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

진월인, 순우의, 편작의 형은 환자의 안색을 보고 병을 알았다고 한다. 아차산의 전설에서 맹인 점쟁이 홍계관은 상자 속에 임신한 쥐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맞혔다고 한다.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나 공주, 왕자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허구다. 하지만 과장이나 와전은 있더라도 완전한 날조는 아니라면?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과학과 상상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진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본다.
[학력]
서울대학교 학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사/석사

[경력]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 인턴/레지던트 (한방내과 전문의)
국제인증수유상담가
대한모유수유한의학회 교육이사
베이비뉴스 칼럼니스트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

김나희
김나희

신화와 전설이 허공에서 창조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실존했던 상황에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나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그 사실이 무엇이었을지 탐색해 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고 해주시면 더없는 칭찬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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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맹인 점쟁이는 심안(心眼)을 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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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의 지명은 ‘아차!’라는 탄식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차피 정사가 아니라 야사라 원본이 따로 없음으로 내가 들은 버전을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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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맹인 점쟁이 홍계관에게 요절할 운명의 아이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제발 아이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홍계관은 자신이 위험해질 것을 알고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아이의 어머니가 계속 읍소하자 결국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귀신을 물리칠 비법을 알려준다. 그날이 되어 귀신이 아이의 목숨을 가져가려고 왔지만, 그 어머니의 예방책에 막혀 실패하자 홍계관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아이의 어머니가 홍계관에게 극진하게 감사를 표하나 홍계관은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에 씁쓸하게 웃는다.


용한 점쟁이의 소문이 궁궐까지 퍼지고 미신을 싫어하는 임금은 홍계관을 시험하려 부른다. 홍계관은 임금이 세운 여러 단계의 시험을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질문을 받는다. 홍계관이 쥐 다섯 마리라고 대답했으나 상자를 열어 보니 쥐 한 마리뿐이었다. 임금은 삿되게 혹세무민한 죄로 홍계관을 사형에 처하라 명한다.


홍계관이 형장이 있는 산으로 떠나고 나서 홍계관의 능력을 신임했던 신하 몇 명은 안타까워하며 쥐의 배를 갈라 보자고 임금에게 청한다.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쥐 네 마리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임금은 홍계관의 목숨을 살려 주라고 다시 명한다.


왕의 명을 받은 신하가 말을 타고 깃발을 흔들며 형장으로 향한다. 깃발을 왼쪽으로 기울이면 빨리 사형을 집행하라는 뜻이고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살려 주라는 뜻이다. 신하가 깃발을 오른쪽으로 흔들며 말을 달리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깃발이 왼쪽으로 쏠렸다. 홍계관에게 앙심을 품은 귀신이 바람을 불게 한 것이다. 신하가 다시 힘껏 깃발을 오른쪽으로 당겼으나, 다시 바람 때문에 왼쪽으로 쏠렸다. 더 힘껏 오른쪽으로 당겼으나 이번에도 다시 왼쪽으로 쓸려가고 말았다. 깃발을 지켜보던 망나니는 홍계관의 목을 베었다. 홍계관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안타까움에 ‘아차’하고 탄식을 내뱉은 데에서 아차산의 지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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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화두를 던져 주는 이야기 속에,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홍계관의 투시 능력이다. 시력도 없는데 투시 능력이 있다는 설정은 단지 시각 장애인에게 신비로운 능력을 부여하고 싶어 하는 대중의 믿음에서 유래했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전설적인 능력은 실존 인물에서 비롯했을 수도 있다.


대니얼 키쉬 (Daniel Kish)는 인간 반향 정위 (echolocation) 전문가이며 배트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미국인인 그는 망막모세포종 (망막의 암)을 갖고 태어나서 생후 7개월과 13개월에 각각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제거했다. 그는 “딱! 딱!”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내면서 그 소리가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소리와 진동으로 세상을 본다. 박쥐나 돌고래들이 초음파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물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재질이 나무인지 금속인지, 건물 표면의 모양은 어떤지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능력을 비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에게 교육해왔다. 비장애인도 며칠 훈련을 받으면 반향 정위를 계발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미 40개국에서 수만 명의 시각장애인이 그가 대표로 있는 World Access for the Blind (WAFTB)의 반향 정위 교육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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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니얼 키쉬의 홈페이지 https://visioneers.org/


그가 메아리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다. MRI 연구 결과는 그가 반향 정위를 쓸 때 사용하는 두뇌 부위는 비장애인이 시각을 처리하는 부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그를 포함해서 반향 정위를 사용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보는’ 세상은 과연 어떨까?


키쉬의 표현에 따르면 360도 각도로 세상이 보이고 숨겨진 구석이나 표면 너머도 보여서, 마치 희미한 3차원 기하 구조처럼 보인다고 한다. 원래 시력이 있었다가 시력을 잃게 된 뒤 키쉬의 반향 정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시각과 반향 정위를 비교해서 설명해 줄 수 있다. 이 사람의 비교에 따르면, 시력을 잃고 난 뒤에는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입체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3층 집에 앉아서 집안의 모든 층의 모든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엑스레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돌고래들은 임신 여성과 임신 돌고래에게 관심을 자주 보이고 호감을 보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연하다. 초음파의 반향 정위를 사용하는 돌고래들에게는 뱃속의 작은 사람과 작은 돌고래가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더글러스 애덤스 (Douglas Adams)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제가에도 관련 가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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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간은 멜론 (melon) 같은 초음파 생성 기관이 없기 때문에 돌고래처럼 투시해서 보는 능력은 완벽하게 생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반향 정위 및 청각, 후각을 단련하면 공간 인식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 아차산의 홍계관 전설은 반향 정위를 사용한 시각장애인들의 일화에서 유래했을까? 인간도 끊임없이 연습하면 반향 정위로 뱃속의 태아를 볼 수 있게 될까?



© 한의사 김나희의 신화와 전설 근거중심 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