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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이, 대학에서 교수들에게 연구비는 참으로 중요한 화두이다. 학문이라는 거대한 장르가 당대로만 끝날 일이 아닌 만큼, 교수로 발령을 받으면 으레 미래를 준비하는 첫 단계로서 훌륭한 제자들을 줄줄이 키워내는 일, 해당 분야의 연구 수준을 세계의 경쟁 무대에 올려놓는 일들이 과제로 남을 터이니, 인건비를 비롯하여 연구시설, 장비와 그에 소요되는 재료비 등을 마련하는 숙제는 평생의 교수 생활 동안 끝없이 감당해야 하는 업이다.

태어나 처음 이국땅에 발을 디디며 시작한 나의 학문 여정, 대학원 석사 시절의 연구 활동은 그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연구실에 출근하게 된 이래 한참 동안을 묵묵히 지켜보았지만, 학교 안내 책자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원숭이 침 진통 연구 프로젝트’는 아무 데도 안 보였고, 그저 교수님 따라 타이베이 출장 다니는 일만 잦아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알고 보니 거의 매주 참석했던 그 회의는, 당시 대만 의료계의 최고 관심사 중에 하나였던 소위 ‘양한방 협력 당뇨병 연구 프로젝트’의 큰 그림을 기획하고 진행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갑자기, 대만 도착 첫날, 대만 방언을 마구 쏟아내 나를 당황하게 했던 동네 식당 그 대형 색채 티브이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일이 다시 생각난다. 한국에는 아직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던 컬러 티브이였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남한 땅 면적의 반도 안 되는 작은 나라 대만은 당시 막강한 외화보유고 (2021년에도 세계 5위)를 자랑하며,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위주의 기반 산업 성장에 초점을 둔 경제정책을 펴고 있었다. 동시에 남녀 사회 진출 기회가 매우 평등하게 유지되고 빈부격차도 심하지 않았던 탄탄한 사회구조 속에 탁아소, 노인 요양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이 매우 선진화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면 온 식구 네댓 명이 오토바이 한 대에 꽉 끼어 타고 식당에 도착하여 콩국과 만두, 흰죽 등으로 식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보지 못하던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퇴근 후 저녁 식사를 마치면 많은 사람이 공원으로 몰려와 기공, 댄스, 태극권, 체육 활동 등을 즐기고, 깊은 밤 또 출출해지면 주변 지인들과 야시장에서 만나 야식을 즐기는 풍경 속에 나도 심심찮게 초대되곤 했다.

이처럼 모든 국민이 고루 행복한 듯 보였던 그때, 과연 대학의 연구실도 그러했을까? 내심 궁금해졌지만, 이방인의 관점에서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우리 지도 교수님은 양명의과대학과 중국의약대학을 협력관계로 이끌어 돈 많은 대만 정부의 ‘양한방 공동 연구비’를 수주했음이 분명했다. 두어 달 여러 차례 회의 끝에 연구 종합 개요가 만들어졌고 구체적 팀이 형성되었으며 그중에서 침 연구는 내 몫으로 떨어졌다.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침 진통 연구를 배우고 싶어 여기까지 왔는데 느닷없이 당뇨병 쥐에게 침을 놓는 책임자가 되다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동물실험 연구를 혼자 기획하고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참으로 암담했으나, 그나마 대학 예과 시절 비교동물학 시간에 생쥐를 해부하고 뼈를 추려 보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크게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제반 연구의 여건이 참으로 발달하여 유전적 당뇨병 쥐도 생산해 내고, 관련 연구에 필요한 키트 시약도 완제품으로 생산돼, 좀 비싸긴 해도 연구자들이 신속하고 정확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음이 다행이다. 그러나 1980년 당시에는 동물의 병증 유발은 물론이고 키트 시약조차 실험실에서 다 만들어 사용해야만 했다. 한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바다를 건너온 쪼그마한 여학생이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쉽지 않았던 여정의 시작이었으니, 실험 쥐와 친해지는 일은 물론이고 키트 시약 제조에 자꾸만 착오가 생기면서 본 실험 일정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내 생각에 지도 교수님은 아마도 태양인 기질에 가까웠던 것 같다. 게다가 미국에 매우 오래 사신 탓인지 성질이 급해지면 중국어보다 영어가 먼저 튀어나오게 되니 주변의 귀와 입들이 꽉 막혀버리곤 했다. 나 역시 교수님의 영어 문장이 큰 목소리로 구사되기 시작하면 그 핵심을 파악하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시간이 좀 지나서야 겨우 대강의 내용을 알아채곤 했다. ‘아! 본 실험은 도대체 언제나 시작하느냐, 타이베이 실험실은 진도가 빠르게 진행되는데 여기도 그 진도에 맞추어야 할 거 아니냐, 다음 주에 진행될 진도 회의에서는 뭘 보고할 거냐... 등등 대강 이런 내용이었구나!’

이런 과정에서 웃지 못할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의 타이중 인구는 20만 명이 채 안 되고 대학교도 2~3개밖에 없는 작은 도시였기에, 실험실의 많은 재료를 수도인 타이베이에서 구매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험이 진행되던 중 어느 날, (당연히 택배라는 그 좋은 시스템도 없었기에) 모자라는 동물과 시약을 사러 타이베이행 버스에 올라탔다.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알게 된 실험동물센터에 직접 방문하여 주문한 50여 마리의 생쥐를 받아오게 되었다.

내가 언제 이런 짓을 경험해 보았던가! 그냥 주는 대로 받아서 테이프로 잘 여민 후 가슴에 안고 다시 귀가 버스에 올라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버스 안 여기저기 비명이 들리고 온통 난리가 났는데... 세상에나, 생쥐 몇 마리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여기저기를 유람하고 있질 않은가! 무식한 실험동물센터 사람들, 무식한 나 자신을 탓하며 한참을 그날의 악몽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두어 시간 장거리 버스 타고 오는 상황에 그 많은 생쥐를 골판지 박스에 담아주면 어쩌란 말이냐?

여러 단계의 실험 과정에 시행착오의 반복, 침 효과의 부진함, 췌장 조직세포의 전자현미경 분석을 위한 타이베이 출장 등으로 헉헉거리다 어느새 2년이 다 되어갈 즈음, 드디어 그동안 겨우 얻어낸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분석하면서 논문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다다랐다. 틈틈이 도서관 참고문헌 탐색도 하면서, 컴퓨터나 중문 타자기도 없던 시절, 며칠 밤을 새워 볼펜으로 깨알처럼 작성한 첫 원고를 교수님께 자랑스레 내밀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의 교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또 다른 참고 자료들을 어깨에 얹어주며 추가하라 이르시는데... 심지어는 해외 출장길에서조차 한 묶음의 참고 자료를 찾아와서 말이다. 이런 일이 이유도 모른 채 여섯 번이나 반복되면서 유난히도 긴 여름 속 나의 심신은 실망과 피곤으로 찌들어져만 갔다.

‘그래! 이러다 내가 죽겠다. 이번에도 똑같은 반응이면 당장 짐을 싸 돌아가겠노라!’ 결심하며 출근했던 일곱 번째 그날, 역시 똑같은 상황에 교정 잔디밭에 모든 자료 좍 던져버리곤 엉엉 울고 말았던 그 시간, 한 교수님이 지나가시다 흐느끼던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문자 그대로 콧노래 (코를 튕기며 리듬 얹어 노래하는)로 나를 웃기며 밥까지 사주시던 일들은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그런데, 잔디밭에 주저앉아 울며 밤새 써간 논문을 시원스레 없애버리려던 마음에 2~3cm쯤 찢어내려 가던 찰나의 순간, 누군가 나의 마음 귀에 속삭였다. 

“잠깐! 1분만 기다려보면 어때?”

집에 돌아온 그날 밤에도, ‘지금 나의 이 감정이 내일 깨어나서도 변함이 없다면 용감하게 짐 싸서 돌아가리라’ 또 한 번의 결심으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피로가 말끔히 가시고 상쾌해진 나의 몸과 마음은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여태 23개월을 참아왔고 이제 겨우 1개월만 더 견디면 되는데 못할 게 뭐 있냐?”

사람은 공감과 소통을 위해 대화를 하는데, 보통 상대의 말에 겨우 15초 동안만 집중하게 된다는 ‘15초 효과’란 말이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에 그보다는 조금 더 긴 ‘15분 정도’만 집중을 한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심리학에서도 감정 다스리기 요법으로 ‘15초 법칙’이란 게 있다고 하니 ‘15’라는 숫자에 뭔가 색다른 파장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무튼 기쁨이든 분노이든 하나의 감정이 치솟아 정점을 찍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고도 긴 시간 바로 ‘15초’라고 한다.

그러나 나도 평생 간직해온 법칙 하나가 있으니, 바로 앞의 경험에서 얻어낸 ‘1분의 기다림, 1일의 참음’이다. 이 정신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풀어나가는 가운데 많은 글로벌 인연들이 만들어져 나를 도와주었고, 은사님과의 인연도 끊임없이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었으며, 삶 속에 숱하게 밀려오던 여러 어려운 상황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렇게 나머지 1개월을 잘살아 보리라 결심했던 그 날 아침, 가벼워진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밖에 누가 찾아왔다. 교수님의 또 다른 제자 외과 의사 탕옌저우 선배였다. 교수님이 논문 정리와 중문 원고 작성을 빠른 시간 내에 도와주라 지시하셨다며,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내 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결국 그렇게 태어난 나의 졸업논문! 타이베이에서 오신 두 분포함 다섯 분 교수님들의 심사를 거쳐 끝내 엄지척을 얻어내었다. 그리고는 한국 식당에서의 축하 파티를 끝으로, 행여나 또 잡을세라 다음 날 나는 공항으로 줄행랑치고 있었다.

© 이혜정 교수의 담 넘어 만난 한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