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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여름. 대만 유학의 고달팠던 그 현실을 탈출하여 무사히 도착한 내 나라 내 땅, 그날의 숨 쉬던 공기는 어쩌면 그리도 싱그러웠던지...

귀국 인사차 석사 졸업논문을 들고 당시 경희대 총장이신 안치열 총장님을 비롯하여 한의대 최용태 학장님과 여러 교수님을 방문하던 길이었다. 2년 동안 낯선 이국땅에서 팍팍한 실험, 논문 작성 등에 시달렸던 심신은 거듭된 출산과 임신까지 겹치면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학장실을 방문했을 때 “향후 진로를 어떻게 정할 거냐? 한의학관에 처음으로 침 기초연구실을 만들 거냐, 아니면 침구과 임상으로 갈 거냐?” 질문을 주신다. 아마도 내 평생의 인생 여정은 이후 10초의 순간에 떠오른 영감으로 결정되고 말았던 거 아니었을까.

어차피 양 교간 협정 하에 자매교 교환학생 신분으로 장학금까지 받았으니 최소 1년은 학교에 봉직해야만 하는 규정이 있었다. 그때 피곤함에 찌들어있던 가녀린 여인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친 깜찍한 단서는 “아! 대학에 남으면 방학이라는 이점이 있구나!” 그거였다. 내가 평생 임상 진료실이 아닌, 대학의 연구실에 있게 된 동기는, 열심히 연구하여 ‘한의과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세우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개척자적 거대 플랜이 아닌, 이렇게도 단순하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거였다.

속도 모르는 우리 학장님은 “드디어 침구경락 기초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라며 나의 기특한(?) 결정을 매우 기뻐하셨고, 이어서 케케묵은 열쇠 더미 풀어 방치되어 있던 방 두 개를 오픈해 주셨다. 하나는 작은 실험실용, 또 하나는 임산부 휴식 겸 사무용 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대학 본부의 연구 장비 예산이 집행되고 있던 터라 이리저리 각 연구실에 나누고 남은 예산 - 굳이 기억해 보면, 60만 원 정도 - 이 있었고, 다들 고민하신 결과 고맙게도 새로 문을 연 곳에 주기로 하였단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날 까칠한 증류수기 한 대가 내 실험실로 배달되었고, 이로써 1982년 9월에 출발한, ‘경혈학교실’의 전신인 ‘경락경혈연구실’ 재산목록 1호는 내 계획이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회색빛 알루미늄 증류수기’로 낙찰되었으며, 덤으로 휴식용 낡은 침대 1개와 책걸상 세트도 배당받았다.

아름다운 이름 ‘경락경혈연구실’ 그랬다! ‘경락경혈학교실’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대학원 과정에 우리 교실이 개설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플라스틱판에 나 스스로 붙인 연구실 팻말이었다. 정상적으로는 전임교수 밑에 조교가 있고 대학원 교실이 개설되는 법인데, 내 위에 담당 전임교수가 없는 연구실 조교였던 상황에서, 극히 소수로부터이긴 하지만, 내 직위의 정체성에 대해 공격도 자주 받았다.

또 한편, 이미 고전 속에 한의학 이론이 다 정리되어 임상에서 잘 쓰고 있는데 거꾸로 무슨 실험을 해서 뭘 증명하겠다는 거냐며, 실험실을 꾸미는 것에 대해 정통 한의학자가 아닌, 학문을 변질시킬 위험한 이단아처럼 취급도 받았다. 동물실의 항온항습 통기 장치를 주장했다가 “사람 방에도 그런 시설이 안 되어 있는데 쥐새끼들에게 그런 걸 해줘야 하냐?”라며 호된 꾸지람도 들었던 시절이었다. (내 기억엔 아마도 그 뒤로 20년이 지나서야 조금은 갖춰진 동물실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 SCI급 과학논문, 임상 및 실험 데이터 등에 대한 개념의 싹조차 매우 미미했던 그 시절, 한의학에 대해 실험 연구를 시도한다는 것, 이 또한 당시의 사고에 비춰봤을 때 참으로 거대하고 외로운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그 누구라도 실험 연구의 당위성을 묻는다면 “과학적/통계적 언어를 활용한 한의학 이론 규명, 그리고 질병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 있다.”라고 변함없이 말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 1호 한의학 박사 (류근철·구본홍·최용태·강효신 교수님)가 탄생한 것은 1976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시대 한의과대학에는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할 실험실이 없었던 때문에 학위 준비생(?)들 (대학 원로 교수님 순서대로 박사과정 우선 입학)은 의과대학 실험실을 통해 모든 논문 실험 작업을 준비하고 진행하고 심사도 받았었다.

매우 굴욕적인 이러한 과정을 톡톡히 경험하고 지켜보신 대부분의 교수님이 당연히 한의과대학에 제대로 된 실험실을 갖추는 것에 큰 목표를 두었던 것은 당연한 시대적 요구였다. 그러던 차에 배부른 얼뜨기 하나가 제 발로 스스로 걸어 들어 왔으니 어찌 반갑지 아니했으랴!

1972년 죽의 장막 중공을 방문했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에게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던 그 시절, 티브이로 방영된 침 마취 영상에 함께 감동하면서, 아픈 환자와 함께 울고 웃는, 침 잘 놓는 구침지희(九鍼之戱) 한의사를 꿈꾸며 대학에 들어왔는데, 유학 장학금 받은 덕에 의무 봉직 1년 정도로 딱딱한 연구실 삶은 마무리할 작정이었는데, 실험 쥐와 내내 동고동락해야 하는 나의 현실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냥 팔자였고 선택된 운명이었다.

비교컨대, 과거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한의학이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갈고닦아왔던 안방과 같았다면 실험실을 통한 연구의 삶은 대롱 밖의 낯선 또 다른 세상이었다. 아무도 안 가본 길목에서 물론 겁도 났지만, 불현듯 ‘이 길이 옳다면, 기어이 가야 하는 길이라면 나 혼자서는 어림없다. 나 혼자의 시작은 준비도 미미하고 어설펐지만, 후세대를 지킬 청출어람 후배들을 많이 길러내야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쌓아가며 조교 활동 (침구과 교수님들의 경혈학 강의 보조 및 실험 연구)을 하던 중 드디어 1983년 9월 나에게도 순서가 왔다.

선배님들에 이어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전편에 빠트린 얘기하나를 더 하자면, 당시 대만에는 교육부의 대학과 대학원 설립 인가 과정이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워 중국의약대학에도 대학원 박사과정이 설립되어 있지 않았었다. 지도교수님이 뒷목 잡을까 봐 석사 논문이 통과되자마자 줄행랑쳐 돌아왔다는 말만 생각하실 거 같아 첨언해 본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엔 인터넷도 SNS도 없었던 시절, 방안 가득 차지하는 커다란 애플 컴퓨터가 주종인 가운데 조금이라도 흥미 있는 사람들은 학원에 다니며 도스 프로그래밍부터 배워야 하던 그 시절에 주식회사 미원에서 연락이 왔다. 당뇨병 연구 프로젝트에 공모해달라는 것이다. 내 석사학위 논문 주제가 ‘당뇨병’이었음을 어찌 알았는지 그때도 지금도 난 모른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당시로는 거금인 800만 원이 내 손에 쥐어졌고, 고맙게도 이 연구비는 대학 유급 조교로 출발하면서 대학원생 시절 스스로 받은 ‘제1 호 연구비’가 되었다.

11개월 반 차이의 연년생 (한 해 동안 초특급 생산)을 기르면서 시작한 한의 기초학문의 길. 지금 생각해 보면 한의계 최초의 해외 유학도 모자라 결혼 출산 그리고 모교에서의 연구 생활 등 하나하나 모두가 다 엄청난 이벤트인데 조금씩 시차를 두면서 서서히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앞에 놓인 거친 장애물들 다 걷어내 가며 항상 지쳐 허덕거린 채 뭐 하나라도 제대로 마무리한 것이 없음에... 천천히 충실히 한 계단 한 계단 다지며 걸어가는 후배 제자들을 보면 참 부럽고 지혜롭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이왕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다면 결혼도 안 하는 게 좋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어느덧 대학원 과정 3년 뒤 ‘대한민국 여성 한의학 박사 2호’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불과 6개월 차이임에도 1호 박사님의 그늘이 워낙 크다 보니, 아무 관심도 못 받은 채 나 혼자 그 의미를 새기며 다독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수고했다. 장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학위 취득 후 여전히 학교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바로 경혈학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경혈학 담당 전임교수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 시점에 일단 시간강사로 데뷔를 하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첫 여성 교수이기 때문에 한 학기 정도 시험 (거친 남학생들을 다룰 줄 아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어느 분이 강력하게 주장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금은 우스운 얘기 하나, 그래도 감사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의 시간강사 첫 시간에 나의 지도교수, 최용태 학장님이 맨 뒷자리에 앉아 수업 분위기를 감시하셨던 풍경이다. 혹시라도 학생들이 여성이라 무시하고 버릇없이 함부로 나오면 혼내주기 위해서... 그런데 참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첫 시간이었음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전국 한의과대학의 여성 교수님들이여! 내 얼마나 그대들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나의 첫 삽을 뜨는 그 순간부터 참고 또 참으며 인내를 해야만 했는지... 또 얼마나 남 (=남자)들보다 10배의 노력으로 경주해야만 했는지... 그대들은 아시는가! 조그맣게 외쳐본다.

전임강사로 데뷔해 드디어 시험 기간을 마치고 정식 교수 생활이 시작된 1987년 1학기. 이제 구체적으로 한의학 바깥세상과 경쟁하고 화합하고 융합하며, 어깨도 나란히, 인류공영의 삶에 투신할 후학 양성의 길, 교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내 인생 또 다른 패러다임이 시작되었다.

© 이혜정 교수의 담 넘어 만난 한의학