 가서 그의 그림이 지금까지 봐왔던 그림들과 다르게 훨씬 다채롭다는 걸 느낀다면 당신도 바로 4색각일 수 있다. 4색각자를 애타게 찾고 있는 연구자 가브리엘 조던 박사에게 연락하시길!



부분색맹도 부분적으로는 색 민감도가 더 높다


의외로 전설의 명의는 부분색맹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분색맹은 그들이 구분하는 색 안에서는 오히려 더 민감하게 색을 분간하고 질감과 명암에 민감하여 색깔 위장술에 잘 속아 넘어가지 않는 등, 다른 쪽으로 감각이 발달했다. 예를 들어 적록색맹은 무지개에서 빨주노초까지 비슷하게 보다가 초록색에서 청록색 넘어갈 때 갑자기 명확하게 구분하여 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3색각자는 빨강-노랑-초록이 서로 매우 다르게 느껴지고 초록-청록-파랑이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적록색맹에게는 초록-청록-파랑이 명확히 다르게 느껴진다. 카키색의 미묘한 차이도 훨씬 잘 구분한다고 한다.


4색각은 여성에게만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상상을 하나 더 얹어보면, 시각 초능력이 있고 의술을 아는 여성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을 테니, 홍계월(洪桂月)이나 뮬란, 방한림(方翰林)처럼 남장하고 활동했을 수도 있다. 편작의 형들은 사실 편작의 누나 (또는 언니)가 아니었을까?



© 한의사 김나희의 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